어느 아낙네의 죽음

2005. 10. 19. 00:46삶 속의 이야기들

 

 

 

 

어느 젊은 아낙의 죽음


추석은 우리의 크나큰 명절이다. 추석은 그 어느 명절보다 넉넉함을 가져다준다. 수확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시골이라도 인심이 넉넉해지고 웃음이 깃드는 명절이다.  밭은 누른 황금으로 출렁되고, 마당에는 감이 노랗게 익어가고, 대추나무에는 대추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포도나무에는 알알이 익어가는 검푸른 포도알..... 정말 생각만 해도 풍요로움이 넘치는 고향의 정취, 그래서 추석의 귀향은 사람들의 마음에 잊혀진 옛 고향의 향수를 되새김으로서 새로운 내일의 삶에 활력소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아마도 딱딱한 아스팔트와 메마른 시멘트 구조물 위에서 자라난 도시의 사람들은  그런 향수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 도시인들이 그들의 삶에서 삭막함과 냉정함을 불러오는 또 하나의 큰 비애(悲哀)가 아닐까? 비록 가난에 찌달려 흙냄새 풀냄새 속에서 얼룩이 검둥이와 함께 살아온 지겨웠던 그날들이었지만 돌아갈 이런 고향을 가진 사람은 비록 지금도 가진 것은 넉넉지 못하더라도 메마른 이 삶에 행복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 날만큼은 진정 소박한 하나의 자연인으로 돌아가 가족이란 혈연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힘들고 외롭게 살아 온 내 시간에 또 다른 획을 긋고 삶의 여유를 재충전하는 그런 날이 되기 때문이다.


어제는 바로 그런 추석날이었다.

한가위의 보름달을 기대하며 부모형제 친지들이 모여 한껏 고향의 향수를 달래보는 날 이날, 우리 동네의 한 아낙네가 목을 매고 자살을 했다. 아줌마로 불리우기는 아직 너무나 애띈 이제 겨우 29살, 큰 놈은 4살, 막내는 아직도 100일 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것도 자기 집 빌라에서는 목을 맬 자리가 없어서 추석명절을 지내기 위해 나들이 떠난 남의 집 빌라에 들어가 그 집의 가스배관을 빌어 목을 매고 자살을 했다고 한다.


추석 다음날 명절을 쇠고 집에 돌아 온 그 집 안주인은 자기 집 가스관에 덩그렇게 매달려 있는 그 시체를 보고 까무러쳤고, 그 소리에 놀란 동네 사람들이 이를 확인했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도 남의 일인 줄 알고 달려왔다가 그녀가 바로 자기 딸인 것을 확인하고 졸도 하였다고 한다. 엠브란스가 달려오고 경찰이 달려오고 추석명절 다음날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모두들 이 즐거운 명절에 그런 사건에 아연해 했다.


왜 죽었을까?

자살인지 타살인지 그 원인을 검증하기 위해 시체는 오늘 아침 부검실로 송치되었다고 한다. 자살은 분명한데 검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왜 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죽였느냐, 아니냐가 오늘날 죽음에 대한 이 사회가 하는 가치판단이다. 모든 것은 과정이 필요하지 않고 답만 내면 되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죽음에 대한 또 다른 무관심을 일으킨다.

동네 한 아파트의 경비아저씨의 말을 따르면 추석날 밤 그녀는 술에 취하여 계단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사실 그녀는 하루건너 밤마다 술에 취해있었다고 한다. 남편도 있었고 부모도 있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사업도 잘되고 있었고 사소한 말다툼 정도야 있었겠지만 자살로 몰고 갈 그 정도의 가정불화는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혈육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 한 분뿐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오라버니가 4년 전 쯤에 추석을 지난 며칠 후에 똑같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직장에서 <왕따>를 당해서 분함을 이기지 못해 그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 어머니에게는 두 자식만 있었다. 그것을 낙으로 삼고 남의 허드레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두 자식마저 모두가 자살로 가슴의 상처를 남기고 갔다.

우리들 속담에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그런데 한 자식도 아니고 두 명의 자식이 모두가 자살로 죽은 그 어머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한 가슴에 두 자식을 묻어야 하는 그 어머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진실로 가슴이 아프다.


자살한 그녀에게는 약간의 우울증 같은 증세가 있었다고 한다. 잠못이루는 밤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에게 잠 못 드는 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에 이르도록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빠르게 돌아가고, 복잡하게 얽혀서 살아가야만 하는 이 삶이 어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병으로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성격은 나이 탓도 있겠지만 단순하고, 다혈질적인 그런 면은 있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이 자살로 이어진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자살,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안타까움을 일으킨다. 그 내용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에게 기쁜 소식은 분명 아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죽음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무엇 때문에? 왜? 라는 의문이 죽음보다 더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게 한다.


주변을 돌아보면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자살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명퇴 당한 후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사업의 실패 등 그런 경제적인 문제, 가정의 불화, 연인의 변심, 병적인 우울증 이런 저런 이유로 자살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아노미적(anomie)적 자살>이라고 말한다. <아노미현상>은 사회적 해체 즉 개인을 집단에 묶어주는 연대가 약함으로서 정의되는 근대사회의 위기를 칭하는 말이다.

아노미적 자살은 경제적위기를 당하면 증가하는 유형이라고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사실 IMF의 태풍이 불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 것만 보아도 이는 이해가 간다.

현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각가지 사회적 제약과 권위 앞에 홀로 있게 되면, 아니 떨어져 있게 되면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오늘날 회자하는 <명퇴>와 같이 어떤 집단에서 이탈되거나, 개인에게 어떤 소속감을 부여하는 가족이나 집단으로부터 그 유대가 약화되면 욕구와 만족의 불균형이 일어나고 그 때문에 지속적으로 고통을 받는 위험에 처해진다.

거기에서 야기되는 불안과 불만은 쉽게 자살충동을 촉진시킨다. 젊은 층이 아니라 실버의 자살 등이 바로 이런 사실을 대변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아노미적 자살은 약이 오르거나 증오감이 그 특징이라고 한다. 약이 오른다는 것은 현대적 생활에서 받는 여러 경우의 실망과 좌절에서 오는 것이고, 증오감은 욕구와 그 만족감의 불균형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형식을 빌어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자살을 깊이 들어다보면 이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원인으로 일어나는 개인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살은 사회를 관통하는 사회적 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살을 일으키게 하는 충동이 있는데 그 근원은 개인이 아니라 현실적 힘이고, 자살의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집합체라고 한다.

만약 어떤 일정한 개인이 자살을 한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그들이 그 심리적 구조, 약한 신경, 또는 신경질환에 의해서 자살의 성향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을 일으키는 충동을 창출하는 바로 그 사회적 환경이 그러한 심리적 성향을 창출한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나약하고, 또 그 결과로 상처 입기 쉬운 감응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그 진정한 원인은 사회적 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힘은 사회에 따라 다르고 집단에 따라 다르고 종교에 따라 다르다. 사회적 힘은 집단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따로 따로 떨어진 개인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즉 본질적으로 개인에 대하여 이질적이며, 그 기초가 집단이지 개인의 총화가 아닌 현상 또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개인들이 한데 뭉쳐 오직 전체로만이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나 힘을 야기 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적 현상을 지배하는 특정은 사회적 현상이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웅변적인 예는 개인들을 각자가 자기 자신의 뜻을 따라고 있다고 믿는 가운데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회적인 힘의 예이다.

 자살은 남의 일이 아니다. 한 인간의 자살은 보이지 않는 사회적인 권위와 가치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는 자들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사회와 분리되어진 개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용어로는 <주연관계(周延關係)>라는 말이 있다. 이는 두 사물 간에 한 사물이 다른 사물에 의해서 포섭될 때 성립되는 상관관계(相關關係)를 말한다. 포섭된다는 말은 한 사물이 다른 사물에 의해서 언제나 동반(同伴)된다는 것을 뜻한다. A는 B를 반드시 포섭하나 B는 A를 반드시 포섭하지 않을 경우 이를 <부등(不等)주연관계>라 하고, A와 B가 서로 포섭할 때 이를 <등가(等價)주연관계>라 한다. 예컨대 불이 있으면 연기가 있다는 것은 불이 연기를 포섭함으로 주연관계이지만 연기로 보면 연기가 있다고 해서 불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부등주연이 되는 것이다.

사회와 나는 부등(不等)주연관계가 아니라 등가(等價)주연관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는 부처님이 이르신 연기법과 같이 이 사회와 나는 <상의상관(相依相關)>관계가 되어야 한다. 등가주연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나와 사회가 부등(不等)의 주연관계가 될 때 이 사회의 갈등은 멈추지 않을 것이며, 자살이란 사건은 우리들 주변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살과 더불어 불자(佛子)라면 하나 더 기억하자.

부처님은 일찍이 <대공법경>에서 이르시길


[명(命:영혼)과 신(身: 육체)이 다르다고 하면 범행자(梵行者)는 있을 수 없고, 또 명과 신이 같다고 한다면 또한 범행자도 있을 수 없으니 이 극단을 떠나면 바르게 중도(中道)를 향한다.]


라고 했다.

우리의 삶은 이 육체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영혼이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나 극락으로 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근본불교에서 단견(斷見)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전자(前者)를 가린 킨 말이고, 상견(常見)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후자(後者)를 가리킨 말이다. 그럼으로 육체에도 매달리지 말고, 영혼이라는 것에도 매달리지 말고 참된 중도(中道)의 진리를 찾아가는 불자가 되어야 한다. 


불교는 우리의 이 세상, 이 사회를 일러 <세간(世間:Loka)>이라고 한다.

세간(世間)의 세(世)는 정지되어 있지 않고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천류(遷流)의 뜻이 있고, 또 시시각각으로 변천하여 파괴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세(世)는 은복(隱覆)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은(隱)은 숨어 있다는 뜻이고, 복(覆)은 덮여져 있다는 뜻이다. 간(間)은 허위에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세간이란 은복의 법을 말하며 허위에 떨어짐을 뜻한다.


세간의 참 뜻을 깨우쳐 감춰지고, 덮여지고, 허위에 떨어진 가치관을 깨우치는 슬기가 필요하다. 왜 부처님이 인연법을 설하시고, 사성제를 설하시고, 고통과 해탈을 설(說)하셨지를 생각해 보자. 과연 자살로 이 삶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무엇이 부처님이 이르신 <중도>인지 한번 진실로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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