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불영사(佛影寺)와 무영탑의 전설
2026. 5. 26. 12:44ㆍ국내 명산과 사찰
강과 바위, 수목이 어우러진 울진의 명소로 알려진 불영계곡은
예로부터 울진의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불영계곡이란 이름은 천년고찰 불영사(佛影寺)로 인하여
유래된 것인데 지금은 전후가 뒤바뀌어져 버렸다.
그러나 불영사라는 사찰보다는 불영계곡을 찾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천년고찰인 불영사는 비구니 수행도량으로서
그 명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양산 천성산 미타암을 탐방 후 귀경길에 불영사를 들렸다.
연이은 산행과 사찰 순례로 몸이 지쳐 포기할까 하다가
원래 계획에 따라 들린 것이다.

일주문
주차장에 주차하면 바로 일주문이 맞이한다.
편액은 '천축산 불영사'다.
1992년 봄에 회주 일운스님이 신축한 것이라고 한다.
불영사(佛影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현지 안내서>에 따르면
「울진 천축산에 자리한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5년(651)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서쪽 산등성이에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가
절 앞 연못에 비침으로 불영사라 하였고,
1968년부터 비구니 선원 수행도량으로 지정되었다.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 형국의 길지에 자리 잡은 불영사는
조선 숙종(肅宗)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불사의 은덕을 기리는
원당(願堂)과 아울러 왕후에게 현몽하였다는
양성당선사(養性堂禪師)를 비롯하여 전염병으로 급사한
현령 백극제(白克齊)가 부인 이 씨의 지극한 기도 공덕으로
환생하였다는 설화 등 수많은 불사 공덕의 역사를 안고 있다.」라고 했다.
*산태극 수태극이란 풍수지리에서 산줄기와
흐르는 물이 휘 둥그스름하게 굽이져 태극 모양을 이루는 형세를 말한다.

또한 1370년(공민왕 19) 유백유(柳伯濡)가 지은
〈천축산불영사기(天竺山佛影寺記〉에도
651년(진덕여왕 5)에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영사의 창건에 관한 기문(記文)의 저자는
1370년(공민왕 19)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유백유(柳伯濡)로,
유백유는 기록의 근거를 신라 옛 비석으로 밝히고 있다.
유백유의 기록은 불영사와 관련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불영사의 창건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것은 1611년 황동명(黃東溟)의 「천축산 불영사기」의 첫머리에 실려 있다.
불영사에는 1810년(순조 10)에 만든 45.2×31.5㎝ 크기의 필사본
「천축산 불영사기」가 얼마 전까지 전해져 왔다고 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으며, 다만 그 내용만 전한다. (후술)




불영교
불영사로 들어가는 다리다.
울창한 숲길과 108개 연꽃이 새겨진 이 다리 아래 상하로
15km를 굽이 흐르는 불영계곡이 이어져 있다.


불영계곡
불영계곡은 명승 6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영사는 많은 창건 설화가 전한다.
(전설 1) 창건 설화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경주에 머무르던 어느 날, 노인 1명과 동자 8명이 의상을 찾아왔다.
노인은 의상에게 자신들이 동해를 수호하는 호법신장인데
이제 이 땅을 떠나기 전에 스님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왔다고 밝혔다.
의상이 그게 무엇인지 물으니, 자신들이 거처하던 곳에
부처님을 모시려 했으나 인연이 닿는 스님이 없어
원력(願力)을 이루지 못했다며 스님이 대신 뜻을 이뤄달라는 답하였다.
의상은 그 뜻을 수락하고 동해에 있다는 땅을 찾아 떠났는데
포항을 지날 때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 의상을 울진 바다까지 인도했다.
그리고 울진 바다에서 올라온 용은 선묘룡이 되어
의상을 깊은 산속까지 안내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스님이
직접 땅을 찾아야 한다. 일러주고는 사라졌다.
산속 깊은 곳까지 들어선 의상은 며칠간 노인이 말한 땅을 찾아 헤매다
어느 한 연못가에서 잠시 쉬게 됐는데 그 연못에
부처님의 형상이 비치고 있었다. 의상은 노인이 말한 땅이
이곳이란 걸 알게 됐고 화엄경을 독송하며 설법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노인과 여덟 동자가 연못에서 올라와 의상의 설법을 들었다.
의상의 설법을 다 들은 노인은 이곳의 산세가
부처님이 천축산(영취산)에 있을 때의 모습과 같고,
연못의 부처님은 부처님이 설법하던 모습과 같다고 했다.
그러고는 9명 모두 용으로 변해 승천했다.

그 후 의상이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들이 있던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금당을 세운 후
부처님의 그림자가 있던 위치에는
무영탑(無影塔, 현재의 삼층 석탑) 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절의 이름을 부처님의 그림자(佛影)가 비쳤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불영사(佛影寺)라 명명하고 이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전설 2) 여기 용에 대한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동해로 향하고 있는데 계곡에 어린 오색의 서기를 발견하고
가보니 연못 안에 9마리의 용이 있었다. 이에 도술로 가랑잎에
'火' 자를 써서 연못에 던지니 갑자기 물이 끓어올라
용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친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의상대사가 다시 불영사를 방문할 때 한 노인이
'부처님이 돌아오시는구나'라고 하여 <불귀사(佛歸寺)>라고도 불렸다.」 한다.


불영사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했는데,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화재가 일어나 나한전만 빼고 모두 소실됐던 것을
소운(小雲)이 재건했으며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는
영산전을 제외하고 모두 불탔는데, 1602년(조선 선조 35년) 에
대웅전을 중건한 후 1609년(조선 광해군 원년) 에 성원(性元)이 중창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불이 계속 발생하여 건물이 소실되면
다시 중수하길 반복해 오늘에 이른다.
현존 당우로는 응진전(보물 제730호), 대웅보전(보물 제1201호),
극락전, 명부전, 조사전, 칠성각, 응향각 등이 있다.
또 문화재로는 영산회상도(보물 1272호), 불연(보물 제2127호),
3층 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양성당부도, 불영사사적비 등이 있다.

『천축산불영사기(天竺山佛影寺記)』 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옛 비석에 의하면, 당나라 영휘 2년(651)에 의상법사가
동경[현 경주]에서 해변을 따라 단하동[현재 불영사가 있는 곳] 에 들어와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감탄하기를
‘서역 천축산을, 바다를 건너 만들어 놓은 듯하며, 또한 산골짜기의 물 위에는
다섯 부처님의 영상이 비치니 더욱 기이하구나.’라고 하였다.
하류로 내려와 금탑봉에 올라서 보니 그 아래에 독룡이 있는 못이 있는데
의상법사가 용에게 설법하여 사찰 지을 땅 베풀기를 청하였으나
용이 따르지 아니하므로 의상법사가 신통력 있는 주술을 강하게 부리자,
용이 갑자기 분을 발하여 산에 구멍을 내고 돌을 깨뜨리며 사라졌다.
의상법사는 즉시 사찰 건립을 위해 못을 메우고,
동편에 청련전 3칸과 무영탑 하나를 건립하였으며,
땅을 비보하는 뜻으로 ‘천축산 불영사(天竺山 佛影寺)’라 편액하였다.
의상법사가 의봉(儀鳳)[676~678] 초에 서산에 들어가
부석사, 각화사 등의 사찰을 창건하고 15년간 천하를 돌다가
어느 날 불영사로 돌아오는데 선사촌[현 울진군]에 이르자 한 노인이
‘우리 부처님이 돌아온다[佛歸]’라고 기뻐하였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불영사가 백암산 자락에 있으므로
‘백암산 불귀사’라 속칭하게 되었다. 동편 삼각봉 아래 좌망대가 있고,
오룡대 남편에 향로봉·청라봉·종암봉이 있고, 서편에는 부용성,학소대,
북쪽에는 금탑봉·의상대·원효굴, 용혈사 등이 있었는데 모두 승경이었다.
의상법사가 9년을 머물렀으며, 원효법사 역시 유람하다가
두 법사 모두 ‘낙산의 참대비상(叅大悲像)을 인하여
금강산 마하연에 자리 잡았다’고 이른 곳이 바로 천축산 불영사이다.
의상법사는 처음으로 천축의 옛 이름으로 명칭 하였으나,
<백암산 불귀사(佛歸寺)>라 한 것은 후인이 의상법사를 추모하여
부르는 새로운 이름이다. 고로 산과 절이 함께 두 가지 이름이 있으니
지금 사람 대부분이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따르는 것은
성스러운 뜻을 거스름이 심한 것이다. 화엄론에서는 의상법사가
과거 금산 보개여래의 후신이라 하였고, 원효법사는
현재 화엄의 대권보살의 지위에 있다. 이 두 성인이 거처하였으므로,
승려들에게 이름 그대로 귀하고 중하므로 지금의 사람들은
불가불 살펴보아야 하겠다. 홍무 3년(1370) 경술 8월 한림학사 유백유 지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보개부처: 보살수행을 할 때 ‘시방세계에 모든 중생이 목숨을 마쳐 죽을 때에,
나의 이름을 듣는 이는 33천(天)에 태어날 지어다.’하는 원을 세웠다는 부처.
아미타여래가 전생에 보살 수행을 할 때 세운 원과 동일하다.
*대권보살; 대권수리보살(大權修利菩薩)의 줄인말.
가람(伽藍)을 수호하는 신(神)의 하나.











@응진전
불영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 보물 제7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연석으로 허튼층쌓기를 했는데 지형에 따라 안쪽은 높고 뒤쪽은 낮게 조성했다.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에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세웠으며,
가운데 칸에는 4 분합문을 달았고 양쪽 협칸은 벽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다포계인데 건물의 4면에 모두 포작을 짜 올렸으며,
첨차와 쇠서 등에는 조선 초기의 수법이 남아 있지만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건물 내부에는 출입구를 제외한 나머지 벽면에 모두 불단을 설치했다.
1984년 건물을 해체·보수할 때 중수상량문이 나왔으며,
종도리 밑에서는 1716년에 쓴 묵서명이 발견되어
1578년 이후 5차례의 보수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법단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좌측에.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을 우측 보살로 두고 있고
삼 불 뒤로 후불탱화가 조성되어 있다.

@의상전
의상전(義湘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로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이다. 안에는 의상 대사의 상과 진영을 비롯하여
원효대사, 종봉대선사, 청허대선사, 인현왕후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복을 비는 "인현왕후원당"으로 확인된 바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불영사에는 왕실과의 인연으로 원당이 세워지게 되었으니,
의상전은 불영사가 갖는 왕실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인현왕후의 원당(願堂)으로 알려진 불영사 의상전은 인현왕후와 관련이 깊다.

인현왕후와 관련된 다음과 설화가 전한다.
「1689년(조선 숙종 15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인현왕후의 꿈속에 한 노승이 나타났다. 그 노승은 인현왕후에게
자신은 불영사에서 왔으며 힘든 시기가 이제 다 끝났으니
3일 정도 있으면 좋은 소식이 들릴 것이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3일 뒤에 정말 인현왕후는 폐비 신분에서 복위됨과 동시에
궁으로 입궐할 수 있게 됐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인현왕후는
꿈에서 자신에게 예언을 들려준 노승을 찾아 나섰는데,
그가 불영사의 양성(養性)이라는 승려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양성이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인현왕후는 감사를 표하기 위해 불영사 사방 10리 안의 땅을
불영사에 시주하고 금표(禁標)를 세워 불영사를 보호했다고 한다.」
2002년에 의상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옛 상량문을 발견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성후(인현왕후)의 은덕을 받아
불영사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절의 한 켠에
인현왕후의 원당을 1894년(조선 고종 31년)에 세우고 봉축한다.' 하였다.
1894년이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지은 것인데 이때까지도
전승이 유지되었음을 보면, 대부분 내용이 구전설화일지라도
어느 정도는 실화를 기반으로 했을 가능성은 있다.





@불영지(佛影池)와 법영루(法影樓)
법영루(法影樓)는 일반 사찰로 보면 범종각이다.
법영루 앞에 보이는 이 연못이 바로 의상 대사가 산 위에 있는
부처님 모습을 닮은 바위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쳤다고 하여
이 연못을 불영지(佛影池)라 했다고 한다.
연못에 비친 바위를 부처바위라 부르는데
어떤 형상의 바위인가 궁금하여 검색해 보았더니 이런 바위다.


연못에는 수련과 어리연꽃이 많이 핀다고 했는데
철이 일러서 그런지 연꽃은 보지 못했다.


@삼층 석탑(무영탑)
대웅보전 앞에 조성된 이 삼층 석탑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 앞에는 배례석이 조성되어 있고 기단부는 우주와 탱주가 있다.

탱주가 있는 탑은 신라양식의 탑으로 간주하는데
안내서는 고려 초기 작품이라고 한다. 신라의 탑 양식이 고려로 옮겨가는
초기 양식인 것 같다. 탑신부인 옥개석은 경사가 있고
끝은 위로 향하고 있으며 층급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둥근 돌로 보주를 올려놓았다.





창간기에 의하면 독룡이 살던 연못을 메우고
그 위에 청련전과 무영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무영탑에는 1408년(태종 8) 이문명이 지은 「환생전기(還生傳記)」에 의하면
이조 중종(中宗:1488~1544) 때 가난한 선비였던 백극재(白克齋)가
아내의 지극 갖은 헌신적인 고생 덕에 과거에 급제하여
울진 현령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부임한 지 사흘 만에
급병을 얻어 횡사하니 그 부인이 비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비탄에 빠진 것을 본 고을의 이방이
불영사란 절이 영험하니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혹시 회생할지도 모른다고 위로하자 아내는 장례를 미루고
불영사를 찾아와 주지의 양해를 얻어 남편의 관을 불영사로 옮겨와
무영탑전에 옮겨 놓고 사흘 동안을 밤낮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남편의 회생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3일이 지나는 날에
남편의 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관의 끈을 풀자,
남편이 되살아나 관을 열고 나왔다고 한다.
왕생(往生)이 아니라 환생(還生)한 것이다.
이 기쁨을 감추지 못한 현령의 아내는 불은(佛恩)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법화경』 7권을 금자로 사경하여 불은(佛恩)에 보답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궁중에 전달되어 중종이 불영사의 탑료(塔寮)를 환희료(歡喜寮),
불전(佛殿)을 환생전(還生殿)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렸다고 한다,
환희료는 무영탑 앞에 있는 요사채를 말하며, 지금의 삼층 석탑이며,
환생전은 옛적 청련전으로 지금의 대웅보전을 말하는 것이다.

@《대웅보전 (보물 제1201호)》
대웅보전은 불영사의 중심 법당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다듬은 돌을 허튼 층으로 쌓은 가구식 기단과 유사하며,
건물의 앞면에는 어칸에 사분합 문을 좌우 협칸에 이분합문을 달았고
우측면 앞쪽 협칸에는 한 짝 세살문을 두었으며,
배면 어칸에는 이분합문을 설치하였다. 공포의 구성은 내사출목, 외삼출목이다ㆍ






@불영사 대웅보전의 건립 시기는 대웅보전 내부에 걸린
탱화의 묵서명에 '옹정3년 을사(雍正三年 乙巳)'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725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단 위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는데
봉안된 세 불상은 2002년에 조성한 것이다.
높이 1m 정도의 이 불상들은 경내에 있던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태풍으로 부러진 것을 활용했다고 한다.
그 나무 둥치를 4년간 물에 담그고 말리기를 반복한 후에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법당 내부는 이와 함께 기둥과 도리 사이에 조각한 용두 4점,
반야용선, 비천상, 단정학, 극락조, 백호 등 수준 높은 그림과 조각,
건축 부재 등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법당의 불상 뒤 벽에는 1725년에 조성된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보물 제1272호) 가 걸려 있다.
여섯 명의 스님이 그렸다고 하며, 비교적 양호한 보존 상태인 이 탱화는
18세기 초 조선 불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영산회상도(보물 제1272호)
불영사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 부처가 인도의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중앙에 석가여래를 모시고 하단 좌우에 문수ㆍ보현보살과
제석천ㆍ범천을 표현하고 그 위로 좌우 4위씩 8대 보살을 표현하고 있다.
보살상 상단에 10대 제자와 권속을 표현하고 최상단에 분신불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석가모니불의 법의가 붉은 가사(홍가사) 를 취했고
광배도 붉은태를 이중 광배를 나타내고 있는 것 등은
영ㆍ정조 때 많이 제작된 조선 후기 불화의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불화는 중심인물은 크게 표현하고 그 비중에 따라
하단에서 상단으로 좌우 대칭적인 구도를 취한 것이 특징이다.
제작 시기는 1735년(영조11)으로 18세기 이후에 유행하는
영산회상도 가운데 이른 시기의 것으로 채색의 사용법이 유려하고
묘사법이 정밀하여 그림의 품격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대웅보전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02년(선조 35) 중건하였으나
1720년(숙종 46)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721년(영조1)에 중건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특히 기단 밑 좌우에
돌거북(석구)을 놓아 건물을 받들게 한 것은 특이한 구상으로
이는 불영사의 자리가 화기를 많이 품고 있는 곳으로 불기운을 눌러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돌 거북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 진신사리
불영사 주지 심전 일운스님이 직접 스리랑카에서 모셔 온 진신사리라 한다.
1623년 캔디 왕조시대 황금으로 만든 사리함에 봉안돼 있던
진신사리 21과 가운데 1과 라고 한다.
2천3백여 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스리랑카 까뚜가하갈게 라자마하 비하라야 사찰에서 모셔 왔다고 한다.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라 하야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건물만 멀리서 담았다.









@불연(佛輦) 보물 제2127호
「울진 불영사(佛影寺) 불연(佛輦)」은 2채의 불연(佛輦)이 있는데,
매년 석가탄신일 때 아기부처를 모시고 경내를 도는
시련의식(侍輦儀式)을 행하고 있으며, 이때 이 불연(佛輦)을 사용하고 있다.
불연(佛輦)은 가마의 일종으로 왕실에서 사용하는 ‘연’이나
‘덩’과 비슷한 것으로, 불연(佛輦)은 불가(佛家)의 불보살상(佛菩薩像),
사리(舍利), 경전, 불패(佛牌, 불보살의 존호나 발원내용을 적은 나무패),
영가(靈駕, 불가에서 망자를 뜻하는 말) 등 예배의 대상을 가마에 싣고
의식이 거행되는 장소로 모셔 오는 시련의식(侍輦儀式)에서 쓰이는
매우 중요한 의식 법구다.

시련(侍輦)은 가마를 문밖까지 메고 나가
신앙의 대상인 불·보살이나 재(齋)를 받을 대상인 영가 등을 가마에 모시고
여러 가지 위의(威儀)를 갖추어 법회장소(도량)까지 행렬을 지어
오는 불교 의식으로 이때 불연(佛輦)이 사용된다.
‘울진 불영사(佛影寺) 불연(佛輦)’은 조선 후기 불연(佛輦) 중
제작 당시의 온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고 제작 배경을 상세히 담은
명문이 남아 있는 점, 공예 기술 면에서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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