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천성산 미타암

2026. 5. 23. 21:32국내 명산과 사찰

우리나라 불교문화사에서 석굴암이라는 불리는 3곳이 있다.

제1 석굴암이라 불리는 곳은 경주 토함산에 있는

불국사 석굴암(국보 제24호)이고,

제2석굴암이라 불리는 곳은 군위 팔공산 석불사에 있는

군위 아미타여래 삼존석굴(국보 제109호) 이고,

제3 석굴암이라 부리는 곳은

양산 천성산 미타암의 석굴(보물 제998호)이다.

군위 석굴암은 조성 시기가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보다

1세기 정도 앞서 있으며, 미타암의 석굴암은

불국사의 석굴암과 같은 시기인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조성되었다.

불국사의 석굴암은 협시불 없이 석가모니를 본존으로

좌상(坐像)으로 조성되어 있다.

군위 석굴암은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좌상(坐像)으로 조성되어 있고,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입상(立像)으로 조성되어 있는 데 반하여,

미타암 석굴암은 협시보살 없이

아미타불 여래만 입상(立像)으로 조성되어 있다.

군위 팔공산 아미타여래 삼존불(국보 제109호)

그런데 이 3곳의 석굴암을 조성한 공통된 목적이 있다.

불국사 석굴암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석굴암의 옛 이름) 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모님의 왕생극락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고,

군위와 양산 미타암에 봉안된 본존불이 아미타불인 것은

곧 왕생극락을 위함 것임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군위 석굴암은 원효대사가 조성한 것으로 안내서가 밝히고 있지만

입증 자료는 없다. 그러나 천성산 미타암의 아미타불 조성은

원효대사가 수도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역사적으로도 문헌상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천성산 양산 미타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道寺)의 말사이다.

미타암이 있는 천성산은 원효대사가 화엄경 설법을 통해

당나라에서 건너온 1천 명의 스님이 득도하여 성인이 되었다는

전설에 따라 천성산(千聖山)을 원효산으로고도 불리기도 하지만,

옛적에는 원적산(圓寂山 혹은元積山)으로 불렸다고 하는 산이다.

천성산은 해발 922.2m다.

 

사찰 안내서에 의하면 천성산 미타암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신라 초기 원효(元曉:617~686)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에 대한 입증 자료는 밝혀진 바가 없다.

1376년(우왕 2) 중창하였고 그 뒤 1888년(고종 25) 정진(正眞)이 중창하였고,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禪) 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 1861∼1937)이 주석하였고, 현재 그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법당과 종무소를 겸한

전각, 삼성각, 옥불전, 요사채와 공양간 등이 있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미타암 가는 길은 차도는 아예 없었고,

등산로도 정비되지 않아 사찰 탐방은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지금은 경내까지 오르는 아스팔트 길이 조성되어 있고

등산로도 정비되어 있었다. 초행이라 등산 겸 차도는 피하고

등산로 택해 오르는 가파르기는 했지만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미타암 경내를 들어서니

초파일 가까워서 그런지 많은 등이 달려 있었다.

등이 많이 달려 있다는 것은

신도 수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웅전과 옥불전은 석굴을 탐방 후

내려오면서 참배하기로 하고 바로 석굴로 향했다.

 

석굴 가는 돌계단을 조금 오르니 범종각이 조성되어 있는데

명동(鳴洞)은 보이는데 범종은 조성 중인지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면서 돌아 본 대웅전 

옥불전

굴법당 앞에 조성된 비석들

석굴은 참배와 참선을 위한 석굴 앞에

작은 법당이 새로 조성되어 있었다.

보물 제998로 지정된 양산 천성산 아미타여래 입상은

퇴적암으로 된 미타굴 안에 봉안된 화강암으로 만든 불상이다.

8세기 전반 경의 신라시대 석불로,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미타암의 입구에서 9m 정도 들어간 석굴 속에 안치되어 있다.

이 석굴은 원래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자연 동굴이었지만,

신라시대에 원효가 대규모 공사를 통해

인공적인 사찰의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다.

불상의 높이는 2.05m이며, 주형(舟形)의 광배(光背)와 두광(頭光),

원형의 연화좌대, 불신(佛身) 등이 모두 단일석으로 되어 있다.

불상의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있고, 백호와 삼도가 뚜렷하며,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가사는 통견의(通肩衣)를 입었으며,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다.

양산 미타암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은 수인의 형태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모습에서 719년에 조성된 경주 감산사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국보 제82호)과 유사한 형식을 띠고 있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화염문 등 장식문의 형식화와 광배 테두리의 이중 좌대,

U자형 옷 주름에서 보이는 가운데가 끊어진 주름,

대좌의 보상화무늬 등은 신라의 천년 수도 경주시에서 제작된

불상의 양식과는 다른, 양산시만의 독특한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

경주 감산사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국보 제82)과 비교해 보면

가사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

아미타불의 가사는 발끝까지 내러 오는 통견인데 비하여

감산사의 아미타불의 가사는 우전왕상식(udyana, 優塡王像式)이다.

우전왕상식은 불상(佛像)의 옷 주름 표현 양식으로

대의(大衣) 옷 주름이 허벅지에서 Y자형으로 갈라져

양다리 표면에서 반원형의 주름을 대칭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또한 미타암의 아미타불은 가슴 중앙 부위 승각기와 가사 위에

스카프의 매듭 모양이 조성된 것이

다른 불상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수인을 보면 우수(右手)는

상품상생(上品上生)의 시무외인을 한 것은 동일하지만

좌수(左手)는 감산사 아미타불은 미타암의 아미타불과 달리

엄지와 약지를 제외한 3지(肢)가 완전히 펴지지 않은 여원인을 하고 있다.

좌대를 보면 감산사의 아미타불은 앙련(仰蓮), 복련(覆蓮),

팔각문늬 안상(眼象) 등 정교한 데 비하여 미타암 아미타불의 좌대는

앙련과 복련으로 상하 좌대로 그 안에 구름 모양 등 도형을 조각해 놓았다.

굴법당을 나오면서 바라 본 양산시

옥불전(玉佛殿)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두고

옥을 다듬어 관음상, 나한상들을 조성해 놓았다.

미타암은 나한전이나 관음전을 두지 않고 이를 대신하는 한 것으로 생각된다.

작약이 피는 계절인가?

대웅전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왼쪽에 문수보살을

그 옆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우측에 보현보살을 그 옆에 대세지보살을 봉안했다.

아미타불은 석굴에 봉안되어 있어 아미타불은 봉안하지 않은 모양이다.

 

삼성각 가는 길에 조성된 포대화상

 저 앞이 경내 주차장이다. 대략 10~15 대 정도 주차할 공간이 된다.

이제 하산길이다. 온 길을 따라 원점회귀한다. 돌계단 옆 바위가 눈길이 간다.

<후기> 정토교와 왕생극락의 전설

@해탈 열반을 말하는 현교(顯敎)와 달리

아미타불 여래의 칭불염불(稱佛念佛)로

왕생극락을 희구하는 종교를 정토교라 부른다.

이는 아미타불 48원 중 제18원의 <往本願>에 의거한 것으로

정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원(願)이다.

경에 「만약 제가 부처가 되어서도, 오역 죄인이나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서방의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원해 저희 나라에 태어나려고 심념을 해도

태어날 수 없다면 저는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정토교의 소의경전을 정토삼부경이라 한다.

석존 일대의 설법 중에서 무량수경 2권, 관무량수경1권,

아미타경 1권의 3부 4권을 정토 소의 경전이라 정한 사람은

정토종의 개조인 법연(法然)이다.

그의 『선택본원염불집』에 처음으로 정토왕생을

<三經一論>로 요약하고 있다. 삼경이란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을 말하고, 일론은 천친(天親)의 <왕생론>이다.

칭불로서 극락왕생의 정토 신앙을 믿는 것에 대하여

법연을 이렇게  말한다. "근기에 상응하지 않은 교는

그것이 아무리 심광고원(深廣高遠)한 교리라도

중생 구제에는 하등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다만 현실 인간 범부가 어떻게 해서 구제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 문제다."

다시 말해서 삼부경은 철학이나 문학이나, 역사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첫 번째로 구해야 할 것은 구원이다.

나의 문제, 번뇌의 문제는 영구히 변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문제로 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전생은 법장비구라 칭한다.

아주 먼 옛날에 정광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시고

53 불이 이어서 출현하시었다가 열반에 드셨다.

그 후 세자재왕여래가 출현하시던 때에 한 나라의 국왕이 출가하여

법장이라 하였다. 이 비구는 부처님 앞에서 무상보리심을 일으켜

이백십억의 불국토를 보시고 5겁 동안 사유해서

장엄불국청정의 행을 섭수하여 48원을 세우셨다.

@법장보살은 이미 10 겁 전 옛날에 정각을 이루시고

서방에서 안락정토를 만드셨는데 그 부처님이 무량수불이시다.

광명과 수명이 무량한 佛德을 갖추시고,

염불 등에 의해서 人天의 보살 등이 왕생함을 설하는 것이다.

@아미타여래는 이곳으로부터 서쪽을 십만억 불토를 지나 세계가 있고

이름하여 극락이라고 하는데 그 땅에 부처님이 계신다.

이 부처가 아미타 여래다. 지금도 설법하고 계신다.

아미타불은 과거불도 아니고 미래불도 아니고 현재불이다.

<십주비바사론>에서는 연등불을 과거불로 처음에 놓고

아미타불을 현재불의 수위로 하고

미륵불을 미래불의 첫 번째로 하는 것처럼

삼세 시방 제불 가운데서 아미타불은 현재불의 대표자로 되어 있다.

@불교는 事觀 보다는 理觀을 우수한 것으로 여기지만

삼부경 중 <관무량수경>은 이관이 아니고 事觀을 중시한다.

 

@법연의 <선택본원염불집>에 의하면

염불은 수행하기 쉽고, 다른 모든 행은 수행하기 어렵고,

염불은 모든 근기에 통하고 다른 행은 특수한 근기의 사람밖에

수행할 수밖에 없는 행이기 때문에 일체에 통하지 않는다.

만약 부처님께서 다른 행을 가지고 본원이라고 하셨다면

우둔하고 지혜가 적은 사람은 왕생할 수 없다.

아미타불은 평등의 대자비를 일으켜서 널리 모든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칭명염불을 가지고 본원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원효(AD617~686)는 신라 상주 사람으로 화엄종의 학장이지만

정토교를 믿고 <무량수경종요>1권을 저술하였다.

원효는 무량수경을 가지고 보살장교의 격언이라 하고,

또 부처님의 정토를 變化土라고 했다.

十念은 칭념의 뜻이 아니고

부처님의 상호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삼국유사 5권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AD661~680) 때

사문 광덕은 마음을 서방에 두고 칭명 염불하고

16觀을 수행해서 왕생했다고 하고,

그의 친구 엄장은 원효에게 왕생의 중요한 방법을 배워

관을 닦아서(修觀) 왕생했다고 한다. 또한 경덕왕(AD742~763) 때에

다섯 비구가 있어 서방을 구하는 염불을 수십 년 가까이 하자

갑자기 聖衆이 맞이하여 오니 함께 대 광명을 발하여

서쪽으로 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나와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미타암은 신라시대 당시에는

포천산(布川山) 석굴이라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 권5 ‘포천산 오비구’(「포천산오비구경덕왕대조」)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경덕왕(재위 742~764) 때이다. 삽량주(지금의 양산)에서 동북쪽으로

20리쯤 떨어진 곳에 포천산(布川山)이 있고, 거기에는

완연하게 사람이 쪼아 만든 듯한 기이한 석굴이 있다.

여기에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비구 다섯 사람이 와서 살면서

아미타불을 부르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기도한 지

수십 년 만에 갑자기 성중(聖衆)이 서방 극락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하여 갔다. 이에 다섯 비구는 제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을 날아가다가 통도사 문밖에 이르러 머무르게 되었는데,

하늘의 음악이 간간이 들려왔다. 절의 중들이 나와서 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버리고

큰 광명을 쏘면서 서쪽으로 가버렸다.

그들이 유해를 버리고 간 곳에다 절의 중이 정사를 짓고

이름을 ‘치루’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삼국유사 포천산 오비구 경덕왕대(布川山 五比丘 景德王代)~

아미타여래의 칭명염불로 서방정토에 왕생한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그 예로 고성 건봉사의 등공대 전설에도 나와 있다.

건봉사의 현지 안내서를 보면

『만임염불의 가피처 등공대는 758년 발징화상이

정신, 양순 등 수행승 31인과 신도 1,820명의 참여로

아미타 만일염불회를 결성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만일 동안 신행을 닦았다.

해마다 신도 1,700인은 쌀 한 말과 향유 한 되의 시주를 하였고,

신도 102인은 오종포 한 단의 의복 시주로 만일을 공양하였는데

29년이 지난 787년 7월17일 아미타 부처님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나타나시어 크게 칭찬하시고는

수행승 31인을 극락세계로 이끌자, 신도 1,820인이 크게 기뻐하고

경사스러워 1,300여 번의 절을 하였다.

이에 아미타 부처님은 신도 913인 또한 극락세계로 이끌었으며

나머지 신도 907인은 그 자리에 남아 수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후 두 번 더 아미타 부처님께서 나타나시어

18인과 30인을 극락으로 이끄셨고

발징화상은 “나머지 859인은 부처님 수기를 입고

다시 태어나 세상을 제도하라”고 하였다.』

아미타불만 외친다고 왕생하는 것은 아니다.

경(經)에 이르기를

『만약 중생이 있어 저 국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3가지 마음을 일으키면 곧 왕생한다.

하나는 至誠心, 둘은 深心, 셋은 廻向發願心이다.

이 3가지 마음을 갖추는 자는 반드시 저 국토에 태어난다.』고 했다.

이 삼심을 요약하면 지성심은 진실한 마음이고,

왕생을 위해 거짓이 없는 마음이며,

深心은 자기의 근기와 부처님의 원력을 믿는 마음이고,

회향발원심은 닦은 수행을 회향해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