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피달과 일천제를 어찌할꼬?

2025. 7. 1. 04:49야단법석

경전을 보면 완피달(頑皮靼)과 일천제(一闡提)라는 말이 나온다.

완피달(頑皮靼)의 靼은 마름질한 가죽을 말하며 “단”으로도 읽힌다.

이는 가죽이 두꺼워 송곳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딱딱한 가죽을 의미하는 말로서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귀에 들어가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사람의 마음은 열면 온 우주를 담을 수 있지만

닫아 버리면 송곳 하나 꽂을 수 없다.”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이 한쪽으로 꽉 막힌 사람을 일러 “완피달”이라고 한다.

일천제(一闡提)는 일체 선근(善根)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천(一闡)은 신(信)을 의미하고,

제(提)는 불구(不具)를 의미한다.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다.

경에 의하면 일천제(一闡提)는 인과(因果)를 불신(不信)하여

부끄러움이 없고, 미래세라는 것은 없다고 여기고,

업보를 믿지 않으며 선지식을 가까이하지도 않고,

일체의 가르침이나 계율도 믿지도 않고,

행하려고도 하지 않아 부처님도 이를 다스리지 못한다고 한다.

완피달과 일천제의 차이점을 보자면

일천제는 사회적 윤리라, 종교적, 도학적인 견해나

계율에 따른 선행(善行) 등

일체를 믿을 마음도 없고 행할 마음도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완피달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이 진실이고,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은 모두 부정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심리적으로 풀이한다면

완피달은 확증편향(確證偏向)에 빠진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일천제는 세상의 진리와는 아예 담을 쌓은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노자가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란 말에

박장대소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이 바로 일천제라 할 수 있다.

확증편향이란 세상을 자신의 선입관에 맞춰 생각하고,

자기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 보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가치관,

자신의 신념 판단과 소견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남의 말이나 가르침 등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멀리 갈 것도 없고,

바로 지금 우리 사회가 굴러가는 모습을 보면 자명해진다.

A라는 특정 정당의 정책을 지지하는 유권자라면

그 정책을 지지하는 연구 결과, 신문 기사나 칼럼 등을 읽으면

당연히 그러하다고 느끼지만,

그 반대편의 유권자는 그 정책을 비판하는 연구 결과나

기사 등을 읽을 때는 불쾌감을 느끼거나 편향된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사실(眞僞) 여부나, 절차의 정당성, 거짓되고 날조한 것은 아닌가,

효율성과 형평성 등에 문제가 없는가 하는 것들은 아예 도외시하고

오로지 <내 편>이냐 <네 편>이냐만을 문제 삼는 자들이다.

보통 사람들도 이렇게 확정평향에 빠지면 자기가 속한 종교 집단이나,

사회단체 등에 대한 권위에 대한 믿음이 확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견이나, 가치관에 대한 믿음까지도 왜곡되어

철두철미하게 완고해진다.

특히 종교관이나 윤리관에 대한 확정편향성은 더욱 심각해진다.

비유로 근대 한국 불교의 선승의 한 분으로 알려진

한 스님의 일화를 보자.

춘성(春城:1891~1977) 스님의 이야기다.

스님의 본명은 이창림(李昌林), 독립운동가이며 문인이며

선승(禪僧)으로도 명성이 높은 분이다.

출가 후 받은 법명이 춘성(春城)이고, 법호가 춘성(春性)이다.

이춘성으로도 부른다. 본관은 평창(平昌)리며

별칭은 무애도인(無碍道人)으로 불리는 스님이다.

스님에게는 묘한 별칭이 하나가 따른다.

설법할 때 육두문자에 능하여 욕쟁이 스님으로도 불리는 스님이다,

평생을 옷 한 벌, 바리때(鉢盂) 하나만으로 살다 간

무소유의 실천가였던 춘성 스님은 종교의 참뜻을 깨우친 선승으로

1891년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서 태어나

1901년 13세 때 백담사에 출가하여,

10여 년간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을 모시고

수학한 유일한 수좌였으며 1919년 설악산 신흥사의 주지가 되었고,

1929년 만공스님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1950년 6.25 전쟁 때에는 북한산의 망월사를 떠나지 않았던 스님인데

그 스님에 대한 이런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스님이 거주하는 사찰에 불심 깊은 한 노(老) 보살이 있었다.

그 노보살은 부족할 것이 살고 있었는데

다만 아름다운 외동딸이 혼기가 다 찾는데도

시집갈 생각을 하지 않아 그것이 고민이었다.

얼굴도 이쁘고 똑똑하고 재력까지 갖추고 있어

많은 매파도 다녀가고 청혼도 많이 들어 왔지만,

딸은 모두 거절하고 아예 시집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속된 말로 여자가 콧대가 높아

마음에 차는 신랑감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이다.

한해 한해 해가 갈수록 노보살의 근심도 깊어져만 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스님을 찾아가 자기 딸을 법회에 내보낼 테니

스님이 좋은 법문으로 인도 좀 해달라고 청탁을 드렸다.

그리고 법회가 있는 날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오라고 딸을 절로 보냈다.

노보살과 달리 딸은 절에 잘 다니는 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스님이 법회를 하는 날 유난히 눈에 띄는 여인이 있어

자세히 보니 노보살이 말한 딸이었다.

그런데 설법을 듣고 있는 태도를 보니

법문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이 이를 간파하고 그 딸을 지목하여 이르기를 느닷없이

“네 좁아터진 그곳으로 내 큰 것이 들어가겠느냐?”라고 질문을 던졌다.

 

이 소리를 들은 딸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법당을 뛰쳐나와 집으로 줄행랑했다.

붉으락푸르락하며 돌아온 딸을 보고

노보살은 “오늘 스님의 법문이 어떠하더냐?” 하고 묻자

딸이 말하기를 “완전 땡초 중에도 상 땡초입니다.

아니 처녀인 내게 하는 말이‘ 네 좁아터진 그곳에

내 큰 것이 들어가겠느냐?’라고 합디다.

아니 이런 땡초를 어찌 여태까지 큰스님으로 모셨습니까?”

그러자 노보살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네 좁아터진 소갈머리에 스님의 그 큰 법문이 들어가겠느냐?”

 

세속적인 윤리관의 선입관에 빠져 아집에 똘똘 뭉친 딸이

스님의 법문을 성희롱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한 질책인 셈이다.

지혜로운 자는 보는 것만 믿고

어리석은 사람은 듣는 것만 믿는다고 했던가.

하긴 욕쟁이 스님으로 알려진 스님이니….

그렇다면 이 처녀의 행동은 완피달인가 일천제인가?

스님은 불법(佛法)의 경지를 말해지만

처녀는 스님의 법문을 성(性) 윤리관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스님의 법문을 거부했으니 완피달이라고 할 수 있고,

범부의 소견으로 보면 돈 많고 선하고 좋은 신랑 만나

아들딸 놓고 살면 그만인데

음담패설(淫談悖說) 같은 말로 설법을 하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보면 일천제인 것이다.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얻어 경전을 화엄경이라고 한다.

화엄경은 심오하고 불가사하여 범부가 생각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래서 삼매에 들어가 설법하지 않다가

7일 후에서 범부들에게 설법을 시작했다고 했다.

아함의 경전을 보면 화엄경과는

달리 너무나 평이하고 어려운 말이 없다.

이는 곧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방편을 쓴 것이다.

 

스님이 만약 방편을 사용했다면 어떠했을까?

스님은 선승(禪僧)이라 방편을 사용하지 않은 모양이다.

<법화경> 「비유품」에 나오는 이야기와같이

불이 붙고 있는 집 안에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장난감으로 관심을 끌어 밖으로 끌어내듯

근기에 계합되는 방법을 취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스님은 선승이라 바로 화두(話頭) 같은 설법을 한 것이다.

범부가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경계해야 할 5가지 소견(所見)이 있다.

첫째는 몸이란 소견[身見]이다.

나의 몸이란 오온이 화합한 가아(假我)임을 알지 못하고

이를 나로 알거나,

일체 사물은 일정한 고정된 실체가 없는 허상인데

이것을 실물로 보고 또 나의 소유물이라는

소견(我所見)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무상한 이 몸을 나로라고 여기기 때문에

희로애락 등 팔고(八苦)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한쪽에 집착하는 소견[邊見]이다.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맞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맞다고 하듯

세상의 말이란 상대적이다. 사람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내 편이냐 네 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실이다.

세상은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는 등 단상(斷常), 유무(有無) 등

한쪽에 치우치는 견해도 갖지 말아야 한다.

치우치면 편견이 생기고 진실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사특한 소견[邪見]이다.

세상에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게,

이(利)와 불리(不利)에 따른 궤변이 사견(邪見)이다.

사견에 빠지는 것은 탐욕과 어리석음에 기인한다.

더 나아가 진리를 왜곡하고 인과의 도리를 무시하게 된다.

이러한 삿된 견해는 선악(善惡)까지도 왜곡한다.

많은 삿된 견해 중 악(惡)도 족히 두려워할 것이 못 되고,

선(善)도 또한 좋아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을

삿된 것 중에서 제일 삿된 것이라고 한다.

 

넷째는 계에 집착하는 소견[戒禁取見]이다.

전통을 중시하고, 정형화되고, 의식화(儀式化)된 계율이라면

이는 멀리 해야 할 계율이다.

전통을 중시하고, 정형화 되고, 의식화된 것은

종파적, 사회적 집단의 체제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발전해 왔다.

계율이란 수행을 위한 방편이지 수행 자체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종교가 내세우는 지옥과 천국이 존재하는 것은

사람들이 탐욕과 두려움 속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형식화된 종교적 계율을 따르면 인품은 고결해질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정직한 사람, 전통을 지키는 사람이라 부른다.

순응주의자들이다, 과거지향적이며

오로지 의식(儀式)만을 중요시 한다.

방종(放縱)은 자연의 노예를 만들고

계율은 사회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말이 있다.

진아(眞我)를 알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지혜가 필요하다.

형식화 되고, 정형화 된 의식(儀式)이 아니라 지혜다

율법이나 계율은 깨달음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율법이나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은 선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다.

다섯째는 소견에 집착하는 소견[見取見]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분별이라고 한다.

이 분별이 소견(所見)을 일으킨다.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고 했다. 일체 제 모든 법은

마음먹기에 따른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식(識)이란 무엇인가? 분별이다.

분별이 소견(所見)이 되면 번뇌가 따른다.

그러므로 유식에서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하는 것이다.

소견에 집착한다는 것은 식(識)에 집착한다는 말이다.

이를 벗어나는 것이 곧 깨달음인 것이다.

그래서 식을 변화시켜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오견(五見)에 빠지면 완피달이 되고,

오견을 아예 무시하면 일천제가 된다.

완피달은 식(識)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고,

일천제는 무식(無識)한 사람이다.

 

세상을 보는데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눈으로 보는 것이며, 둘째는 들어서 아는 것[聞見]이다.

들어서 알고 행동하는 것은 완피달이고,

듣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고 행동하지도 않는다면 일천제라 한다.

눈으로 보고 아는 것은 진리의 실체를 본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진리의 실체를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지혜로는 아뇩다라삼막삼보리(정각)라고 한다.

불성은 본래는 없다가 지금은 있는 것도 아니며,

있었다가 도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선한 인연을 따르면 보살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완피달이 되고 일천제가 된다.

마치 검은 쇠[黑鐵]가 불에 들어가면 붉어지고,

나와서 식으면 도로 검어지는 것과 같다.

이 검은빛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인연으로 있는 것이다.

 

불성이란 그러한 것이다.

일체 소견이라는 식을 벗어나면 번뇌의 불이 꺼진다.

번뇌의 불이 꺼져야만 볼 수 있는 것이 불성이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하고, 깨달음이라고 한다.

마치 씨앗이 소멸하여 싹이 생겨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싹의 본성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는 것이며

꽃의 열매 또한 이와 같으며 인연으로 있는 것이다.。

 

일천제나 완피달이 따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이런 불성이 있다. 단지 이를 모를 뿐이다.

인연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색법(色法)이 비록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것이 다르고,

길고 짧은 모양이 있지만 맹인(盲人)은 보지 못한다.

맹인이 보지 못한다고 하여서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고

길고 짧은 모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맹인은 비록 보지 못하나

눈이 있는 이는 보는 까닭이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은 보지 못하나

깨달은 이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길을 수행자의 길이라고 하고,

보살의 길이라고 경은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피달과 일천제를 배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이끌 수 있는 방편을 찾아야 한다.

 

완피달에게는 중도(中道)의 도리를 깨우치게 하고

일천제에게는 인과(因果)의 도리를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이 둘의 근본적인 방편은 불성을 깨치는 지혜를 증득하는 길이다.

 

~사진: 용인 와우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