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의 속성을 경계하자.

2025. 1. 12. 11:04야단법석

 

심리학에서 인간의 속성을 정의한 말 가운데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시체 애호증(愛好症)’이란 뜻인데

쉽게 말해서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은 것을 더 좋아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문제는 이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은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마음의 심층 의식 속에 숨어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활동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토담집이나 통나무집의 향수를 그리면서도

차갑고 매끄러운 대리석 건물을 더 좋아한다.

통나무는 생명을 지닌 식물이지만

대리석은 생명이 없는 차가운 돌덩어리다.

그런데도 우리가 통나무집보다

대리석을 장식한 콘크리트 건물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도

우리의 무의식 속에 이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있는 동물을 사랑하는 대신

죽은 밍크의 가죽을 좋아하고,

연인을 옆에 두고도 무감각한 현대인들이

포르노 영화 필름에서 비치는 영상을 보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과 같이

산 사람보다는 그림자에, 다시 말해서 생명이 없는 것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는 속성이

바로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라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죽은 시체는 온기가 없다. 차갑고 싸늘하고 꼿꼿하고, 감정이 없다.

이러한 것을 좋아하는 네크로필리아적인 속성은

삶에서 온기를 거부한다. 시체를 해부하는

차갑고 날카로운 메스처럼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어둠과 침울함이

삶의 약동성과 조화를 덮어버린다.

그래서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은

우울증과 같은 내면성에 빠지면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감성보다는 차가운

딱딱한 지식을 선호하게 된다.

삶의 온기가 사라진 차가운 마음은

편협된 세계관에 빠져 자기만의 지식을

어머니로 삼고 아집을 낳는다.

그래서 네크로필리아적인 속성을 좋아하는 자들은

대개 어름처럼 차갑고, 음울하고

시체처럼 굳은 아집을 가지고 배타성을 지니게 된다.

선가(禪家)에서

「달을 보지 왜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느냐?」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달은 만유의 실재(實在)를 의미한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불성(佛性), 법성(法性), 진여(眞如),

진심(眞心), 정각(正覺), 구경각(究竟覺),

대원경지(大圓鏡智) 등등 여러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실재(實在)다.

손가락은 경전이나 일체의 말과 글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의 산물이다.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다.

죽어 있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살아 있는 것을 보라는 의미다.

모든 지식은 과거의 산물이다.

과거는 현재가 아니라 지난 것이다.

지식이란 실체가 없는 명자상(名字相)의 기억에 불과하다.

그것을 벗어나라는 의미다. 시체를 붙들고

아무리 해부해 본들 거기에 생명력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벗어나는 그것이 바로 실재에 접근하는 길이며,

그것의 구경(究竟)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첨단과학의 덕분으로 기계문명 속에 살고 있다.

분명 기계문명은 자본주의 꽃이다.

정밀하고, 민첩하고, 일의 효율을 극대화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편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편리함이 목적이 아니다.

삶의 의미는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삶의 방편일 뿐이다. 삶이란 살아있고,

약동하는, 자유로움이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은 구속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육체적이든 정신이든 간에.

앵무새가 사람 말을 한다고 해서 사람이 아니듯,

AI 로봇이 아무리 첨단화되어도 사람이 될 수 없듯,

분명한 것은 기계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온기가 없다는 것이다.

기계는 실수를 허용하지 않듯

삶에서 유연성과 포용성, 그리고 여유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기계란 것은 우리에게 편리함과 일의 효율성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단지 삶의 방편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방편에 매달려 사는 것을 최대 행복으로 여기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본말(本末)이 전도된 삶을 살고 있다.

일례로 하루 종일 핸드폰을 쥐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보라.

이는 살아 있는 자가

죽은 기계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첨단과학이 창출한 각가지 기계 문화가 창출하는

편리함에 빠져서 약동하는 생명의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죽은 것에 매달려 살아가는 이것 또한

이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에 새로운 인기 있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돈>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다.

배금주의(拜金主義) 사상이

새로운 종교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돈은 필요하지만, 돈이 나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배금주의란 무엇인가?

직설적으로 정의한다면 사자(死者)가

생자(生者)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그의 경제학에서

<죽은 것이 산 것을 다스린다.>라고 했다.

 

죽은 송장을 끌어안고 슬퍼하는 자는 있지만

죽은 송장을 끌어안고 기쁨을 노래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재물이라는 죽은 것을 부둥켜안고 거기에서 풍기는

살인, 절도, 강간, 폭행, 사기행각 등

악취를 감수하면서 매달려 살고 있다.

산 자가 죽은 것에 매달려

이 삶을 악취의 늪 속에 빠져들어 가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잠시만 홀로 깨어 있는 마음으로 생각해 보라.

죽은 시체를 부둥켜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송장의 역겨운 짙은 냄새를

쾌락이라는 향수로 뿌린다고 해서

어찌 그것이 산 자의 향기가 되고, 기쁨이 되겠는가?

그래서 옛사람들은 재물은 추한 것이라고 했고,

도를 배우는 자는 가난부터 배우라고 한 것이다.

 

바이블의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인 아니더라도 아마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는 지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죄악의 도시라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바이블에 의하면 말로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인간사회 - 황금송아지 앞에서

혼성섹스와 관능적 유흥과 절도, 살인 등이 판을 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하느님은 그 도시를

이 지상에서 멸하기 위해 두 명의 천사를 보냈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충실한 제자 <롯>이 살고 있었다.

롯은 천사가 온 목적을 알고

그 도시를 구하고자 애걸을 해보았다.

만약 그 도시에 하느님을 믿는 40명의 사람만이 있으면

그 도시를 멸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천사는 이르길

“40명이 아니라 단지 10명의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그 도시를 멸하지 않겠다. 고 했다.

그러나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에서 그 10명을 채우지 못했고

그 도시는 하느님의 저주로

지구상에서 멸망했다고 바이블은 말하고 있다.

과연 이 시대에도 그런 천사가 온다면

우리가 진실로 죽은 것들을 버리고, 돈을 버리고,

물질적 탐욕과 관능적 쾌락을 버리고

참다운 인간의 온기 있는 삶을 추구하고,

바른 믿음을 갖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그런 자 10명 중에 끼어들어 갈 수 있을까?

 

죽은 시체는 굳어 있다. 딱딱한 돌처럼 굳어 있다.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이 발동되면

사람들의 의식은 시체처럼 굳어진다.

굳어진 의식은 남을 배척하게 되고,

교만과 아집과 편견을 낳게 된다.

바위처럼 올연하고, 고고하게 보이고 싶고

무언가 남에게 우월성을 돋보이고 싶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을 과시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비욕의 과시다.

남들과 차별되는 소비를 통하여 과시욕을 자랑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위력은

다름 아닌 소비력의 과시에 달려 있다고

사회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부자가 남들에게 자랑하는 것은

오로지 두 가지뿐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쇼핑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여행이다.

 

이것은 분명 오늘날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느끼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소비는 분명 소유의 한 형태이다.

이것은 분명 오늘날의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빚어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소비는 분명 여러 가지 특질을 지니고 있다.

그 특질의 하나는 불안을 제거해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또 더 강한

소비 욕구를 창출해 낼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소비가

곧 그 욕구 충족적 성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핸드폰처럼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더 강한 구매욕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자신을 확인한다.

『나는 존재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과 내가 소비하는 것』

 

그러나 그들의 소비는 과시욕을 향한 자동차,

비디오, 오디오, 새로운 전자제품, 고급 주택,

유명 화장품이나 보석, 골프여행 등등이

소비의 주 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두가 생명이 없는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이 만들어 낸

과시욕 장난감이요, 냉기를 머금은 냉장고 같은

기호품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사람은 어디로 사라지고

물건이 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사람들을 부리고 있다.

거기에 인간의 순수한 부드러운 마음이 어떻게 자리할 수 있을까?

거기에 삶에 대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온기와

유연성과 조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생명의 온기를 잃어버리고, 소비와 과시욕으로 굳어진

이 마음에 무엇이 남겠는가?

탐욕과 허욕과 병들은 쾌락밖에 더 있겠는가?

생명의 온기가 사라져 버리고, 정신이 시체처럼 굳어버렸을 때

그것의 종착역은 바로 황금송아지와

쾌락에 젖은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가 되지 않겠는가?

고대 서양에서도 쾌락주의를 신봉하는

<에피쿠르스>학파가 있었듯이 부처님이 살아 계실 그 당시에도

신의 존재나, 업의 법칙, 생전이나 사후의 존재 등

인간의 영혼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로지

인생의 목표는 육체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쾌락을 최고한도로 즐기는 데 있다고 여겨

욕망의 충족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철학 사조(思潮)가 있었다.

 

소위 <차르바카(cãrvãka)>의 철학도들이다.

그들은 쾌락 이외는 다른 어떤 도덕적 법칙도 인정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고통을 완전히 극복하려고 추구하는

해탈의 이상(理想)은 불가능한 것이라 여겼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한 쾌락과

고통은 따르기 마련이며,

그렇다고 그것이 두려워서 쾌락과고통의

피안(彼岸)의 세계를 찾는 것은

마치 껍데기 때문에 알맹이를 버리는 것과같이

어리석다고 여겼다.

 

<차르바카>는 “차르브(carv)"에서 나온 말로

<먹고, 마시고, 즐기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오로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영혼이란

의식이 있는 몸에 지나지 않으며,

향락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며,

죽음만이 해방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천박하고 상식적인 견해를 따른다고 하여

순세파(順世派)라고도 불렀다.

우리가 이 시대에 부러워하는 소위 <출세한 사람>이란

바로 이 순세파의 교도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생명의 온기가 사라진 차가운 시체처럼,

돌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첨단 기계문명의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21세기의 산업사회의 주역이 추구하는 물질문명은

바로 이 <차르바카>의 철학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삶이란 <산자의 몫>이다. <죽어 있는 자의 몫>이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이 생명이다.

그러므로 삶은 언제나 약동하고, 변화하면서 창조하는

신선한 정신을 지녀야 한다.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죽은 것이 산 자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육체의 향락과 쾌락이 아닌 영혼의 기쁨과 평화를 가져오는

그런 힘은 죽은 것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세속의 부귀영화만을 추구하는 차르바카의 신도가

평온한 여생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언제나 한 순간 한순간 살아 있는 <자아>를 의식하고

<자아>가 병들지 않도록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비록 들판에 피어난 이름 없는 한 송이 꽃으로 태어났더라도

요란하지만 죽어 있는 조화보다는

살아있는 꽃으로 살다가 가는 것이

더 보람된, 더 의미 있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온기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

자연과 더불어 생명의 온기를 지닌

나와 너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죽음은 고요하다. 정적만 감돈다.

죽음은 동요가 없다. 변화가 없다.

고인 물이 썩듯 죽음은 허무와 공허의 고름만 내뿜는다.

거기에는 기쁨도 평화도 없다. 희망도 도전도 없다. 그

것의 성취 뒤에는 허무만 낳고 더 많은 갈증만 남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다.

삶이란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하게 되어있다.

살아 있는 꽃이 바람과 눈과 각종 도전에 시달리듯

우리의 삶은 실패와 좌절과 같은 갖가지 도전 속에 존재한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 절망적인 위기가 도래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요한 그런 안전이 아니라, 솟구치는 샘처럼

굽이치는 삶의 역동성이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안전성이

바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불안전한 토양 속에서 더 성장해 간다.

불안정하면 그럴수록 점점 더 살아 굽이치는

그대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마음이 네크로필리아적이 되어 죽음을 동경해서는 안 된다.

우울하고 침울한,

그리고 차가운 감정에 젖어서 살아서는 안 된다.

마음의 온기, 그리고 삶의 부드러움과 유연성,

그리고 삶의 온기를 지닌 그대 자신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 속의 네크로필리아적 속성이

발동하지 않도록 언제나 깨어 있는 삶이 필요하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란 무언가?

펄펄 살아있는 그대의 현존(現存)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살고,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극락정토가 왜 필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