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심명(息心銘) 소고(小考)
2025. 6. 17. 23:32ㆍ조사어록과 잠언
식심명(息心銘) 소고(小考)
-<주위빈사문(周渭濱沙門) 망명법사(亡名法師)>-
<제명 풀이>
식심(息心)이란 마음을 쉰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심(妄心)을 없앤다는 의미다.
달마대사의 법어 중에
“외식제연 내심무천(外息諸緣 內心無喘)”이란 말이 있다.
밖으로 꺼들리는 모든 마음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임을 없게 하라는 말인데
이 말이나<금강경>에서 말하는 “항복기심(降伏其心)”이란 말도
표현은 다르지만, 식심(息心)의 의미는 대동소이하다.
명(銘)은 금석이나 비문 등에 자계(自戒)의 뜻이나
남의 공적이나 사물의 내력을 찬양하는 글을 새긴 것을 말한다.
이 식심명(息心銘)은 중국 남북조시대 주나라(557~580)
위빈(渭濱)에 살았던 사문(沙門)이 지은 글인데
법명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위(渭)는 위수강을 말하며 중국 감숙성 위원현에서
황하로 흘러가는 강 이름이며, 빈(濱)은 물가를 의미한다.
사문(沙門)은 '노력하는 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śramaṇa(슈라마나)의 음역이며.
인도에서는 슈라마나(사문)는 제사 중심의
기성 브라만교를 거부하고 주로 고행, 금욕, 수행을 통해
자기의 해탈을 추구하는 자유 수행자,
즉 고대 인도 전통에서 당시 불교,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등의 수행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중국에 이를 도인(道人)과 비구(比丘)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망명(亡名)은 무명(無名)을 말한다.
비구는 속가의 이름 대신 법명(法名)을 사용하는데
이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원문은 단락이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해설의 편의상 임의로 단락을 지었다.
제1구
법계에는 여의주가 있으니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 몸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예부터 사람을 거두고 있으니
이를 가슴에 새겨 두라고 했으니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本文>
法界有如意寶(법계유여의보) 人焉久緘其身(인언구함기신)
銘其膺曰(명기응왈) 古之攝人也(고지섭인야)
戒之哉戒之哉(계지재계지재)
*緘: 봉할 함, 膺: 가슴 응. 攝:굳건하게 유지할 섭
<풀이>
본문에서 “여의보(如意寶)”라 함은
여의주, 또는 마니주를 의미한다.
선가에서는 여의주나 마니주는 곧 여래장(如來藏)을 의미한다.
여래장이란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부처가 될 가능성을 말하며.
중생의 마음속에 저절로 갈무리되어 있는
부처님의 청정한 씨앗을 의미한다.
중생이 모두 갖추고 있으나 번뇌에 가려져 있는
부처님의 성품을 말한다. <기신론>의 말을 빌리면
진여(眞如)가 번뇌 가운데에 있는 것을 여래장이라 하고
진여가 번뇌에서 나온 것이 법신(法身)이라 했다.
법계(法界)는 법신(法身)이며, 곧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에 의하면
“일체의 有情이 모두 본래부터 깨달음이 있고
眞心이 있어서 시작이 없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淸淨하여 소소(昭昭)히 비치고 요요(了了)히 밝게 알아
체(體)에 맞으면 圓覺이라 하고,
因에 맞으면 여래장이라 하고,
果에 맞으면 원각(圓覺)이라 한다.”라고 했다.
원각(圓覺)이란 佛의 원만(圓滿)한 깨달음을 말한다.
체(體)에 맞다는 것은 본성이 그러하다는 의미이고,
인(因)에 맞다 하는 것은 인연 화합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
곧 분별 망상으로 인한 번뇌에 갇힌다는 의미다.
과(果)에 맞다는 것은 번뇌를 벗어나면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양개 동산(良价洞山) 화상이 이르기를
“천지(天地) 안, 우주 사이에 하나의 보배가 형체 속에 숨겨져 있다.
사물을 인식하는 데 영특하나 안팎이 공적하고 적막하여
찾기 어려우니, 그 지위가 현묘하고도 현묘하다.
다만 자기에게서 구할지언정 남에게서 빌리지 말아야 하니,
빌릴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어 모두가 남의 마음이니
제 성품만 못하며, 성품은 여여해서 청정하니,
이것이 곧 법신(法身)이다.”라고 했다.
이 청정한 법신이 번뇌에 갇히게 되면 여래장이라 말하는 것이다.
“경계하고 경계하라”는 말은 이를 분명히 알고 경계하라는 의미다.
일체중생이 한없이 먼 과거로부터
갖가지 전도망상(顚倒妄想)으로 4대(大)를 잘못 알아
제 몸이라 하고, 6진(塵)의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갖은 분별망상을 일으키는 것은
본래 청정함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경계하라는 의미다.
비유하면 눈병이 나면 허공의 꽃[空中花]과 헛것으로
비추는 달[第二月]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실로 허공에는 꽃이 없지만
눈병 난 이가 망령되이 집착하는 것이다.
망령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이 허공의 제 성품을 잘못 알았을 뿐만 아니라,
또 실제로 그 꽃이 나오는 자리까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망령되이 생사를 바퀴 돌 듯 반복함으로
부처님은 이를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명이란 여래장을 가리는 번뇌인 것이다.
제2구
생각을 많이 하지 말고 많이 알려고도 하지 마라.
아는 것이 많으면 일 또한 많아져
마음을 쉬는 것만 못하고,
생각이 많으면 잃음 또한 많아서
하나를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原文>
無多慮無多知(무다려무다지) 多知多事(다지다사)
不如息意(불여식의) 多慮多失(다려다실) 不如守一(불여수일)
<풀이>
생각이 많고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은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다.
분별심이란 곧 망심(妄心)이요, 번뇌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3조 승찬 스님이 이르기를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상응치 못한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라고 했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한쪽을 취하면 다른 한쪽은 버리게 된다.
유무(有無)를 가르고, 위순(違順)을 따지고, 속(俗)과 비속(非俗) 등
이렇게 마음이 양단(兩端)에 서면 마음의 분별심이 끊어지지 않으니
마음이 여여(如如)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한가지로 마음을 바로 지니만 못하다고 한 것이다.
제3구
생각이 많으면 뜻이 흩어지고
아는 것이 많으면 마음이 산란하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번뇌가 나고
뜻이 흩어지면 도가 막힌다.
<원문>
慮多志散(려다지산) 知多心亂(지다심란)
心亂生惱(심란생뇌) 志散妨道(지산방도)
<풀이>
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얽매이게 되고,
아는 것이 많아도 마음이 얽매이게 된다.
얽매임이란 집착을 말한다.
집착이 심하면 정신이 흐리멍덩해지고
온몸이 나른해지고 기력을 잃게 되어
이에 따라 몸과 마음을 상하게 된다.
몸과 마음이 이렇게 혼침(昏沈)에 빠지면
어찌 그 뜻이 도에 이르겠는가.
마음이 건강해야 몸이 건강해지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바르게 뜻을 세우고 나아갈 수 있다.
제4구
무엇이 언짢을꼬 하지 말라.
그 고통이 더욱 길다.
무엇이 두려울꼬 말하지 말라.
그 화가 솥 속의 끓는 물 같다.
<原文>
勿謂何傷(물위하상) 其苦悠長(기고유장)
何言何畏(하언하외) 其禍鼎沸(기화정비)
<풀이>
도의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지어 어긋남과 따름을 다투기만 한다면
번뇌는 깊어 지고 그 고통은 더 길어진다.
진심이 무슨 대수냐 하고
좁은 견해로 이것 저것 여우 같은 의심만 짓는 것은
마치 솥 속의 물이 끓는 것처럼 번뇌가 요동칠 뿐이다.
<법구경>에 이르듯
“피로한 나그네 갈 길이 멀어 보이고
잠 못 드는 밤은 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5구
방울 물 일지라도 끝없이 이어지면
마침내 四海(사해)에 가득 채워지리니.
작은 티끌 털어내지 아니하면
장차 五嶽(오악)을 이루게 되느니라.
끝맺음을 잘하려면 근본을 다스려야 하나니.
비록 처음은 적을 지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原文>
滴水不停(적수부정) 四海將盈(사해장영)
纖塵不拂(섬진불불) 五嶽將成(오악장성)
防末在本(방말재본) 雖小不輕(수소불경)
<풀이>
태산을 오르는 것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그것은 곧 정진(精進)을 말한다.
부처님도 보리수 아래에 머무르실 때
정진으로 보리를 깨달으셨다.
정진은 몸이나 마음으로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하여도
그 의지로 인내하여 감당함으로써 교만하지도 않고
하열하지도 않아 마음에 물듦과 혼탁함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사도(邪道)에 떨어지게 된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져 밭을 일구지만
썩은 씨앗은 천개를 뿌려도 밭을 일구 수 없다.
썩은 씨앗이란 번뇌 망상의 티끌이다.
그러므로 도에 이르는 길은 티끌만큼도 의심이 없어야 한다.
만약 한 올의 터끌이라도 의심이 있다면
그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멀어지는 것이다.
티끌 같은 의심이 사라져야 근본으로 돌아가게 되고
근본으로 들어가야 뜻을 얻게 되니
망령된 한 생각 버림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은 법이다.
제6구
너의 일곱 구멍을 막고 육정(六情)을 닫아서
색을 엿보지도 말고 소리도 듣지 말라.
소리를 듣는 것은 귀머거리같이 하고
색을 보는 것은 장님과 같이 할지니라.
<원문>
關爾七窺(관이칠규)閉爾之情(페이지정)
莫視於色(막시어색) 莫聽於聲(막청어성)
聞聲者聾(문성자롱) 見生者盲(견생자맹)
<풀이>
일곱 구멍(七竅)이란 사람의 얼굴에 있는 7개의 구멍을 말한다.
안(眼: 눈), 이(耳: 귀), 비(鼻:코)는 각각 구멍이 2개이고,
구(口:입)는 하나이니 모두 7개의 구멍이 된다.
육정(六情)은 육근(六根)을 말한다.
근(根)에 정식(情識)이 있기 때문이다.
의근(意根)이 심법이 되기 때문에
5가지 정식(情識)이 생김으로
소생(所生)의 과(果)에 따라 정(情)이라 한 것이다.
곧 육식(六識)을 의미하는 것이다.
<금광명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육정(六情)에 속하는 것은
새가 그물에 걸린 그것같이 항상 제근(諸根)에 처하여
제진(諸塵)을 수축(隨逐: 뒤따라 쫓아감)한다” 고 했다.
우리의 마음은 이 육정(六情)에 의해 나타난
그림자를 보고 것이기 때문에 분별 망상이요,
미망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식(情識)이란 범부의 미망심(迷妄心)의 견해(見解)를 말한다.
<지도론40>에
“안(眼) 등의 오정(五情)을 내신(內身)이 된다고 하고,
색(色)등 오진(五塵)을 외신(外身)이 된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색이나, 소리나, 글자나
이러한 오진(五塵)에 벗어나야 한다고 한 것이다.
승찬 스님은 이를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라고 한 것이다.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은
곧 육진(六塵)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7구
한 가지 학문과 한가지 기예가
허공 가운데의 작은 모기요.
한 가지 기술과 한가지 재능이
햇빛 아래의 외로운 등불과 같도다.
<原文>
一文一藝(일문일예) 空中小蚋(공중소예)
一伎一能(일기일능)日下孤燈(일하고등)
<풀이>
한 마음이 도에 계합하면
일체가 평등하여 승(勝)함도 없고 열(劣) 함도 없는데
무슨 학문과 기예, 기술 재능을 자랑할 것이 되겠는가?
밝은 태양 아래 등잔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모두가 허공 속에 꽃 모양 부질없는 망상일 뿐이다.
제8구
영특하고 현명하고 재주 있고 뛰어남이
오히려 어리석음을 기르나니.
순박함을 버리고 음탕함과 화려함에 빠져들면
識馬(식마)가 쉽게 날뛰어
마음 원숭이를 제어하기 어렵도다.
<原文>
英賢才藝(영현재예) 是爲愚蔽(시위우폐)
捨棄淳樸(사기순박) 耽溺淫麗(탐익음려)
識馬易奔(식마이분) 心猿難制(심원난제)
<풀이>
<수능엄경 권4>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이 아난을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네 비록 억만겁토록 여래의 비밀묘엄한 금옥 같은 말씀을
읽고 외워도 하루 동안 무루업(無漏業)인
선정(禪定)을 닦아 익히는 것만 못하다.”
박학다식(博學多識)이란 이는 망심이 빚어낸 지식에 불과하고
식당의 메뉴판과 같은 것이다.
메뉴판을 아무리 읽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설사 대장경을 읽고 익히며 강설하여도
佛性을 실제 깨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널리 배워 알음알이가 늘수록
정신이 어두워진다는 말이 있듯이
선가(禪家)에서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청정무구한 마음의 거울에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말씀도 오히려 먼지가 된다고 말한다.
하물며 세속의 영특한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음이 도를 깨닫는 데는 제일 큰 장애가 되므로
옛 고승들도 일찍이 이를 극히 배척하는 것이다.
“식마심원(識馬心猿)”이란 말이 있다.
번뇌와 망상이 심하게 일어나 마음속이 안정되지 않은 것이
마치 야생마(野馬)와 들판의 원숭이(野猿)가
움직이고 구르면서 미쳐 날뛰는 것과 같음을 비유한 말인데
지식은 사견(邪見)을 낳고, 궤변을 짓게 되고,
끝내 아견(我見)을 키우고 아집(我執)을 굳건하게 만들뿐이다.
제9구
정신이 피로하면
몸이 반드시 상하여 쓰러지게 되고.
미혹하여 삿된 길로 빠져들면
수도의 길이 영원히 막히게 되느니라.
<原文>
神旣勞役(신기노역) 形必損斃(형필손폐)
邪行終迷(사행종미) 修途永泥(수도영니)
< 풀이>
사대(四大)가 주인 없고 오온(五蘊)이 공하다고 해서
이 몸을 염리(厭離)하고 학대만 하면 이 몸은 피폐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도를 어느 몸으로 수행할 것인가.
그래서 <보리자량론>에 이르기를
“모든 보살은 초발심으로부터
구경(究竟)의 깨달음의 도량에 도달하기까지
일체의 보리분[菩提分]에 상응하는
몸[身]ㆍ입[口]ㆍ마음[意]의 선한 업을 건립하니,
이것을 정진 바라밀이라 한다.”라고 했다.
마음이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긴다.
그래서 삿된 견해, 삿된 행은 종국에는
혼미(昏迷)를 불러올 뿐이다.
마음이 혼미하면 수도의 길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제10구
재주 있음을 귀히 여기지 말지니,
날마다 어리석음을 더한다.
서툰 것을 자랑하고 교묘한 것을 부러워하여
그 덕이 크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原文>
莫貴才能(막귀재능) 日益惛暮(일익혼모)
誇拙羨巧(과졸선교) 其德不弘(기덕불홍)
<풀이>
수행하는 데는 두 가지 위험이 있다.
하나는 아집(我執)에 빠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게으름 또는 무기력이다.
아집에 빠지는 것을 에고이즘이라 한다.
에고이즘은 위험하다,
그러나 게으름이나 무기력은 위험한 존재는 아니다.
그가 놓치는 것은 그 자신의 진심을 알지 못하고
번뇌장에 갇히는 일뿐이다.
위험은 에고이스트로부터 일어난다.
에고이스트는 영적이기를 원하는 자, 특별하기를 원하는 자,
부처가 되고자 하는 자,
영적 힘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자신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는 자는
남보다 특별함을 자랑하기 위해서다.
남들보다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면 교만해지고 우쭐해한다.
교만하고 우쭐해하면 아집에 빠지게 되고
도와는 거리가 더 멀어지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자포자기하게 되고,
무기력해지고 게을러지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혼미해지고 그 원인을 밖으로 돌리게 되니
그 또한 수행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제11구
명성만 높고 행이 엷으면
높은 명성이 빨리 무너지고.
안으로 교만과 자랑하는 마음을 품으면
밖으로부터 원망과 증오를 받게 되느니라.
<原文>
名厚行薄(명후행박) 其高速崩(기고속붕)
內懷憍伐(내회교벌) 外致怨憎(외치원증)
<풀이>
<칠불통게>의 이야기를 해보자
백거이가 군수로 부임하면서
그 지방이 유명하다고 알려진 도림선사를 찾아가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하고 묻자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뭇 선행은 받들어 행하라.”라고 하자
백거이가 “세 살짜리 아기도 그런 것은 알겠습니다.” 하니
선사가 “세 살짜리 아기도 말은 할 수 있으나, 80살 노인도 행하지 못한다.”
라고 했다. 도(道)의 수행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세속의 명성이야.
명성(名聲)은 말에 좌우된다.
<발각정심경(發覺淨心經)>에 이런 말이 있다.
「미륵이여, 말 많이 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니,
들은 것이 많으므로 아만(我慢)하며 방일(放逸)할 것이요,
말에 대해 사유(思惟)하고는 마땅히 물들어 집착할 것이요,
마땅히 본래의 생각을 잃어버려 자기의 바른 생각이 없을 것이요,
하는 바의 일은 마땅히 바르지 못할 것이요,
위의(威儀)는 몸과 마음을 능히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요,
행할 바의 곳에서는 몸이 두루 바르지 못할 것이요,
법인(法忍)을 잃어버렸기에 몸과 마음이 굳세고 강하여
돌이키고 굴복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했다.
제12구
혹 입으로 말하고 혹 손으로 글을 써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구한다면 또한 심히 더러운 것이다.
범부는 (이를) 길하다 말하지만, 성인은 허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原文>
或談於口(혹담어구) 或書於手(혹서어수)
邀人令譽(요인영예) 亦孔之醜(역공지추)
凡謂之吉(범위지길) 聖謂之咎(성위지구)
<풀이>
명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익을 따르기 때문에 욕심이 생겨 자기의 수행을 훼손하고,
명성을 뜻대로 성취하지 못하면
마음에 성냄과 원망과 허물을 짓게 된다.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동도 마다 하지 않게 되니
아만(我慢)이 생기고 질투심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명성은 때로는 요사스럽고 허황된 행동을 불러오니
이로 인한 애착(愛着)이 더 해지는 것이다. 또한
명성을 추구함에는 아첨과 왜곡이 따라 생기니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없이
아만심(我慢心)을 일으켜서 잘난 체하고
남보다 높은 체하여 남이 자기 존경해 주기를 바라며
남은 자기보다 열등하고 낮은 사람으로 여겨
남을 무시하는 마음도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범부들은 이를 즐기고 좋아하고 길하다고 여기지만
성인들은 이런 허물을 알기 때문에 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제13구
좋아하고 즐겨하는 것은 잠깐, 슬프고 근심스러운 것은 길다.
그림자와 발자취를 두려워 달아날수록 더욱 더하나니
단정히 나무 그늘에 앉으면 자취도 그림자도 없어진다.
<原文>
賞玩暫時(상완잠시) 悲哀長久(비애장구)
畏影畏跡(외영외적) 逾遠逾極(유원유극)
端坐樹陰(단좌수음) 跡滅影沈(적멸영침)
<풀이>
받은 은혜를 쉽게 잊혀지지만 모멸당하고 멸시받고
고통받은 일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자식을 잃은 아픔처럼 이는 머리에 남은 기억보다
가슴에 남은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이다.
박힌 못을 뽑아낼 수는 있지만
못이 박힌 흔적이 남듯 잊혀졌다고 해서
그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업(業) 이론을 보면 지은 업의 경중에 따라
현세에 받을 수도 있고 다음 생에,
그리고 그다음 생에 받는다고 하는 것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
가슴에 새긴다는 것은 기억이다.
마음의 분별심이기에 이를 불교는 식(識)이라 한다.
거짓을 덮으려면 더 많은 거짓이 필요하지만,
그 실체를 자각하면 다시 식(識)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면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죄무자성(罪無自性) 종심기(從心起)
심약멸시(心若滅時) 죄역망(罪亦亡)”이란 말이 있다.
죄는 그 실체가 없다, 마음 따라 있기에
마음이 사라지면 죄 역시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희로애락(喜怒愛樂)을 일으키는 그 실체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경은
“모든 법은 허깨비[幻], 아지랑이, 물에 비친 달, 꿈,
그림자, 메아리 등과 같고, 옴도 없고 감도 없고,
생김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공(空)이고 무상(無相)이며
무원(無願)이니, 드러나되 취할 만한 것도 없고
장애(障礙)도 없다는 것을 믿고 이해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단정히 나무 그늘에 앉는다”라는 말은
자성(自性)을 깨치라는 의미다.
고요히 마음을 관조하는 그것을 선정(禪定)이라 한다.
@몸은 물속에 비친 달 같으며
도(道)를 말함이 메아리 같은 줄 알고
마음 또한 허공의 번개 같은 줄 알며
저 계(戒)가 3유(有) 중에 수승(殊勝)한 줄 알라.
제14구
생을 싫어하고 늙는 것을 근심하여 생각과 지음을 따르나니
마음에 생각이 만일 없어지면 생사가 길이 끊어진다.
죽지도 않고 나지도 않고 모양도 이름도 없다.
한 도는 비고 고요하여 만물은 평등하다.
<원문>
厭生患老(염생환노) 隨思隨造(수사수조)
心想若滅(심상약멸) 生死長絶(생사장절)
不死不生(불사불생) 無相無名(무상무명)
一道虛寂(일도허적) 萬物齊平(만물제평)
<풀이>
붉은 장미가 들녘에 피었다.
보는 “나”가 있기에 장미가 있다고 안다.
보는 “나”가 없으면 장미는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4가지 고(苦)은 어디서 오는가?
“나”가 있기 때문이다. “나”가 있기 때문에 생로병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나”는 실체가 없다.
사대(四大)가 화합하여 오온(五蘊)이 형성된 것일 뿐 실체는 없다.
인연으로 생(生)하였으니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마치 골짜기 메아리가 인연으로 생하고 인연으로 사라지듯.
그러므로 <신심명>에 이르기를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이 없고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다”라고 했고,
<법성게>는 “제법부동(諸法不動) 본래적(本來的)
무명무상(無名無相) 절일체(切一切)”라고 했다.
마음이 사라지면 다시 말해 분별심이 다 사라지면
만법이 한결같아지는 것이다.
제15구
무엇이 귀하고 천하고,
무엇이 욕되고 영화로우랴.
무엇이 빼어나고 무엇이 열등하며.
무엇이 무겁고 무엇이 가벼우며.
맑은 하늘은 깨끗한 것을 부러워하고,
밝은 해는 빛을 부끄러워한다.
<원문>15
何貴何賤(하귀하천) 何辱何榮(하욕하영)
何勝何劣(하승하열) 何重何輕(하중하경)
澄天愧淨(징청괴정) 皎日慚明(교일참명)
<풀이>
모든 법이 비고 고요함(空寂)을 깨달으면
만물이 한결같이 평등함을 알게 된다.
한결같다는 말은 차별이 없다는 말이다.
이는 곧 보리의 증득함을 말하는 것이다.
경(經)은 부처의 보리 증득을 이렇게 말한다.
「“동자여, 나는 공(空)의 경계에서 보리를 얻었나니,
모든 소견[見]이 평등한 까닭이니라.
무상(無相)의 경계에서 보리를 얻었나니,
모든 형상이 평등한 까닭이니라.
무원(無願)의 경계에서 보리를 얻었나니,
삼계가 평등한 까닭이니라.
짓는 것 없는[無作] 경계에서 보리를 얻었나니,
모든 행이 평등한 까닭이니라.
동자여, 나는 생김 없고[無生] 일어남 없고[無起]
함이 없는[無爲] 경계에서 보리를 얻었나니,
일체 함이 있는[有爲] 것이 평등한 까닭이니라.”」
<文殊師利所說不思議佛境界經(문수사리소설부사의불경계경)>
<화엄경>에서는 이를
“天地는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같은 몸이다.”라고 했다.
도를 깨달아 얻게 되면 일체가 不二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우 같은 의심의 所見을 멀리하라고
하늘을 들고 해를 들어 비유한 것이다.
제16구
대령보다 편안히 하고 금성보다 견고하여라.
삼가 현철들에게 전하노니
이 도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다.
<원문>
安夫岱嶺(안부대령) 同彼金城(동피금성)
敬貽賢哲(경이현철) 斯道利貞(사도이정)
<풀이>
*대령(岱嶺)岱의 岱는 오악의 하나인 대산을 의미한다.
중국의 五岳은 동악 태산, 서악 화산, 남악 형산, 북악 항산, 중악 숭산
금성(金城)은 쇠와 같이 아주 굳고 단단한 城을 의미한다.
경이(敬貽)는 공경하게, 삼가 전한다는 의미다.
*이정(利貞)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을 줄여서 말한 것이다.
“원형이정”은 <주역>에서 나온 말로 乾(天)道 의 4德을 의미한다.
이는 沙門이 불교의 대도를 <주역>의 말로 비유한 것이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이란
元은 만물의 시작으로 봄과 仁을 상징하고,
亨은 만물의 상징으로 여름과 禮를 상징하고
利는 만물이 돌아감을 상징하며 가을과 義를 상징하고,
貞은 만물을 이룸으로 겨울과 智를 상징한다.
<맺는 글>
망명(亡名)법사의 이 식심명(息心銘)은
대승의 교리를 바로 들어냈다기 보다는
비유나 예시한 내용들이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사상을 담은
격의불교(格義佛敎)에 가깝다.
특히 맺는말로 인용된 <주역>의
“원형이정”이란 말이 이를 입증한다.
원문에 <풀이>를 단 것은 망명법사의 귀감의 글에
사족(蛇足)으로 옛 선사들과 경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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