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미리 쓰는 유서(遺書)

2018. 1. 13. 15:58조사어록과 잠언


(북한산 의상봉에서)


법정스님의 미리 쓰는 유서(遺書)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인지상정이다. 어떤 동물들은 죽음을 미리 인지하고

슬픈 얼굴을 짓거나 울음을 운다고 하지만 사람이 동물들과 특히 다른 점은

죽음 앞에서는 솔직한 참회를 한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무엇에 대한 두려움도 애착도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도둑들이나 악당들도 기도문을 욀 때나 성당이나 교회에서 참회를 할 때도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마음속에 숨은 바램이나

진실에 대한 덧칠이 가해지는 경우가 적지 많다. 그러나 막상 죽음에 다다르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본래 천성의 성품 그대로 돌아가 진실해 지는 것이다.

대개 유언이라고 하면 재산문제들이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속인들의 문제이고

비속(卑俗)의 삶을 사는 스님들이야 더 무엇을 말하랴.

멀리 옛 고승들의 임종게를 보면 삶의 공허와 생사의 초탈(超脫)을 위주로

유언이나 글을 남기는 것도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사료된다.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무소유(無所有)삶을 살다가 열반에 드신

고 법정스님의 글이 있어 산자의 귀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올려본다.



법정스님의 미리 쓰는 유서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 (유서) 라도 첨부되어야하겠지만

제 명대로 살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증오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라도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 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

이 세상에 올 때에도 혼자서 왔고 갈 때에도 나 혼자서 갈 수 밖에 없으니까.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일상의 지평을 걸어 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의지해서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리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도 말한 바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지 이것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져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하여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회의 눈이 멀어버리고 작을 때에만 기억에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와 말을 더듬는 장애자였다. 대여섯 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었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강한 엿장수였다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에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 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 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 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음으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본래 무일푼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관념이니까.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 밭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간단명료한 것을 즐기는 성미이니까.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거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부터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 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은 곳이라면 아무 데서나 다비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꼭 한군데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의자의 위치만 옮겨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어린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중 같은 것도 별로 없을 것이므로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 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사문이 되어 금생에 못다 한 일들을 하고 싶다.

~ 법정스님의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