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소고(無常小考) 5-5 답 없는 질문

2025. 1. 6. 13:19잠언과 수상록

무상(無常)을 느끼는 근본 원인은

<><>라는 것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임을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에 집착한다는 것은 이 몸과 마음에 집착함이니

행하는 주체를 보면 아상(我相)이 되고

생하고 멸함으로 보면 중생상(衆生相)이 된다.

다시 말해 아상은 주재하는 주체를 생각하는 것이요,

중생상은 여러 음()이 모여서 되는 것이다.

()이 모인다는 것은 <><我所> 모두가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를 떠나서는 없다는 것이다.

오직 여러 법이 연합하여 생기는 것이요,

멸하는 것은 오직 여러 법이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는 것이니 이 가운데 <>가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의 교리로 말하면 법상(法相)을 가지고

아집(我執), 아상(我相)을 깨트리는 것이다.

 

생하고 멸함도 인연으로 생하고

인연이 다하면 멸한다는 법상(法相)에 집착함도

또한 전도(轉倒)이니 무상의 참 의미를 알았다면

당연히 아()와 아소(我所)를 벗어나야 한다.

경전에 따르면 마음의 법상을 아()라 하고,

십법계를 아소(我所)라 한다.<약소>

그러나 그 법 또한 실상이 없는 것이다.

이를 파하는 것은 공()으로써 법집(法執)을 파는 것이 된다.

 

이 두 법을 차별로 보는 것은 망상이요,

평등으로 보면 공()한 지혜이다.

소승이나 성문들이 말하는

아상을 벗어나 열반에 든다는 말은

이 둘을 평등한 것으로 보지만 아상도, 열반도

모두 실상이 없는 공임으로 명자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경에 공()한 그것마저 깨쳐야 하는 데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 하며,

그 경지는 상()도 이름도 없는 일체의 희론을 벗어난 것이다.

 

조론의 저자 승조는 이를

온갖 것이 있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생긴다.

마음이 있다는 데서 일어나면 옳다 그러다 하는

()이 있게 되어 니 하는 주장이 달라져서

시끄럽게 서로 다툰다. 만일 그러한 생각을 비워서

마음을 참 경계(眞境界)에 명합(冥合)하여

를 하나로 관하면

그의 지혜가 만물에 주변(周遍)하여도

처음부터 로 여기지 않으며

유감(幽鑑)하여 비추는 대상이 없어도

처음부터 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기에 하늘과 땅을 제평(齊平)하여 하나가 되어도

그 실상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이를 모두 요약하자면

처음은 법을 가지고 아집을 깨트리고,

둘은 을 가지고 法執을 깨트리고,

필경공을 가지고 을 깨트린다는 것이다.

일체 마음의 반연을 멸하는 것이니

이는 얻을 것이 없어야 하고,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은 내견(內見)과 외견(外見)을 초월함이니

내견은 안으로 망상이 있다고 보는 것이요,

외견은 밖으로 여러 가지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자가 무상(無常)의 참 의미를

증득하였다면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무상의 참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는 것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러므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았으니

당연히 공(空)을 행하여 유(有)를 없애지만,

온갖 공덕의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하며,

무상(無相)을 행하지만,

중생들의 상을 취하는 그것을 없애 주어야 한다.

무생(無生)은 곧 무작(無作)이니 무작(無作)을 증했으니

나고 죽고 하는 업을 짓지는 아니하지만,

몸을 받는 것을 나타내고, 무기(無記)를 행하여

모든 일으키는 마음을 없애지만

모두 착한 행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 대승의 교리이다.

〞일으키는 마음을 없앤다〟는 것은

마음의 반연을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무기(無記)란 선악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도덕적 성질을 의미한다.

 

그런데 완전한 이 몸이 허깨비 같다면

허깨비 같은 이 몸으로 허깨비 같은 중생을

어떻게 구제한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생할 수 있다.

《유마경》을 보면 문수사리의 이런 물음에 대해

유마힐은 이렇게 답한다.

「환(幻)을 부리는 사람이

환(幻)으로 만들어 낸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이

제도할 중생을 보는 것이 이와 같아야 하며,

지혜 있는 자가 강물 가운데 달(水中月)을 보듯이 하며,

거울 가운데서 자기의 얼굴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야 한다」라고 했다.

유(有)와 무(無) 흔들리지 않고,

또한 행하되 행한다는 마음을 짓지 말고,

무엇을 하든 그 과(果)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면서 한평생을 살아왔다.

세월이 흘러 돌아보니 모두가 공허함뿐이다.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달려왔다가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되니

밖으로 향했던 마음이 안으로 향하게 된다.

〞내가 누구지?〟

〞무엇을 때문에,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아왔지?〟

하얀 밤을 지새우며, 술잔을 들이켜면서

아무리 생각하고 또 반추해 보아도 답이 없다.

절에 가고, 교회에 가 본들 그 답은 없다.

공허하다, 허무하다. 살면서 한 번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지 못했던

죽음이란 문제까지 나를 엄습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지?

어디로 가지? 천당, 지옥, 극락? 그러나 답은 없다.

답 없는 질문은 공허할 뿐이다.

부질없는 명자(名字)의 유희에 불과하다.

공허함이 깊어져 무기(無記)의 늪에 빠져들어 간다.

이 어둠의 터널을 출구가 없는가?

 

옛 고승들도 〞내가 누구지?〟하는 문제에 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화두(話頭)를 들었다.

해박한 지식으로 온갖 답을 구했지만, 답은 얻지 못했다.

궁구(窮究)하고 또 궁구하니 답이 사라졌다.

아니 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질문이 사라졌다.

사대(四大) 오온(五蘊)이 무엇인지,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가 무엇인지

깨닫고 보니 답이 아니라 질문이 사라진 것이다.

화두의 본질적인 해답은 질문의 답이 아니라

질문이 사라지는 그 경지였다.

그것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고,

비유비무(非有非無)도 아니고,

역유역무(亦有亦無)도 아니었다.

 

우리의 삶이란 것에, 무상의 허무를 느꼈다면

그 허무의 바닥까지 떨어져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의문이, 그 느낌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사대 오온이 무엇인지,

근경의(根境意:6근, 6경, 6의식)가 무엇인지

그 실체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무상(無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 답이란 곧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질문이 사라진 그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르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 경지에서 행함은

적멸의 자비뿐이라고 경전은 설하고 있다.

적멸의 자비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취할 것도 없고[不取], 버릴 것도 없으며[不捨],

모든 법은 공()이고, 무상(無相)이고,

무원(無願)이며, 무상(無常)이며

또한 모든 법은 무아(無我)이고 무중생(無衆生)이고,

무명(無命)임을 깨달음 마음에서 행하는 자비심을 말한다.

 

모든 번뇌는 이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이 없다(一心不生 萬法無垢)라고

삼조 승천 대사가 말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