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소고(無常小考) 5-1. 무상한 인생

2024. 12. 21. 11:42잠언과 수상록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이 그 뒤를 잇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열흘 가는 꽃도 없지만, 아침에 핀 꽃잎이

저녁에 시들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시절 인연이 변하여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이고,

찬 서리에 온 잎이 다지고 삭풍이 몰아쳐

천지 만물이 얼어붙는다고 해서

대자연의 생명에 끝장이 나는 것도 아니다.

봄이 오면 다시 얼었던 땅이 녹고

메마른 가지에서는 새싹이 돋아나지 않는가?

그러기에 금년에 피어난 꽃은

과거의 무한한 봄을 두고 피어났던 그 꽃이요,

우리 눈앞에 있는 저렇게 어여쁘게 물든 단풍잎은

미래의 무량겁에 걸쳐 나타날 영원한 모습이다.

따라서 겨울이 왔다고 슬퍼할 것도 아니며,

봄이 왔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아니다.

어찌 자연만이 그렇겠는가?

오늘 따스한 햇볕 아래 밭을 일구고 있는 농부는

몇십 년 전에 손가락을 빨면서

아버지의 밭 일구는 것을 바로 보고 서 있던 그 소년이요,

다시 몇십 년이 흘러가면 또 오늘같이 따스한 봄날에

저 농부의 아들이 어른이 되어 밭을 일구리라.

인생 그렇고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말이다. 정녕코 모든 것은

새봄의 꽃잎처럼 피고 또 지는데,

도대체 나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나

이 든 사람이라면 아마도 살다 보면

어느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홀로 깨어나

주변을 돌아보고는 감상에 젖어

고독이 엄습하는 이런 경험을 한두 번은 했을 것이다.

 

옆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낯선 사람같이 느껴지고,

힘들여 장만한 세간살이가 모두 허망한

잡동사니처럼 느껴지는 그런 느낌을…….

그리고 낙조가 지는 호숫가에서,

가시지 않은 태양 빛이

저 산등성이 위에 하늘을 붉게 물들 때,

알지 못할 외로움이 뼛속에 스며들고,

허무한 느낌이 가슴을 텅 비게 하는 그

런 그 기분이 든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생각도 잠시 스쳐 갔을 것이다.

 

『그렇게 검든 내 머리카락도 어느새 백설로 바뀌었구나!

그런데 지금까지 그 긴 시간 동안을,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렇게 살다가 허무하게 죽어야 하나?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 있는가?』하고.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다.

흐르는 시냇물보다도, 날아가는 화살보다도

빨리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다.

청운의 푸른 꿈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산을 허물 듯한 청년의 기개는 잠깐 사이에

두더지가 파놓은 뒤편 텃밭의 흙 두덩이

옮기기도 힘겨워지는 것이 인생이다.

청년의 윤기 있는 검은 머리는 봄날 산등성에 녹다말은

잔설처럼 흰 세치머리가 늘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어찌 그뿐이랴. 곧은 허리는 굽어져 수양버들이 되어가고,

갓 핀 깨꽃같이 분홍빛 윤기가 흐르던 고운 피부는

어느새 쓰다 버린 헤어진 수세미처럼 변하는 것이 인생이다.

상아(象牙)같이 희고 건강한 치아는

온통 남의 이로 바꾸어져 개밥에 도토리 구르듯

입안에서 음식은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다닌다.

훤한 이마는 어느새 빨래판처럼 날마다 골만 깊어져 가고,

우렁찼던 목소리는 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 모양

쉰 소리를 내고, 총명한 눈은 어물전 망태기 속에 들어있는

물고기 눈처럼 허멀게지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쭉 뻗은 건장한 팔다리와 우람했든 몸은

굽은 물푸레나무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주위를 돌아 보라. 언제나 옆에 계실 줄 알았든 부모는

어느새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냇가에서 물장구치면서

함께 개구쟁이 짓을 했든 소꿉친구들,

외로울 때 벗이 되어 주었든 그렇게 다정했든 친구,

친지들. 모두가 하나둘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곳으로 떠나가고 있다.

젊었을 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든

장미보다 귀엽고 아름다웠든 자식들, 연인들도…….

내 사랑한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둘,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던가?

만남은 정녕코 헤어짐이라…….

태어난 인생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 분명한데도

어쩐지 나만은 죽음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미련의 안개에 싸여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그 안개가 걷히면

당신을 느낄 것이다.

우리네 삶이란 진실로 외롭고 고독하고 허무한 것임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라. 두통이 심하여

우연히 병원에 들렀다가 의사로부터

불치의 암이 이미 악성이 되어 당신의 수명이 길어야

두세 달밖에 살지 못한다고 판정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라.

지금까지 죽음이란 남의 일이요,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당신의 남은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될 것이다.

죽음은 많이 보았다.

친구의 죽음에서부터 부모의 죽음까지를.

그때는 단지 서글프다는 막연한 생각이나

감상적인 느낌만 들었을 뿐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남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상 나 자신의 죽음을 예고 받는다면

그때는 달라질 것이다.

 

생각해 보라. 친구나 친지의 초상집에서는

고스톱도 치고 술타령도 벌렸다.

그런데 나의 죽음을 맞이하는 그날을 통보받고서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고스톱, 술타령이 나의 그 죽음 앞에 무슨 흥취가 있을까?

3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판정받은 사람이라면

그에게 돈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출세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명예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그 사실을 머리로서는 인정하면서도

이는 남의 죽음이요, 나의 죽음이 아니라고 여긴다.

절대로 이를 가슴으로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슴으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상가(喪家)를 나온 그 순간에 다시 세속의 안개 속에 갇히게 된다.

재물, 권세, 애욕, 권리, 명예 ……등등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을 막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나도 머지않아 죽는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때

이것은 분명 부질없는 욕망이요, 미망의 안개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미망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더 많이, 더 높이 가고자

시기심과 투쟁심, 갈등의 분별심으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분명 사라질 이 몸뚱어리를 나라고 믿고

부단한 애착을 느끼고, 분별심과 갈애심을 일으켜

여름철 하루살이처럼 욕망의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다.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도 나와 다르지 않은가?

사생아로 태어나 만승천자의 위에 오른 진시황은 어디에 있으며,

천상(天上)의 이슬을 담아 만세를 꿈꾸었던 한 무제는 어디에 있는가?

양떼나 말을 키우던 유목민족의 아들로 태어나

대륙을 휩쓸던 칭기즈칸도, 시(詩) 한 수를 짓기 위해

로마를 불태우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든 폭군 네로황제도,

한갓 코르시카섬에서 태어나 황제의 지위를 얻어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도,

세리(稅吏)의 아들로 총독이 되어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학살해 가면서

세계 정복의 야심을 키운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도……

그들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위대한 인물들이라고 그렇게 칭송을 받든 그들은

아침에 받은 신문이 금새 휴지통 속에 버려지듯,

무상한 시간 속에 속절없이 묻혀진 이들이 아닌가?

그들도 돌이켜 보면 한갓 우리네 범부들과 같이

미망의 꿈속에 산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까지 무심코 스쳐 갔던 길거리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늙고, 병들고, 허리는 고부라져서 지팡이에 의존하여

하루하루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그

들과 먹고살기에 그렇게 걱정 없이 지낸다고 자부하는 나는

죽음 앞에서 무엇이 다른가를.

이런저런 이유로 팔다리를 잃어 장애인이 되고,

눈을 다쳐 시각장애인이 된 그들과,

말 못 하는 언어장애인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과

불치의 병으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저 불쌍한 사람들과

사지가 멀쩡한 나는 죽음 앞에서 무엇이 다른가를.

호화롭고 번지르르한 장례식이

죽음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라. 진실로 사람이 한평생 산다는 것은

허망한 꿈에 불과하지 않은가?

욕망이란 꿈, 그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 허약한 인생이 바로 나의 인생이 아닌가?

그러므로 언제가 사라질 나의 인생이란

저 뜰 앞에 핀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보다도 못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현인들은 이렇게 말했던가?

『솔로몬의 부귀영화도

한갓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국화보다도 못하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