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소고(無常小考) 5-2. 욕망의 실체와 심리적 변화
2024. 12. 22. 13:18ㆍ잠언과 수상록
인간의 근본 욕망을 대별한다면
재물욕(財物慾), 색욕(色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명예욕(名譽慾)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이를 오욕(五欲)이라고 명명했다.
나이가 들면 이에 더 나아가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또한 몰아친다.
이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느끼게 되는 욕망이요 고통이다.
그런데 이런 욕망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음속에 환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 환영을 부처님은 무지(無智)에서 온다고 한다.
무상(無常)한, 무아(無我)인 이 몸을
영원한 존재로 여기고, 인연(因緣)이 있으면 생하고
인연이 멸하면 사라지는 무상한 만유(萬有)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오욕의 번뇌가 생기고, 욕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모르는 중생들은
<나>가 누구냐? 왜 사느냐? 하는 질문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본질의 문제를 벗어난 현실의 문제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
“당신은 누구인가? 왜 사느냐”고.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이런 질문 자체를 잊어버렸다.
사람들은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는
무상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하루하루를 목적 없이
생활 속에 매달려 분주하게만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고작 이렇게 답할 것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산다.』라고.
무지(無智)의 이 소리는 무상(無常)을 모르기 때문에,
아니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들은 살아가고는 있지만 지극히 낮은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생각해 보자. 먹기 위해 사는 삶의 가장 낮은 형태는
미생물인 아메바의 삶이다.
아메바란 동물은 단세포 동물이다.
기관이라야 고작 먹는 입만을 갖추고 있다.
몸 전체가 입뿐이다. 아메바는 몸 전체가
입의 기능밖에는 갖추고 있지 않다.
아메바는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운다.
그의 몸은 먹을수록 커진다. 그리하여 너무 커서 더
이상 주체할 수 없게 되면 그의 몸은 두 개로 분열된다.
세포분열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열된 두 마리의 아메바는
또 닥치는 대로 먹는 작업을 계속한다.
이와 같이 아메바는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서 먹는다.
주변을 둘러보라.
이런 아메바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진리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생존하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삶 이상의 것을 위해서 생존하고 있다.
경전에서 「마음과 부처 중생은 다르지 않다」라는 말이
이 말을 뜻하는 것이다.
현상 세계를 넘어 실체의 세계(佛性)를 보라는 의미다.
또 정치나 권력에 심취한 사람들을 보자.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2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자기 밖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안으로 향해가는 사람이다.
자기 안으로 향하는 사람을 nobody이라고 한다면
밖을 향하는 사람은 anybody가 되려는 사람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정치가들이다.
남들과 다른 그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자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또 그들 위에 서고 싶은 사람은
무엇인가에 의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권력이고,
부(富)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왜 그들은 정치나 권력에 미치는가?
그들의 마음속에 스스로 열등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열등감의 표현이 우월성과 과시욕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상대적으로 돋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도 바로 잡을 수 없으면서
이 세상 전체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애고(ego)가 강한 인간들이다.
자아 집착 의식이 강한 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방향으로도 갈 수 있는 인간들이다.
돈 쪽으로 마음이 기울면 그는 돈을 모으기에 혈안이 될 것이다.
매스컴에 요란하게 회자하는
정치인들의 비자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권력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수천억의 돈을 숨겨두고 있지 않는가?
왜 그리 많은 돈이 필요했겠는가?
“돈은 귀신도 움직인다.”라는 말처럼
돈은 힘의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
그 힘을 빌려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것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은 물론 동물의 속성에서도 볼 수 있다.
동물들을 관찰해 보라.
거기에는 절대적인 명령계통이 있다.
개미나 꿀벌들을 보라.
그들을 통치하는 절대 권리자가 있다.
여왕개미, 여왕벌이 바로 절대권력자요,
통치자로 그들 속에 군림하고 있다.
원숭이들을 보라. 모든 원숭이 무리 속에는
분명 대장 원숭이가 있다.
가을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에도 대장이 있다.
그 통치자는 그가 속한 무리를 지배하고 명령하고 있다.
여우나 늑대무리 속에도 그들을 다스리는 대장이 있다.
이와 같이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남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람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복하려 한다.
현명한 자는 알고 있다.
지배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파멸뿐이라는 것을.
이는 구태여 역사를 들추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만약 그들이 무상(無常)을 안다면 그렇게 살겠는가.
사람에게는 또 묘한 본능적 습성이 있다.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오욕이라는 그 뿌리는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이요,
삼독은 “나”라는 것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넓게 보면 세상과 나의 관계다.
세상과 나의 관계란 결국 세상의 것을
얼마나 내가 소유하고 또 점유하느냐의 관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소유물과 나와 관계는 어떠한가?
심리학에서 인간의 속성을 정의한 말 가운데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시체 애호증(愛好症)’이란 뜻인데
쉽게 말해서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은 것을 더 좋아한다는 의미다.
소유욕은 바로 이러한 네클로필리아적 욕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물건을 소유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 소유관계는 생명이 없는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 된다.
잠시만 생각해 보라. 우리가 소유한 돈,
토지와 건물, 사회적 명성, 지식, 기억 등등은
모두가 “과거”에 축적된 것이 아닌가?
과거는 죽은 것이며,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상기함으로써 감상에 젖는다.
우리는 과거 속에 이루어진 것에 의존하여 지금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라는 것은
현재의 <나>가 아니라 과거의 축적일 뿐이다.
과거의 <나>는 이미 흘러갔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나는 과거의 나다(I am what I was)”라고 하는 것이 된다.
내가 자랑하고,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소유의 관계는 곧 죽음과 관계를 맺는 것이 된다.
죽음은 어둠이다. 어둠은 악마요, 사탄이요, 마구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어둠의 악마와 관계를 맺는 것이 된다.
그래서 경전은 이를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무명은 빛이 없는 어둠(無智)이다.
그러므로 소유나 점유는 인간의 살아있는 지혜를 지닌
진심(眞心)을 흐리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經)의 말을 빌리자면
“무명(無明)이 불성(佛性)을 가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건을 소유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지금 소유하려고 하는 물건이 영원하지 못하고
금방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라면
그 물건을 소유하려고 할 것인가?
사람들은 변하고 사라질 물건을 영원히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망상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이렇게 한다.
“나는 빌딩, 증권, 부동산……등등을 가지고 있다.”라고.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라는 이 말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만약 주체인 “나”와 객체인 “대상”이
찰나에 변한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따라서 이 말 속에는 주체도 “나”도 영속적이며,
객체인 “재물”도 영속적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송장을 끌어안고 산 사람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인 “나”가 영속적일까?
또 객체인 “재물”이 영속적일까? “나”는 언제가 죽을 것이다.
“나”는 내가 뭔가를 소유하는 것을 보증해 주는
사회적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 재물도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괴될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또 그 가치가 없어질 수도 있다.
무엇을 영원히 소유한다는 표현은 결국 영원하고
파괴할 수 없는 실체라는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일례로서 오늘날 사람 대부분이 자
기의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환상에 뿌리 깊게 연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소유한 그 재산이 영원함으로
그 재산을 소유한 나도 영원한 존재라고 여기는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재물과 내가 동일시되어서
법이 유언의 효력을 지켜준다면
나의 재산이 대대로 대물림되듯이 동시에
“나”라는 것도 그 재산을 통해서
더불어 영속적으로 존재한다는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나의 재산을 통해서
나의 불멸(不滅)을 믿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왕들이 죽은 뒤에
미이라로 만들어 무덤 속에 온갖 보물을 함께 안치한 것도
부(富)와 권력을 이용해서 불멸의 삶을 추구했던 것도
모두가 소유를 통한 이런 영원성
즉 불멸의 환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명(無明)의 소산이다.
재물은 확실히 인간에게 묘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소유물은 사회적 신분 상승과 힘의 연장이며,
자아(自我)를 포장하기 위한 확장성을 부여하는
대리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졸부들은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두 가지 정형적인 패턴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해외여행이고, 하나는 쇼핑이다.
그들의 여행은 무엇을 본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를 다녀왔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에 지나지 않고,
쇼핑은 상품의 효용가치를 본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고가의 명품을 자랑하며 이를 통하여
자신의 신분 상승을 과시하고 싶은
대리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금강경을 보면
「현상을 통해서는 진실을 볼 수 없다(若以色見我 不見如來)」 말이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지에서 일어나는 형태는 우리의 삶 속에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색욕(色慾)이다.
색욕은 애욕을 의미한다. 이성(異性)에 대한 욕구를 말한다.
애욕의 실체란 무엇인가?
애욕의 실체는 쾌락에 대한 탐욕이다.
쾌락은 희열(喜悅)과 그 의미가 다르다.
쾌락이 본능적이며 육체적이라면
희열은 이성적(理性的)이며 정신적이다.
경(經)의 말을 빌리자면
“법열(法悅)”이요, “법의 희열”이다.
이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쾌락주의를 창시한
에피쿠르스(Epicuros. B.C. 342?~270)도
“순수한 쾌락”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라고 주창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하여 사람 대부분은 “순수한” 이란 말을 빼고
“쾌락”이란 말만을 받아들여 그 의미를 기쁨이나
희열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가 말한 순수한 쾌락의 의미는
“고통의 부재(不在)”와
“영혼의 평정(平靜)”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쾌락이란 하나의 탐욕에서 다른 탐욕으로
끊임없이 옮겨가는 욕망의 만족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 학파를 순세파(順世波)라 부른다.
쾌락에 대한 욕망은 극히 강렬할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둠으로써 느낄 수도 있다.
돈을 많이 버는 데서 느낄 수도 있고,
복권이 당첨됨으로써 느낄 수도 있고,
부부의 성관계로서 느낄 수도 있고,
마음껏 먹는 데서 느낄 수도 있고,
경주에서 이김으로서도 느낄 수도 있다.
음주, 황홀, 마약이 가져오는 마음의 격앙 상태,
새디즘을 만족시키거나 살아 있는 것을
죽이거나 난도질하는 격정을 만족시키는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정신적인 것도 아니요,
이성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육체적이며,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이
부어도 부어도 차지 않는 허망한 욕망이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실체가 없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다.
쾌락주의를 창시한 에피쿠로스가
쾌락의 의미를
“고통의 부재(不在)”와 “마음의 평정”으로 정의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욕망의 충족으로서는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쾌락은 반드시 불쾌감이 뒤따르며,
모든 쾌락은 그 절정에 이르면
슬픔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또 그 욕망은 끝내 충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생을 쾌락 추구에 쏟아붓는 것은
헛된 욕망의 노예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을 그 진정한 목적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쾌락의 정의를 그렇게 한 것이다.
이를 부처님께서는 <아함경>에서
『모든 물질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고통이며,
고통은 영원한 “나”라는 실체가 없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면 나의 것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느끼고, 생각하고,
실천하고, 분별하는 것도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영원한 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色無常 無常卽苦 苦卽非我 非我者亦非我所
如是受想行識無常 無常卽苦)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성간의 애욕에 대한 의미를 좀 더 깊이 살펴보자.
애욕의 궁극적 목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애욕에 대한 쾌락을 추구하게 만드는 궁극적 원인은
자연이 스스로를 보존하고 영속하려고 하는
종족 보존의 기만성에 있는 것이다.
그 종족 보존의 수단이 겉으로는
이성간의 애욕으로 위장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교학에서 말하는 삼계(三界) 또는 삼유(三有)라는 것 중에서
유애, 욕계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삼계란 욕계, 색계, 무색계라고 하고,
삼유란 욕유, 색유, 무색유이다.
욕계란 욕망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욕망의 세계는 애욕이 가장 강하다.
그것은 근원적 욕망이다.
그러므로 욕계는 욕유라고 하고 또 애욕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색계란 물질세계를 말한다. 이를 색유라고 말할 때
이는 인간이란 개체가 존재하려고 하는 본능을 말하는 것이다.
애욕이 생물학적으로 종(種)이란 포괄적 의미에서
생명 보존이라고 한다면
이는 개체의 생명 존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색계란 정신세계를 말한다. 무색유라고 하면
이는 개체가 자유롭게 존속하려고 하는 각종 명예나
정신적 안정감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을 추구하는 세계다.
일본학자들은 이를 번영욕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
러므로 인간이란 지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애욕이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자연이
자기 종족 보존을 위해 인간을 기만하는
고단위 속임수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고단위 속임수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살아 있는 동식물은
개체의 생존본능을 가지고 있다.
동물은 때가 되면 종족 번식을 위하여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짝짓기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은 단지 종족을 보존하는
본능적 욕망으로만 모든 행위가 이루어진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꽃이나 나무는 종족의 번식을 위하여
벌이나 곤충을 유혹하고, 바람을 이용하고,
씨앗을 다른 곳으로 퍼트리기 위해 열매를 맺을 뿐이다.
그 형태는 천차만별이지만 목적은
오로지 자기 종족 번식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동물과 식물은 종족 번식의 법칙에 따를 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과 달리 쾌락을 추구하기 위하여
짝짓기하거나 씨앗을 퍼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이면서 예지(叡智)를 가지고 있다.
흔히 철학적 용어로 이성(理性)이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부처님은 이를 불성(佛性)이라고 했고,
반야(般若)라고 했다.
본능적 욕구는 개체 생명이 사라지면 함께 살아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시간적 제한을 받는 육체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이성(理性)이나 불성은 그 속성이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 것은 시간적인 제약을 벗어나 있다.
따라서 이성은 본능적인 것이 아니고
또 자연적인 육체적 욕망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동물적 욕구나 본능적 욕구를 거부한다.
만약 자연이 인간에게 단지 종족 보존의 법칙만을
강요하여 따르게 한다면
이성을 지닌 인간은 이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간은 자연의 속임수에 넘어가는가?
자연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인간에게 종족 보존에 대한 그 보답으로
쾌락을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종족 보존의 수단으로
애욕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얻기 위해
자연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다.
마치 치과에 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를 사탕으로 유인하듯.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이 인간을 기만하는
숨은 목적은 생존 보존이었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은 생존 보존이 아니라
쾌락 추구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갖가지 성범죄가 유행하고
변태적인 성 윤리가 난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성 간의 사랑 행위가 단지 생존 보존의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애욕에 대한 쾌락 추구에 두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쾌락의 속성이란 자극적이고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더 짜릿한 쾌감을 주기 때문에
인간은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하여 더 자극적이고
더 강렬한 새로운 쾌락의 대상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 쾌락의 대상이란 처음에는 사람에게서 찾지만,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쾌락을 느끼지 못하면
사람을 다른 대체물로 바꾸어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산업사회가 겪고 있는
갖가지 변태성 성범죄와 마약, 마리화나,
이유 없는 폭력과 살상 행위 등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사회심리학자나 정신분석가들이 지적한
새디즘(sadism)이나 매조키즘(masochism)과 같은
비윤리적인 성 윤리가 바로 이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새디즘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에 대하여
잔학한 가혹행위를 함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매조키즘이란 무엇인가?
새디즘과는 반대로 상대방으로부터
잔혹한 가혹행위를 받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둘의 형태는 다르지만, 변태인 것은 동일하며
또 그 목적은 둘 다 오로지 육체적 성적 쾌락을 얻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쾌락에 대한 갈애는
마침내 인간이 아닌 동물이나 마약과 같은
더 자극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애욕은 왜 고통인가? 애욕은 쾌락 때문이요,
쾌락은 욕망의 자기 충족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그 끝이 없다.
그러므로 끝이 없는 인간의 욕망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만족 없는 쾌락은 고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애욕에 대한 욕망이란 뿌리가 윤택해지면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그늘을 만들 듯, 애욕이 깊으면 그렇게 무성하게 자라
인간의 바른 이성을 가린다. 또한 애욕은 무심히 버린 작은
담배꽁초의 불씨가 온 산천을 잿더미로 만들 듯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애욕의 실체요,
늙어서 육신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이
바로 애욕의 속성이다. 피가 뜨거운 동물은 그 피가 식을 때까지
애욕의 늪에 들어가기를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연에 속아 쾌락을 사랑이라고
미화(美化)하여 이성(異性)에 대한 갈애로 몸부림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 보면 태양이 뜨면 사라지는
아침이슬처럼 허망한 것이 애욕의 실체가 아닌가?
낯선 경험의 새로운 쾌락은
달콤하고 부드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치 가랑비가 속옷을 끝내 흠뻑 젖게 만들듯
우리들의 바른 마음을 미망 속에 살포시 들어와
속속들이 젖게 한다. 애욕의 첫 씨앗은 작지만,
그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면 무성한 잎과 가지를 내어
그늘을 만들 듯 우리의 진심을 덮어 버린다.
애욕의 씨앗은 마치 암과 종기와 같아서
보이지 않는 몸 안에서 자라나지만,
우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작은 불꽃이 퍼져 온 산천을 태우듯
애욕은 모든 착한 마음과 행실을 불태워 버린다.
그러므로 애욕에 빠진다는 것은
마치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과 같아서
깊이 밝으면 밝을수록
더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상한 이 삶 속에서
애욕의 늪으로 발을 빼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애욕이란 한 번 감옥에 들어간 본 사람은
더 많은 것을 그곳에서 배워 더 큰 죄를 범하듯,
한 번 쾌락을 맛본 자는 더 큰, 더 자극적인 쾌락을
탐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 그루 사과나무에 수백 개의 사과가 열릴 듯
애욕은 수천 개, 수만 개의 쾌락의 열매를 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애욕은 사람이 늪에 발을 들여놓으면
깊이 들어갈수록 더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쾌락이 충족될 때마다 그의 저항력은
그 쾌락의 늪에 빠진 만큼 감소하고,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죄에 대한 자각을 상실하기 때문에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며 따라서
자신의 정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라고 서양의 철학자 존 밀턴(john milton)도 말했다.
어찌 이것이 단지 슬픈 일로만 그치겠는가?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사람은 가도 그 죄업은 따라간다.』라고.
그 죄업이 몰고 가는 곳은 어디인가?
돼지나 소와 같은 축생의 세계요,
귀신이 들끓는 악귀의 세계 곧 아수라의 세계요,
시뻘건 쇳물이 끓고 독가스가 길을 막는
지옥의 세계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슬프게도 허무주의나 쾌락주의에 빠져
윤회를 부정하고 죄짓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와 같은 은하계가 23개나 있다면 당신은 믿겠는가?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지만
우주선 위에서 본 적은 없다.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윤회와 죄업도 그러한 것이다.
의심이 나면 거대한 우주를 보라.
그 장엄한 크기에 비한다면 당신의 몸은 좁쌀만도 못하다.
그러나 그대 육체의 내면을 한 번 살펴보라.
수천억의 세포가 군(群)을 이루고,
그 세포의 구성 분자나 원자는 수천억이 넘는다.
그대 대장 안에 사는 박테리아는
당신의 적은 육체가 거대한 우주가 되어 있지 않은가?
우주의 극대(極大)에 비하면 내 몸은 극소(極小)가 되고,
내 몸의 극소(極小)에 비하면 극대가 되는
이 불가사의함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극대와 극소의 이 끝없는 심연 속에
자리한 인간의 본성이 단순히 육신이 사라진다고 없어지겠는가?
업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림자를 생각해 보라.
그림자는 실체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림자는 빛이 있으면 사람을 따라다니지 않는가?
사람이 가면 그림자도 가고, 사람이 멈추면 그림자도 멈추듯,
이 생(生)이 가면 지은 바 행위도 가고,
다음 생을 받아 머물면 따라서
그 쾌락에 대한 행위의 과보는
그에게 머물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어리석은 마음으로 생의 윤회를 부정하고
오욕의 늪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젊어서 즐기지 않으면 늙어서 언제 즐기겠는가?
죽으면 썩어질 이 몸뚱어리 살아 있을 때
한 번 신나게 놀다가 가자.”고.
그러나 이렇게 인생을 보내고 나면
분명 뒤에 가서 남은 것은 후회와 고통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놀지 못하는 자에게도 남는 것이 있다.
바로 한(恨)이 그것이다.
한(恨)이란 무엇인가? 그
것은 인간이 못다 한 욕망이다. 그
욕망이란 다름 아닌 오욕의 씨앗이요,
애욕의 열매인 쾌락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쾌락의 끝은 어디인가?
그것은 고통의 쇠사슬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욕망의 실체는 이루면 고통이요,
못 이루게 되면 한(恨)이 되는 것이다.
나와 자연에 대한 바른 지혜(正智)에 알지 못해서,
다시 말해 무명에 빠져 나도 자연도 무상하고
무아(無我)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갖가지의 번뇌와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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