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소고(無常小考) 5-3 무상(無常)을 아는 자 부처를 보리라.

2024. 12. 23. 10:45잠언과 수상록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촉감으로, 냄새로 구별하는

일체의 차별 상으로 존재하는 현상세계의 모습들은

마음(心)의 분별 작용에서 나타난 식(識)의 모습일 뿐이다.

유식(唯識)의 말을 빌리자면

『만법유식(萬法唯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기를

모든 법은 허깨비[], 아지랑이, 물에 비친 달,

, 그림자, 메아리 등과 같고, 옴도 없고 감도 없고,

생김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이고 무상(無相)이며 무원(無願)이니,

드러나되 취할 만한 것도 없고

장애(障礙)도 없다는 것을

믿고 이해하라.”(觀察諸法行經)라고 했다.

 

부처님은 일찍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제법무아(諸法無我)라」 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찰나에 변하고 잠시도 머물지 않으며

모든 것은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양파껍질을 벗기듯 벗기고 또 벗겨 보아도

알맹이 없는 무상한 이 삶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어리석게도 오늘도 불나비 모양

오욕(五慾)의 숲에서 욕망의 불을 지핀다.

 

그런데 그 욕망의 대상은 과연 영원한 것인가? 생각해 보라.

영원히 늙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죽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모은 재산 죽을 때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던가?

일국의 제왕이 되고, 대통령이 된들 영원한 권력이 있던가?

천하를 호령하고 황제에 올라 꿈의 궁전이라 불렸던

진시황의 아방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히말라야가, 태산이 아무리 높은들 영원히 높은 산이 아니요,

황하가, 아마존강이 아무리 큰들

무상한 세월 속에 영원한 강으로 머물겠는가?

 

사람도 자연도 모든 것은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찰나 찰나에 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영원한 것으로,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 찰나에 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영원한 “나”와 영원한 “나의 것”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며, 변화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어떠한 것에도 “영원한 나”와

“영원한 나의 것”이 없다는 이 사실 ―

그것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거나

안 나타나셨거나 관계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참다운 진리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 욕망의 삶을 버리고

영원 속에 살아간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역사를 통해서 현인(賢人)이라 부르고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가장 으뜸은 고타마 싯다르타였다.

그는 왕자로 태어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아름다운 아내, 사랑하는 자식까지도 버리고

출가하여 무상(無常)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열반이란 영원한 삶을 획득한 사람이었다.

그가 걸어간 구도의 첫길은 무엇인가?

위대한 세계의 정복자를 꿈꾸었던가?

아니면 지상의 억만장자였던가? 아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오로지 “나”를 찾기 위한 길이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야만 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무상한 굴레에 갇힌

삶의 의미를 찾아 이를 벗어난 영원한 삶을 추구한 것이다.

그는 진실로 무상을 깨달은 사람이기에 불타(佛陀)라고 했다.

“불타(佛陀)”란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무상(無常)을 깨달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은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스승이 된 것이다.

 

무상(無常)이란 무엇인가?

무상이란 말은 우리가 느끼는 허무(虛無) 감정과는 다른 것이다.

아침에 핀 꽃이 저녁에 시드는 것을 보고

무상(無常)을 느꼈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이는 무상의 본래 의미를 망각하고

허무적인 감정을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무상(無常)이란

“변화”를 말하며 이는 한순간도 머무름이 없거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무상(無常)인 것이다.

무(無)란 없다는 뜻이고, 상(常)이란 영원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찰나의 짧은 시간 속에도

잠시도 머물지 않는 것이 무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허무감이나

공허감 등의 그런 니힐리즘(nihilism)이나

센치한 감정을 말한 것이 아니다.

 

무상(無常)이란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어떤 특별한 한순간에는 머물지만

다른 모든 순간에는

머물고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어떤 특별한 순간이 머무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순간도 그렇게 여겨져야 한다.

만약 어떤 것이 찰나라는 짧은 순간에만 변하지 않고 있다면

모든 사물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며

변화란 불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올챙이는

어느 한순간 동안은 올챙이로 있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개구리로 변하는 것이라면

올챙이는 어디까지나 올챙이지 개구리가 될 수 없을 것이고,

개구리 또한 올챙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올챙이란 존재 또는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실체나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어나 한 찰나에도 머물지 않고

개구리로 변해 가는 올챙이란 존재는

올챙이가 아니면서 또한 개구리도 아니다.

이는 단지 실체나 존재가 아닌

사건이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올챙이는 무상한 찰나 속에

인연(因緣) 따라 변해 가는 하나의 사건이나

행위이기 때문에 “올챙이”이니

“개구리”이니 하는 것은 이름만 있을 뿐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무상(無常)이란

이렇게 어느 순간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무상(無常)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실제로 눈으로 느끼느냐 못 느끼냐는 별개의 문제다.

 

또 다른 한 예를 보자.

우리가 “장미가 저기 있다”라고 할 때 이 의미는

장미가 저기에 “존재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 있다”라는 존재나 현존(現存)의 개념은

머문다는 개념과는 불가분의 것이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은 일종의 계속됨이거나

'머물고 있는 실체'이어야 한다.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함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물들이 순간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찰나에도 머물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영원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영원한 실체가 없는 것을

부처님은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시고

또 공(空)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실제로 변화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이른바 “머무름의 순간이

곧 머무름이 없는 바로 그 순간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젊어진다는 것은 노화된 세포가 죽고

새로운 싱싱한 세포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새 세포는 늙은 세포에서 시작되고,

늙은 세포는 새 세포로 이어진다.

새 세포의 탄생과 늙은 세포의 죽음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늙은 세포의 죽음이 있어야만

새로운 새 세포가 탄생하는 것이 가능하며

사라지는 것은 존재하는 것과 더불어야만

계속적인 생겨남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젊음은 노화의 시작이요,

노화는 젊음의 시작이다.

마찬가지로 태어남(生)은 죽음의 시작이요,

죽음(死)은 태어남의 시작이다.

생과 사는 머물지 않고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머무름이 없이 머무름이 바로 무상함의 본체이며

나타남과 사라짐의 동시성이 성립되는 것이

바로 무상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무상(無常)의 의미는

일어남도 아니고 (生 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짐(滅)도 아니다. 말하자면

불생(不生)과 불멸(不滅)이 동시성이라는 것이

바로 무상(無常)의 참뜻이다.

사라짐은 나타남과 동시성(同時性)을 지니며,

나타남은 사라짐과 동시성(同時性)을 지닌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무상(無常)의 실체(實體)란

사라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요,

나타남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상(無常)을 깨달았다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을 깨달았다는 의미와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위대한 불교학자이며 중국에 불경(佛經) 번역자로 이름 높은

인도의 삼장법사인 쿠마라지바(kumarajiva. 344-413 AD)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교의 핵심은 공(空)을 체득하는 데 있다.

그런데 공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사람은 보통 무상(無常)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무상이란 공으로 가는 디딤돌이다.

처음에는 무상의 문제가 거론되나

결국에는 필경공(畢竟空)으로 결론지어진다.

이들 무상과 공에 대한 교설은 깊이와

심원한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해도

실상은 동일한 것이다. 왜 그런가?

이른바 무상이란 순간순간 어떤 것도

머무름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

여기서 부정되고 있는 것은 긴 기간의 머무름이지만

머무름 자체가 완전히 부정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지 다듬어지지 않은 무상일 뿐이다.

다듬어진 참된 무상이란

바로 머무름이 곧 머물지 않음이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존재란 머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따라서 머무름이 없다면 자연히 존재도 없을 것이다.

비존재(非存在)란 무상에 대한

미묘하고 놀라운 가르침인 필경공(畢竟空)과 동의어이다.』

‘존재란 머무는 것’이란 말의 뜻은 무엇인가?

‘존재’란 궁극적 ‘실체’를 말하며,

‘머문다’라는 말은 영원하다는 말이다.

찰나에도 그리고 어느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이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은

어느 하나도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찰나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포함하여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일체는 무상한 것이다.

현상세계의 모든 것이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라면

이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空)인 것이다.

공(空)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장미 한 송이가 여기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장미를 본다. 그 장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有)다. 그러나 그 장미란 것의 실체는 없다.

장미는 있지만 그 실체가 없으므로

장미는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유(非有)다.

장미는 존재이면서 존재가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장미란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무(無)다.

그러나 장미라는 실체는 없지만

우리가 보고 있으니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무(非無)다.

그러므로 장미는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고,

비유(非有)도, 비무(非無)도 아니다.

교학의 말을 빌리자면

『공이란 자기부정이며,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며,

공 자체도 공하며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러므로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근본이다.』

라고 할 수 있다. 공(空)이란 예컨대 이런 것이다.

공(空)한 그것도 공(空)한 것을 공공(空空)이라고 한다.

이를 필경공(畢竟空)이라고 한다.

구극(究極)의 공(空)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세계의 사물

즉 존재(色)는 비존재(空)이며,

비존재가 곧 현상세계의 존재이다.

비존재는 존재와 다르지 않고,

존재는 비존재와 다르지 않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어서 공의 성질을 이르기를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했다. 이를 요약하자면

공(空)의 세계란 생멸도 없고, 번뇌와 무지와 청정함도 없고,

깨달음의 공덕이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상(無常)을 체득한 자는

공(空)을 체득한 자이며, 공(空)을 체득한 자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체득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태어난 것(존재)이 아니며

이는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며,

또한 죽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비존재)이 아니기 때문에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생(生)과 사(死)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생(生)은 사(死)의 시작이요, 사(死)는 생(生)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옛 현인들은

『생사(生死)는 일여(一如)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을 깨달은 자는 생사가 일여(一如)하고,

생사가 일여(一如) 하다면 이는 곧 불생불멸이니

인연의 세계를 벗어난 자가 된다.

그러므로 무상의 실체는 필경공(畢竟空)이요,

영원한 열반의 세계요, 번뇌와 무지를 벗어난

해탈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覺)이니 대해탈을 얻은 자가 되는 것이다.

대해탈을 증득(證得)한 자는 다름 아닌 곧 부처다.

그러므로 무상을 깨친 자 부처를 본다고 한 것이다.

분별망상인 식(識)의 근본은 일심(一心)이다.

왜냐하면 진여일심을 의지해서

그 작용인 식(識)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실재하는 자체가 없이 일심이

무명번뇌로 인하여 식(識)이 되었으며,

그 식(識)은 모든 존재하는

현상 사물로 변화하였을 뿐이다.(起諸現行).

그러므로 눈앞의 세계(境)를 거두워

식(識)으로 귀결시키고, 그 식(識)을 거두어

진여일심으로 귀납해야 한다(轉識得智)는 의미가 된다.(圓覺經疏).

이는 무상(無常)의 참 의미를 깨치면

진여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식(識)의 전변(轉變)으로 말한 것이다.

 

진여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진여 본성을 증득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교학에서는 진여(眞如) 본성(本性)은

모든 부처님의 과덕(果德)을 원만하게 갖추었으므로

이것을 불성(佛性), 법성(法性), 또는 불심(佛心),

불지(佛智) 등으로 부른다.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견성(見性)했다고 말한다.

불성(佛性)을 깨달았다는 의미다.

불성(佛性)은 만법의 자성(自性)이므로

그것을 法性이라고도 하며

법성을 보는 것이 불성을 보는 것이다.

견성이 곧 여래이며, 대열반이며 성불이니

무상을 증득하였다면 곧 불성을 증득하였다는 말이며,

불성을 증득했다는 말은 부처를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상을 아는 자 부처를 본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