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소고(無常小考) 5-4 무상한 삶 속에서 찾아가는 삶의 길
2024. 12. 27. 12:12ㆍ잠언과 수상록
우리가 인생이란 허망하고
무상(無常)하다고 느끼는 근본 원인은
<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나>라는 이 몸은 지대(地大), 수대(水大), 화대(火大),
풍대(風大)의 4가지 원소가 임시로 화합하여 이루진 것이다.
그런데 이 4가지 원소가 각각 따로 있는 것이어서
본래 주체가 없다 (四大無元主).
이 몸의 주체가 없는데
무슨 무상(無常)이란 병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허망하고 무상함 때문에
번뇌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왜 그럴까? 구마라집은 그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
「병의 일어나는 데는 2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과거의 나에 집착하였기에
널리 업을 짓게 되고, 그 업의 과(果)가 성숙하여서
고(苦)를 받는다. 또 하나는 현재의 나에 집착하여서
마음의 번뇌가 있으므로 병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내가 공(空)한 것을 깨달으면
병을 받을 주체가 없어진다.
사람이 태어난 것이 실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고,
죽는다고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그 삶에는 목적지가 없는 것이 된다.
삶이 목적지가 없다면 삶은 어느 곳으로 가야 할 곳도,
머물 곳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반추하면 무엇에도
얽매임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경이로운 것은 곧 찬양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경이롭다는 말은 어떠한 특수성이나
위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사(禪師)들이 말하듯 평상심(平常心)
그대로 사는 것이 경이롭다는 의미이다.
이는 단지 되어 가는 것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삶이란 단지 변화일 뿐이라고 여기면
삶은 하나의 게임이며 유희(遊戲)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을 너무 철학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에 속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미다.
이를 반연(攀緣)이라 하는데 반연 때문에
상을 취하게 되니 이것이 망상의 시초요,
병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반연하는 경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다. 욕계는 호(好), 불호(不好)의 세계요,
색계는 시비(是非)의 세계요, 무색계는 이념, 견(見)의 세계다.
이 3가지 세계는 유위(有爲) 유상(有相)의 세계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기뻐하다가도 번뇌하고,
즐겁다고 느끼다가도 괴로워하고,
행복감을 느끼다가도 허망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삼계의 밖의 법은
무위(無爲) 무상(無相)의 세계임으로
마음이 반연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삶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삶을 놓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생(生)을 생각하면 사(死)가 가로막고,
사(死)를 생각하면 생(生)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지해져야 한다. 그러나 심각해져서는 안 된다.
진지함과 심각함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심각해질 때는 수단과 목적,
방법과 성취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때 목적지가 있고 그 목적지로 가는 길이 있다.
야망이 생기고 욕망이 생긴다.
심각함은 곧 야망이며, 하나의 질병이다.
관심을 이 세상으로부터 돌릴 수도 있다.
오욕으로 물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야망에 찬 마음은 또 다른 세상을 생각한다.
심각함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심각한 사람은 자동으로 철학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생각을 시작한다. 심각함은 곧 머리와 관계가 있다.
심각한 사람, 사상가들이
항상 침울한 얼굴을 짓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은 웃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한다.
항상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는 삶 자체를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목적지가 삶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반연이 있기 때문이다.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진지한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진지함은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진지한 사람은 심각하지 않다.
진지한 사람은 추구하되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무원(無願)이며, 무작(無作)이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추구한다.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으로 역시 족하다.
아이는 개를 좇아 달려가다가도
도중에 나비를 발견하면 방향을 바꾸어 나비를 쫓는다.
그렇게 나비를 따라가다가도 길가에 핀 꽃이 있으면
나비는 잊어버리고 온 관심을 꽃으로 돌린다.
아이는 심각하지 않다. 단지 진지할 뿐이다.
아이가 어떤 것을 마음에 두면
그는 전체적으로 그것과 함께 있게 된다.
그것이 진지함이다. 나비와 개를 잊어버리면
꽃이 모든 것이 된다.
순연(順緣)하는 그 마음이 진지한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관심을 하나에 집중할 때 그것이 진지함이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일심(一心)이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얻기 위해서
관심을 하나의 수단으로써 사용할 때 교활하게 된다.
그대는 단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단으로써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 길이 곧 목적지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그 길이 곧 목적지이다.
목적지가 같아도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곳이 바로 목적지이다.
내가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바로 목표이다.
바로 <이 순간> 나의 삶 전체가 나에게로 수렴한다.
어디 다른 곳으로 갈 목적지가 없다.
그대는 이 순간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겨야 한다.
선가의 말을 빌리면
“전체적으로 살고, 전체적으로 죽는다”라는 의미다.
무상을 체득한 사람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는다.
단지 아침 산책을 할 뿐이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그대는 직장에 갈 때 똑같은 길을 지나간다.
그리고 아침 산책을 한다.
길도 같고 집도 같고 모든 것이 같다.
그대 자신도 같고 다리도 같다.
그러나 아침 산책을 할 때 모든 것이 달라진다.
무상의 실체를 알지 못한 사람은
항상 어느 곳으로 가고 있다.
직장이나 가게 등등 항상 목적지가 있다.
그러나 무상을 아는 사람에게는
아침 산책과 같이 어떤 목적지가 없다.
오늘 걷는 이 길이 어제 걷든 그 길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사랑은 목표 지향적이다.
세속적인 사랑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반연하여 오욕의 늪에 빠진 사람이다.
그 목표가 종교이든 무엇이든
심지어 신이더라도 목표 지향적이다.
그러나 비세속적인 사람은 목표 지향적이 아니다.
그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지금, 그리고 여기>로 수렴된다.
바로 이것이 무한이 된다.
모든 길을 통해서 그 무한으로 가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도달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것은 무한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곳에 도달할 때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면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스스로 싫증을 내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한한 것은 계속 진행되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무한은 하나의 무한에서부터
또 다른 무한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어 나간다.
무한은 정체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한이다.
정체되지 않는 것은 곧 무상이다.
무상은 변화이기 때문이다.
머물지 않는 것이 머무는 것이 무상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은 불생불멸이라고 한 것이다.
무상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서 살아나는 것이다.
진지함이란 무심(無心)과 상응하는 말이다.
무심은 구하는 바가 없는 것을 말한다.
구하는 바가 없으니 얻을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다는 이 말은
내견(內見)과 외견(外見)을 초월했다는 말이다.
내견이란 안으로 망상이 있다고 보는 것이요,
외견은 밖으로 밖으로 여러 가지 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見)이 없게 되면 얻을 것이 없게 되고,
얻을 것이 없어지면 마음의 반연이 없어지고
반연이 없어지면 마음이 조복 되어 무심해지는 것이다.
마음의 조복이 무심이요,
무심은 일심으로 움직이니 곧 진지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들은 무심을
불성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을 조복하지 못하면
그 마음은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중생심(衆生心)과 불성(佛性)은
물과 얼음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세 가지 독에 중독되면 그것은 중생심이 되고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순수해지면 그것은 불성이 된다.
세 가지 독이란 무엇이란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을 말한다.
삼독은 무상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 물은 얼음이 되고 여름이 되면 얼음은 물이 된다.
얼음을 없애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물이 남아 있지 않다.
중생심을 제거하면 거기에 불성은 없다.
얼음의 본성이 바로 물의 본성이다.
무상을 아는 자 불생불멸을 알게 되고
불생불멸을 깨달은 자가 부처가 되기 때문이다.
부처란 무엇인가?
불성을 자각한 자가 바로 부처가 아닌가?
그러므로 부처는 무상을 깨달아 해탈을 얻고
중생은 무상에 마음이 반연하여 육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성인 마음은 부처도 중생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깨어 있음을 만들어 내기에 중생은 부처를 낳는다.
그리고 깨어 있음은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만들어 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킨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중생에 의해서 해탈된다.
그래서 모든 부처는 미혹을 아버지로 삼고
탐욕을 어머니로 삼는다.
미혹과 탐욕은 중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생을 아는 자, 사(死)를 피하지 않고,
사(死)를 아는 자, 생(生)을 피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생사가 일여(一如) 하니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러나 한 번만이라도 진정으로 무상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그대 자신의 마음은 텅 비게 될 것이고,
그대가 “나”라고 주장하는 어떤 형체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진실로 미혹에서 깨어나
양쪽을 모두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무상을 체득했을 때 불생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한 번 미혹과 깨어 있음을 초월할 때
이쪽도 저쪽 언덕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에게 허무한 감성적인 느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래에게는 이쪽 언덕도 저쪽 언덕도 없다.
그는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
지식과 깨달음을 구하는 이는
강물의 흐름 중간에 있다. 중생은 이쪽 언덕에 있다.
그리고 저쪽 언덕에는 불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은 누구인가?
그는 구도자이다. 그는 보았지만,
부처와 같이 무상을 진실로 체증(體證)한 자는 아니다.
중생은 누구인가? 무상을 체득지 못한 자이다.
그러므로 중생에게는 허무가 일어나고,
부처에게는 해탈과 열반의 꽃이 피는 것이다.
기억하자. 허무한 무상은 중생에게 일어나고,
불생불멸의 무상은 깨달은 자만이 체득할 수 있음을.
우리가 삶에서 지나간 시간을 생각할 때
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 그럴까? 왜 부질없이 한(恨)이 서리고,
후회가 일어날까?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일까?
과거, 현재 미래 즉 신간의 모든 개념이
우리의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 존재, 즉 제한된 인생,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하는 육체적 요구,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이용해야만 하는
자연계의 본질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죽어야 할 몸이기에 우리는 시간을 무시할 수도,
시간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밤과 낮, 잠과 깨어남, 성장과 노화의 리듬,
노동으로써 세계를 세울 필요성과
자신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 이 모든 요인은
우리가 살기를 바란다면
시간을 ‘존중하도록’ 강요하는 것들이다.
육체는 또한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도록 바란다.
그러나 시간을 “존중하는 것”과
시간에 ‘굴복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진지한 마음에서는 시간을 존중하지만, 시간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의 관념에 매일 때
우리는 ‘존중이 아니라 굴복하게 된다.’
시간에 집착하는 자는 물건만이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물건이 될 수밖에 없다.
시간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시간은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진지한 마음이라면 시간은
그때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지배자나 우상이 되지 못한다.
오늘날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자신을 둘러보라.
시간은 우리의 최고 지배자가 되고 있다.
상품을 만들어 내는 공장에 가 보라.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정확하게
‘시간대로’ 진행되기를 요구한다.
게다가 시간은 시간일 뿐만 아니라,
“시간은 돈”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시간의 노예가 되고
또 돈의 노예로 전락하여 그저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굴러가도록 만들고 있다.
단지 기계는 최대한으로 이용되어야 하므로
기계는 노동자에게 진정한 삶을 생각할 시간과
노력을 앗아가고 있다. 과학이 지배하는 첨단산업사회는
기계를 통하여 시간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시간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가 시간에 굴복할 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시간에 매이고,
시간에 쫓겨 다니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인생은 불생불멸의 삶이 아니라
공허하고 허무한 생멸의 세계로,
윤회의 삶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가져다주는 욕망의 충족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서 진지한 자라면
그는 시간 속에 있지만 시간에 매이지 않고
진지한 마음으로 불생불멸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마치 예술가나 작가가 시간 속에 창작을 하지만
그 창작된 작품은 시간을 벗어나 있듯이.
불생불멸의 삶이란 무엇인가?
찰나 속에 영원으로 사는 삶이다.
그것은 중생이면서 부처의 세계요,
영원한 열반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사람의 느낌을 불교는 수(受)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에는 3가지의 수(受)가 있다.
순경(順境)에서 받아들이는 낙수(樂受)와
역경(逆境)에서 받아들이는 고수(苦受)와
순경과 역경도 아닌 것에서 받아들이는 사수(捨受)다.
무상(無常)의 참 의미를 깨친 자는
유(有)에서도 유(有)에 치우치지 않고,
공(空)에 있어서도 공(空)에 치우치지 않으며,
즐거움에서도 즐거움에 치우치지 않고,
괴로움에서도 괴로움에 치우치지 않으며,
그렇다고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데에 치우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무상(無常)의 참 의미를 알고
무상한 삶을 사는 길은
이 마음의 조복(調伏)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심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찰나 속에 영원을 사는 삶,
그것이 무상을 깨달야야 하는 참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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