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시게, 잠시 쉬었다 가세나.
2024. 5. 22. 10:12ㆍ잠언과 수상록
여보시게, 인생 살아보니 어떻던가?
온 곳도 알 수 없고, 가는 곳도 알 수 없는 바람과 같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한 조각 뜬구름 같지 않든가?
고작해야 하룻밤 묵었다가 다시 길을 나서야 하는 나그네처럼
그리 살다가 가는 부질없는 삶이 우리네 인생인데
서두를 것도, 미련 둘 것 무엇이 있겠는가?
인간사(人間事) 모두가 모였다 흩어지는 한 조각 뜬구름 같다면
사랑도 미움도, 부귀영화도, 시비선악도 지나고 보니
모두가 다 부질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부질없은 그것들을 위해 무엇 때문에
아웅다웅하며 안달해가며 목을 매고, 살아야 할까.
여보시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
부질없는 욕망으로 여행자처럼 살다 가고 싶은가?
여행자는 뚜렷한 목적과 목적지를 갖고 길을 떠나는 자가 아닌가?.
그러나 삶의 길에 무슨 목적이 있고, 가야 할 목적지가 있던가?
마음이 지어낸 탐욕과 욕망을 벗어놓으면 무엇이 남든가?
그대의 삶이 만약 여행자의 삶이라면 목적지를 갖게 되고,
거기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이 솟구치게 되고,
거기에 대해 준비도 필요하다.
그리고 시간, 방법, 기술과 지식, 미덕, 인격 등
많은 준비와 계획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길을 나선 후에도 항상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걱정하게 될 것이다.
도달할 수 있을까? 없을까? 다시 길을 잃지는 않을까?
이러한 두려움 걱정 근심들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목적지가 미래의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는 모두 미래의 일이다.
그러나 길이 목적지일 때 거기에는 어떠한 미래도 없다.
가야 할 곳이 없으니 시간은 사라진다.
내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나그네는 가야 할 목적지가 없는 자다.
왜 가야 하는지 그 목적이 없으니 시간이 사라지고
내일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지가 없으니 머무는 그 순간이,
머무는 그곳이 바로 유토피아가 된다.
그러므로 삶을 나그네처럼 그렇게 산다면
미리 준비할 것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을 것이다.
어느 여행자의 글을 보니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大聖堂)에는
세 가지 아치문(門)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첫 번째 문에는 장미(薔薇)꽃이 새겨져 있는데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는 글귀가 있고,
두 번째 문에는 십자가(十字架)가 새겨졌는데
“모든 고통(苦痛)도 잠깐이다.”라고 쓰여 있고,
세 번째 문에는 “오직 중요(重要)한 것은 영원(永遠)한 것이다.”
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이야 바람과 같은 것이지만
영원(永遠)이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삶이란 부질없고, 환(幻)과 같고, 공(空)한 것이기에
부동(不動)의 이상향을 구가하는 길이
영원을 찾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곧 수행자들이 찾는 구도(求道)의 길,
도의 길을 말함이니 종교적인 말로 인용하자면
이 길은 힌두의 <시바>, <브라흐만>이요,
회교도는 <알라> 신을, 기독교는 <하느님>,
불교라면 <해탈>, <열반> <필경공>이요,
노자의 말을 빌리자면 <도>라는 것을 찾는 길인데
이는 이름만 다를 뿐 그 궁극적인 목표는
모두 <영원>을 구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석가모니불 이전 과거칠불(過去七佛) 중
제 제4존인 구류손불(拘留孫佛)의 이런 게송이 있다.
몸의 실상이 없음을 보는 것이 곧 부처를 보는 거요
마음의 나타남이 환상과 같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부처를 다 아는 것이로다
심신의 본성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사람이 곧 부처님과 더불어 무엇이 다르리오.
見身無實是見佛 (견신무실시견불)
了心如幻是了佛 (료심여환시료불)
了得身心本性空 (료득신심본성공)
斯人與佛何殊別 (사인여불하수별)
옛 고승들은 도(道)의 길을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말한다.
도(道)에 들어가는 문이 없다는 말이다. 길 없는 길이란 뜻이다.
모든 길이 다 문이 된다는 의미다.
삶이 공허함을 알았다면 중생의 길이 따로 있고,
여래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 간택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행자가 목적지를 정하는 것과 무애 다를까?
삶의 길 그러하다. 가야 할 길이 없다. 존재 자체가 길이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가 삶이기 때문이다.
그 길 위에 선 자는 모두가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삶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그네가 길을 떠나면서 여행자로 변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삶을 찾는다면 진정한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나그네의 길은 가야 할 목적지가 없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없다는 말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길과 목적지가 곧 하나임을 의미한다.
만일 그대가 나그네가 되어 그 길 위에 있다면
그대는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길과 목적지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여행과 목적이 일치하기 때문에, 즉 여행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두를 것도, 안달할 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길 없는 길이란 도의 의미이며
존재 자체가 삶이란 의미다.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을 의미한다.
즉 길 자체가 목적이며 수단이 곧 목적이고
그밖에는 다른 어떠한 목적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길이 목적지일 때 거기에는 어떠한 미래도 없다.
오늘 갈수 없으면 내일 가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파괴되고 시간은 사라진다.
내일이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여행자라면 목적과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미래에 살고 있는 것이 된다.
삶이란 길 위에 있는 지금 바로 그 순간이 중요한데
여행자는 가야할 길이 있기에 언제나 미래라는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움막을 짓고 살고 있는 자다.
@미래라는 것은 마음이 지어낸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것은 목적지와 길을 분리할 때 존재 한다.
그것이 곧 욕망의 발원지가 된다.
그때 길은 수많은 이정표를 세우고,
첫째 둘째 셋째 등 수많은 단계로 분리되어
결국 길과 목적지가 분리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그대 마음이 개입될 수많은 공간이 생기게 된다.
도(道)는 그대 마음의 어떠한 공간도 마련하지 않는다.
선가(禪家)의 말을 빌리자면
간택심(揀擇心)이 들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길 떠나는 나그네가 무슨 계획을 세운다는 말
들어본 적이 있는가?
들어가는 문이 없는데 어디서 나갈문을 찾는단 말인가?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존재하는 것은 이 순간뿐이다.
오로지 현재 이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목적이 없으므로 욕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도달할 어떤 것도 없다.
나그네는 길을 가는 것이지 언제,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나그네의 삶은 목적이 없다. 목적지도 없다.
목적이 없다면, 도달할 곳이 없다면 모든 속임수와
기교는 사라지고, 모든 받침대는 사라진다.
어떤 철학적 논리나 이념도 살아 진다.
그때 그대에게는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모든 시간이며
바로, 이 순간 그대는 자유롭다. 그것이 나그네의 삶이다.
욕망에서 벗어난 마음은 바로 자유 자체가 된다.
욕망이 없는 마음 종교적으로 보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어떠한 계획도 바램도 갖지 않는 마음이
바로 바다에 도달하게 된다.
삶은 분리되지 않은 전체 즉 하나로 여길 때
진정한 도의 길에 든 자가 된다.
나그네는 어제 걸어온 길과
내일 걸어가야 할 길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단지 길을 걸어갈 뿐이다.
삶이란 논리나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삶은 존재 자체가 목적이요 목적지이다.
목적지 없이, 구애됨이 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탈속(脫俗)이니 무애(無碍)의 삶이다.
자유로운 삶이 구경(究竟)의 영원(永遠)이 된다.
경전의 말을 빌리면 무주(無住)의 삶이요, 무소유(無所有)의 삶이다.
중생이란 것도, 여래라는 것도 분별없이 살 수 있다면
영원이란 말이 왜 필요할까?
철학과 논리를 벗어난 걸림이 없는 삶. 그것이 나그네의 삶이다.
<대도무문>의 길을 걸어가는 도의 길이요,
그것이 나그네의 삶이 아니겠는가.
여보시게, 인생살이 딱히 해야할 것도,
가야 할 곳도 없는데 서두를 것 무애 있겠는가.
잠시 마음의 짐 내려놓고 쉬었다 가세나.
떠오르는 아침의 해도 아름답고 지는 저녁노을도 아름답지 않은가?
'잠언과 수상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상소고(無常小考) 5-1. 무상한 인생 (0) | 2024.12.21 |
---|---|
밀라레파(Milarepa) 의 금언(金言) (4) | 2024.10.16 |
강물에 떠가는 빈 배처럼 삽시다. (2) | 2023.03.14 |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삶 (0) | 2021.02.07 |
예단(豫斷)하지 말라. (0) | 2020.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