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제39구 조계의 길

2024. 12. 11. 20:18증도가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부터는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原文>

自從認得曹溪路 (자종인득조계로)

了知生死不相關 (요지생사불상관)

 

부처님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맥(法脈)은

가섭에서 아난을 거처 28대 달마대사에 이르고

달마대사에서 육조(六祖))에 이르러

조계(曹溪)의 선법이 꽃을 피웠다.

“조계의 길을 인득하고는

생사와 상관없음을 알았다.”는 이 말은

영가 스님이 육조(六祖)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을 때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일화를 남명법천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사는 『열반대경(涅槃大經)』을 보다가

깨우쳐 들어갔는데,

그러고는 조계(曹溪)로 가서 육조(六祖)의 인가를 구하였다.

대사는 도착하던 날 마침 6조 스님은

법상에 앉아 법문을 했는데,

선상(禪床)을 세 번 돌고 석장을 한 번 내리치면서

그 앞에 우뚝 섰다. 6조가 말했다.

“무릇 사문은 3천 가지 위의[三千威儀]와

8만 가지 세행[八萬細行]을 갖춰서

하나하나의 행(行)에 이지러짐이 없어야 하는데,

대덕(大德)은 어느 곳에서 왔기에

크나큰 아만(我慢)을 일으키는가?”

대사가 말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중대하니,

무상(無常)하고 신속합니다.”

6조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무생(無生)을 체득해서

신속함이 없는 도리를 깨치지 못하는가?”

대사가 대답했다.

“체득하니 곧 무생이라서

본래 신속함이 없음을 요달했습니다.”

6조가 말했다.

“그러하고 그러하도다.”

잠깐 사이에 예를 올리고 하직 인사를 드리자,

6조가 말했다.

“돌아가는 일이 중대하고 신속한 것이더냐?”

대사가 대답했다.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데

어찌 신속함이 있겠습니까?”

6조가 물었다.

“움직이지 않음을 누가 아는가?”

대사가 말씀드렸다.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分別)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6조가 말했다.

“그대가 무생의 뜻[無生意]를 깊이 체득했도다.”

대사가 대답했다.

“무생인데 어찌 의식[意]이 있겠습니까?”

6조가 말했다.

“의식이 없다면 어떤 것이 분별을 일으키는가?”

대사가 대답했다.

“분별하더라도 의식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6조께서 찬탄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육조 스님이 이와 같이 인가(印可)를 하고

그가 깊이 깨달은 것을 찬탄하자

곧바로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하였는데,

6조가 잠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기 때문에

일숙각(一宿) 스님이라고 후대에 이칭(異稱)이 따랐다.』

 

고인(古人)들은 영가 스님이 깨친 대목을 두고

말하기를 앞의 법담에서,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 하지 못하는가?" 

하는 말끝에서 깨쳤다고 말한다.

조계로(曹溪路)는

조계(曹溪)에서 유래하는 도(道)를 말하며,

조계는 육조(六祖) 혜능(惠能) 대사의 별호이기도 하다.

영가 스님이 자기 스스로 조계의 길을 확실히 깨치고 난 뒤에

자기가 평생 연구했던 천태종을 버리고

육조 스님의 조계 선종의 입장에서 법문하였고 저술도 하였다.

 

생사와 상관없음을 알았다는 것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체득했다는 의미다.

無生을 요달(悟達)하는 것은

佛地인 묘각(妙覺)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무생(無生)은 분명하게 참마음을 지켜서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경전은 말한다.

 

남명천화상은 이렇게 주석했다.

『스스로 조계(曹溪) 6조(祖)에게 가서

심지법문(心地法門)을 인증(引證)한 이후로는

일체제법(一切諸法)이 태어남도 없고[無生],

소멸함도 없고[無滅], 가는 것도 아니고[無去],

오는 것도 아님[無來]을 요달해 알았다.

만약 이 법문(法門)을 깨달으면

생(生)과 사(死)가 본래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료히 깨치게 되니,

이 때문에 “생과 사가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了知生死不相關]”고 한 것이다.

만약 이렇게 체득하면 묘용(妙用)이 다함이 없어서

몸 전체로 사물에 감응하니[應物], 걸어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행위하고,

거동(擧動)하는 것이 법도에 맞는 행이 되고,

굽어보고 올려다봄에

모두가 대적정(大寂定) 가운데 있으면서

분명하고 분명하게 수용하지 않음이 없다.

이어지는 다음에 나오는 글(제 40구)에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