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제38구 선지식과 참선

2024. 12. 9. 13:12증도가

강과 바다를 유람하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스승 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니라

 

<原文>

遊江海涉山川(유강해섭산천)

尋師訪道爲參禪(심사방도위참선)

 

『법화경』 <묘장화엄왕본사품>에 이른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 만나기 어려움이 우담발라꽃과 같으며,

또 애꾸눈의 거북이 바다에 뜬 나무 구멍 만남과 같습니다. ...

선지식을 만남은 그 선지식이

능히 불사를 지어 보여 주고 가르치며

이롭게 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들도록 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法華經 妙莊嚴王本事品>

 

부처님과 선지식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본문에서는 「강과 바다를 유람하고 산과 개울을 건넌다.」

라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선지식을 만남으로써 불과(佛果)에 이를 수 있기에

선지식을 만남을 강조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천인사(天人師), 부처, 세존(世尊) 등으로 불리는 듯

불가(佛家)에서의 대 스승은 당연히 부처님을 가리키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스승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의 지식(知識)은 그 마음을 알고,

그 형상(形相)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知人은 붕우(朋友)의 뜻이지만,

많이 알고(博知: 다양한 지식),

박식(博識:견문이 넓어 많이 암)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나를 선도(善導)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善)은 나에게 이익됨을 말하고,

도(導)는 나를 선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법화문구4(法華文句四)』에

「이름을 듣는 것이 知가 되고,

形相을 보는 것이 識이 된다.

이 사람이 나의 보리도(菩提道)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임으로 선지식이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우리의 사회는 인터넷시대라 지식이 난무하고,

선지식을 자칭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디.

선지식을 만남도 대 인연이지만

선가(禪家)에서는 그릇된 선지식의 만남을

조사님들은 이렇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소소영영(昭昭靈靈: 밝고 신령함)한

영대(靈臺: 신령스러운 곳, 마음을 의미)의 지성이 있어서

능히 보며 능히 듣고 오온의 신전(身田:육신) 속에서

주재(主宰)를 짓나니 이렇게 하여 선지식(善知識)이라 한다면

크게 사람을 속임이니, 만약에 소소영영을 인득(認得)하여

너의 진실을 삼는다면 갑수(瞌睡: 앉아서 졸음)할 시에는

어째서 소소영영이 없어지는가.

만약 조수할 때에 없으면

이것은 도적을 오인하여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으니

이는 생사의 근본이며, 망상의 연기이다.」

<현사비전등록:玄沙備傳燈錄>

 

쉽게 풀이하면 아무리 깨달아 지견이 높고

훌륭한 것 같아도 실지 경계에 있어서

깊은 잠이 들어서 여전히 캄캄하면

이는 망식의 움직이지 실제로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도자는 올바른 선지식을 만나

반드시 자나 깨나 한결같은(寤寐一如))

실지 경계를 뚫고 지나야만

바로 깨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나 깨나 한결같음을 선가에서는

오매일여(寤寐一如)라고 하는데

이는 몽중위(夢中位)와 숙면위(熟眠位) 2가지가 있습니다.

꿈속에서도 일여(一如)한 몽중위(夢中位)는

제6의식의 영역으로서 교가(敎家)의 제7지에 해당하고,

꿈도 없는 깊은 잠에서도 일여(一如)한 숙면위(熟眠位)는

제8아뢰야식의 미세한 망상을 영원히 여읜

부처의 지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선지식은 이 대인연(大因緣)이다,

화도(化導: 덕으로 교화하여 이끔)하여

견불(見佛)할 수 있도록 함을 말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선가(禪家)에서 참선을 닦는다고 함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심오한 경계에서

활연히 크게 깨쳐서 본래면목인 자기 본성을

철저히 보고 무심(無心)과 무사(無事)로

성태(聖胎)를 기르는 수행을 가리킴입니다.

 

남명천화상은 이 귀(句)를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강과 바다를 유람하고 산천과 도로를 건너고 넘으면서

피로하게 남북으로 분주하게 치달리는 것이

별다른 일[別事]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선지식(善知識)을 참방하여

생사의 문제를 결택(決澤) 하기 위해서니,

이른바 “무상하고 신속하니

생사의 일이 중대하다[無常迅速生死事大]”라고 한 것이다. 투

자(投子) 스님은 말하기를

“모든 세간의 사람들이 긴급한 곳에서는

도리어 한가롭고 태만하며,

한가롭고 태만해도 될 곳에서는

오히려 긴급하게 군다”라고 하였다.

만약 생사(生死)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지식을 만나 증상연(增上緣)을 삼아서

자기의 일[己事]을 밝혀야 하므로

실로 소소한 인연이 아니다.

이른바 “청산(靑山)은 장구하게 있지만

선지식은 만나기 어려워라.”라고 말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스승을 찾아서 도를 묻는 것은

참선하기 위해서이다[尋師訪道爲參禪]”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