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제34구 (사무애변)

2024. 10. 11. 08:37증도가

 

종지도 통하고 설법도 통달함이여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아 공에 머물지도 않는다.

 

<原文>

宗亦通說亦通(종역통설역통)

定慧圓明不滯空(정혜원명불체공)

 

종(宗)에 통한다는 의미는

종지(宗旨)에 통달하였다는 의미다.

종지(宗旨)는 제경(諸經)에 설한

주요한 지취(旨趣: 경의 깊은 뜻)를 말한다.

설(說)에 통함은 설법을 말하며 곧 변재(辯才)를 의미한다.

변재(辯才)는 巧妙(교묘)하게

법과 뜻을 말하는 재능을 말한다.

분별하여 4종류가 있는데

경(經)에서는 이를 사무애변(四無礙辯)이라고 한다.

<정영대경소(淨影大經疏>)에 이르기를

「言은 능히 辯이 되고,  語는 能히 才巧이다.

그러므로 辯才라고 한다.」 라고 했다.

<사무애변(四無礙辯)>은 사무애지(四無礙智),

사무애해(四無礙解)라고도 하며,

마음(心) 방향으로는 智, 解라고 하고,

입(口)의 방향으로는 辯이라고 한다.

①법무애(法無礙)은 온갖 敎法에 통달한 것

②의무애(義無礙)는 온갖 교법의 요의(要義)를 아는 것

③사무애(辭無礙)는 여러 가지 말을 알아 통달한 것.

④낙설무애(樂說無礙)는 온갖 교법을 알아서

그 기류(機類)가 듣기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데 自在한 것.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아 공에 머물지도 않는다는 말은

선정과 지혜가 밝아 공에 막힘이 없다는 의미다.

선정(禪定)은 범어의 음사(音寫)로

신역(新譯)에서 정려(靜慮)라 한다.

정려(靜慮)는 심체(心體)가 적정(寂靜)하여

능히 심려(審慮)함을 의미한다.

또 한 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함을 선(禪)이라 하고,

一境이 정념(靜念)한 것을 定이라 한다.

그러므로 <공에 머물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려(靜慮)의 공덕으로 얻어진 구경의 지혜는

모든 희론을 여의었기 때문에

일체 법이 돌아갈 곳[所歸趣]이 없으므로

머물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보리심이상론(菩提心離相論)》은

「공이라고 말한 것은 공이면서도 단멸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유(有)라고 말한 것은 유이면서도 항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사도 없고 열반도 없어서 다 머묾 없는

열반[無住涅槃)에 안주한다.」라고 했다.

지혜(智慧)는 결단(決斷)함을 지(智)라 하고,

간택(簡擇)함을 혜(慧)라고 한다.

 

남명천 화상은 본 구(句)를 이렇게 주해(註解)했다.

「종통(宗通)은 즉 법통(法通)이다.

법은 언설(言說)이 아니고 언설은 법이 아니다.

운문(雲門) 스님이 말하기를

“동해의 잉어를 한 방망이로 후려치니

물동이를 뒤엎은 듯이 비가 쏟아지네”라고 하였다.

천의(天衣) 스님이 말하기를

“산승이 불전을 뒤엎자,

모든 사람 짚신을 거꾸로 신네”라고 하였다.

또 청평(靑平) 스님은 흙을 날랐고,

귀종(歸宗) 스님은 돌을 끌었으며,

덕산(德山) 스님은 학인이 문에 들어오면

곧바로 몽둥이질했고,

임제(臨際) 스님은 학인이 문에 들어오면

곧바로 고함을 질렀다.

이처럼 자비를 드리움에 만약 깨달은 마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밝힐 수 있었겠는가.

모름지기 종지(宗旨)를 환하게 밝히고

본원(本源)을 깊이 통달해서 당장에 종통을 밝힘이

원교[圓]나 점교[漸]와는 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종통(宗通)이라고 말한 것이다.

설통(說通)은 즉 의통(義通)이다.

『십이부경(十二部經)』을 훌륭하게 강설할 수 있고,

명상(明相)과 법수(法數)를 하나하나 요달해 알아서

의심이나 오류가 없으니,

그러므로 설통(說通)이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종지도 통달하고 설법도 통달함이여’라고

말한 것은 법과 뜻[義]을 쌍으로 통달한 것이니,

이것을 모두 통달한 사람을 얻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런데 법문의 후진(後進)들은 그 종지를 밝히지 못하고

서로 시비를 한다. 전(傳)에서 말하기를

“서천(西天)에서는 하천을 나누어서 물을 마시고,

이곳 중국에서는

선사와 강사가 서로를 비난한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법과 뜻의 두 문[法意二門]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규봉(圭峯) 스님은 말하기를

“경(經)은 먹줄과 같아서 삿되고 바른 것을 판정한다.

먹줄은 목수가 아니지만

목수는 반드시 먹줄을 의지해야만 한다.

경(經)과 논(論)이 선은 아니지만

참선하는 사람은

반드시 경론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고덕(古德)은 말하기를

“요즘 사람들은 옛날의 가르침을 보면서도

마음속에 시끄러움을 면하지 못한다.

만약 마음속의 시끄러움을 면하려면

반드시 옛날의 가르침을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전(傳)에서 말하기를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은

반드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영가(永嘉) 대사는 처음에

천태지자(天台智者)의 교관(敎觀)을 모아서 듣고,

후에 지견(知見)을 발명(發明)하여

조계 육조(曺溪六祖)에게 가서 인가를 받았다.

그래서 이 종지를 깊이 밝혔기 때문이다.」고 했고,

 

또 선정과 지혜가 밝아 공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을

이렇게 주해(註解)했다.

「인지(因地)에서는 지관(止觀)이라 하고

과지(果地)에서는 정혜(定慧)라 하는데,

이것이 둘이 아님[不二]을 원명(圓明)이라고 한다.

완전하게 밝은 성품은

소승인(小乘人)이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공에 막히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실로 모든 중생이 무량겁 이래로 무명 번뇌에 취해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오직 무명의 혼침과

산란이 병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인께서

지관의 두 가지 법을 세워 치료하신 것이다.

즉 지(止)로서 산란을 그치게 하면

산란에 즉해서도 고요하고,

관(觀)으로 혼침을 관하면 혼침에 즉해서도 밝다.

그렇다면 혼침과 산란이 전환되어

정(定)과 혜(慧)의 두 법(法)이 된다.

정과 혜가 둘이 아닌 것을 원명(圓明)이라고 하니,

이 원명은 한 가지 법[一法]이다.

이 한 가지 법이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고

한량없는 법재(法財)로서 미묘한 작용이 끝이 없으니,

이는 모두 원명의 화장해(華藏海) 가운데서

수용(受用)하는 것이다.」

@사진: 소림사가 있는 숭산의 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