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제20구 오안과 오력

2024. 8. 1. 15:41증도가

 

오안을 깨끗이 하여 오력을 얻음은

증득해야 알 뿐 헤아리긴 어렵다.

 

<원문(原文)>

淨五眼得五力(정오안득오력)

唯證乃知難可測(유증내지난가측)

 

앞에서 육반신용의 묘(妙)한 작용(作用)을 말했다.

깨달으면 육반신용이 6개로

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원융(圓融)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 공능를 다시 설한 것이 오안(五眼)이다.

깨달으면 오안(五眼)이 열리고

오력(五力)을 성취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먼저 경에서 설하는 오안(五眼)의 의미를 살펴보자.

하나는 육안(肉眼)이니 이는 육신이 소유한 눈을 말한다.

둘은 천안(天眼)이니 色界의 천인 소유한 눈을 말한다.

중생이 선정을 닦으면 얻을 수 있으며

원근(遠近)과 주야(晝夜)와 내외(內外)를 불문하고

모두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셋은 혜안(慧眼)이니 이승의 사람이

진공무상(眞空無相)한 이(理)를

한눈에 쉽게 보는 지혜(照見)를 말한다.

넷은 법안(法眼)이니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고

일체법문의 지혜를 조견함을 말한다.

다섯은 불안(佛眼)이다.

불타의 몸 가운데 앞의 四眼을 갖춘 것을 말한다.

 

이 오안 가운데 혜안은

공제(空諦)의 일체지(一切智)가 되며,

법안은 가제(假諦)의 도종지(道種智)가 되고

불안은 中諦의 일체종지(一切種智)가 된다고 한다.

 

가제(假諦)라 함은 가유(假有)로 나타나 있는

현신(現身)의 相을 아는 지혜의 도리를 말한다.

일체지(一切智)는 모든 법의 총체적 모양을 아는 지혜.

예를 들면, 도화(圖畫: 그림)의 윤곽을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도종지(道種智)는 <지도론>에 말한

삼지(三智) 중 하나로 가제(假諦)의 지혜를 말한다.

일체의 道法을 배워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의 지혜이다.

일체종지(一切種智)란 부분적 모양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예를 들면 도화의 윤곽을 그리고 나서

농담음영(濃淡陰影: 진함과 옅음, 밝고 어두움) 등을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깨달으면 오안이 열린다고 한다.

대승경에서는 이 마음을 깨닫는다면

참으로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올라, 걸음걸음이 삼계를 초월하고

귀가(歸家: 본래면목 자리에 돌아감)해

단박에 의심을 끊는다고 한다.

그러나 깨달음에 의지해 점차 닦아감이 필요하다.

이치로는 단박 깨치나,

사실로는 점차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먼저 깨닫고,

깨닫고 나서는 닦아야 한다(先悟後修) 라고 말한다.

고봉 선사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얼어 있는 연못이 순전히 물인 것으로 알지만

햇빛을 빌어 녹여야 하듯,

범부가 곧 부처인 것으로 알지만

진리(법)의 힘 빌어 익히고

닦아야 (붓다가) 된다.」라고 했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 적셔야,

바야흐로 그 물에 씻는 공로가 나타나고,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이 신령하게 통해

신통과 광명의 작용이 나타난다는 의미다.

 

그 닦음을 말한 것이 五力이다.

오력(五力)이란 37조도품의 하나로,

신(信), 정진(精進), 근념(勤念), 정(定),

혜(慧)의 오근이 증장(增長)시켜

오장(五障)의 세력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1)신력(信力)은 신근(信根)을 증장시켜

모든 사신(邪信그릇된 믿음)을 파(破)하는 것

2)정진력(精進力): 정진근을 증장시켜

능히 몸의 해태(懈怠: 게으름)를 파하는 것

3)염력(念力)은 염근을 증장시켜

능히 모든 사념(邪念: 그릇된 생각)을 파하는 것

4)정력(定力): 정근을 증장시켜

능히 모든 난상(亂想: 어지러운 생각)을 파하는 것

5)혜력(慧力)은 혜근을 증장시켜

능히 삼계의 모든 의혹(諸惑)을 파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부처님들도 여러 생애에 걸쳐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왔다고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에는 근기가 필요하다.

<수심결>에 이르기를

「도를 배우되 선후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되 본말(本末)을 분간 못 하면

이를 일컬어 사견(邪見)이라 하지

수행이라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도(道)의 선후(先後)를 알고,

도의 본말(本末)을 아는 이 경지는

<법성게>에 이르듯 깨닫는 것 외에는

달리 경계가 없다. 경에서 말하기를

“만약 사유심(思惟心)으로

여래원각(如來圓覺)의 경계를 측량해서 헤아린다면,

마치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 하는 것과 같아서

설사 미진겁이 지나더라도

끝내 태울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오직 증득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고

측량하기 어렵다[唯證乃知難可測]’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