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제21구 물속에 달을 어떻게 건져 내랴?

2024. 8. 4. 13:59증도가

 

거울 속의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물속의 달을 붙들려 하나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는가?

 

<原文>

鏡裏看形見不難(경리간형견불난)

水中捉月箏拈得(수중착월쟁염득)

 

거울에 비친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말을 자귀로 분석해 보자.

<무엇을 본다>라는 말은 상(相)이 있다는 말이다.

유상(有相)이란 의미다.

상이 있다(有相)는 말은 조작(造作)의 상이 있고,

거짓된 상(虛假)의 상이 있음을 말한다.

자성이 없이 인연 화합으로 조성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대일경소 1>에서 이르기를

「볼 수 있고 나타낼 수 있는 법을 有相이라고 한다.

相이 있다고 함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거울 속의 형상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허상이라는 의미다. 그 허상을 실제로 보는 것은

우리 마음이 사랑분별로 지어낸,

다시 말해 전도(顚倒)되었다는 의미다.

 

물속을 달을 어찌 붙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자.

물속의 비친 달그림자를 실제로 알고

잡으려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전도(顚倒)된 마음이다.

 

전도(顚倒)란 무상(無常)을 常이라 하고,

苦를 樂이라고 하는 것같이

본래사리(本眞事理: 본래 진실한 사물에 대한 도리) 에

반대되는 망견(妄見)을 말한다.

이는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무명(無明)에 끌려다닌 까닭에

事理를 거꾸로 본 것이다.

<원각경>에 「일체중생이 무시이래(無始以來)로부터

갖가지 전도함이 마치 미혹한 사람이

四方을 잘못 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고,

<유마경 관중생품>에서는

「허망한 분별은 전도망상(顚倒妄想)이 근본이 된다.」

라고 하였고, 주(註)에서는

「什(집: 구마라집을 말함)이 말하기를

有無의 見이 法相에 반대되는 것을 전도라 한다.」

라고 하였다. 또 <종경록78>을 보면

「顚倒 이것이 번뇌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경을 보면 부처님의 이런 비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뱀을 잡아먹으려고

곳곳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뱀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손으로 그 꼬리를 붙잡았는데,

뱀은 도리어 그 손을 물고 말았다.

독이 온몸에 퍼져서 그는 곧 죽고 말았다.

그가 노련하게 뱀을 붙잡지 않았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법을 깨닫는다는 것은

법의 본말(本末)과 법의 전후(前後)를 깨닫는 것이다.

범부들은 어리석어 위와 같이 전도망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인 것을 진실이 아니라고 고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오안(五眼)을 말하고,

오력(五力)을 말하는 것은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삿된 생각 즉 전도된 망견을 근본부터 잘라내는 길은

오직 사랑분별로 성취될 수 없고

깨달아야 한다고 앞에서 말했다.

 

또 <(승기율(僧祇律)>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과거세 어느 때에 바라나(波羅奈)라는 성(城)과

가시(伽尸)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5백 마리의 원숭이가 있었다.

숲속을 유행하다가 한 그루의 니구율수(尼俱律樹) 밑에

당도하였는데, 나무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 속에

달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때 우두머리 원숭이가

이 달그림자[月影]를 보고 함께 있는 모든 원숭이에게

‘달이 오늘 죽어서 우물 속에 떨어졌으니

마땅히 함께 꺼내어서 세간(世間)이

긴 밤의 어둠에 덮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어떻게 하면 꺼낼 수 있는가를 함께 논의하였다.

이때 우두머리 원숭이가 말하기를

‘내가 꺼내는 법을 안다.

나는 나뭇가지를 붙잡을 테니

너희들은 내 꼬리를 잡아라.

번갈아 가면서 서로의 꼬리를 잡고

이으면 꺼낼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모든 원숭이가 우두머리의 말대로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붙잡고 내려가는데,

물에 조금 미치지 못했을 때

연결된 원숭이들은 무겁고 나무는 약해서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모든 원숭이가 우물물 속에 떨어졌다.」

 

아침이슬과 같은 덧없는 중생의 삶,

전도망상의 숲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번뇌와 고통의 나락 속으로 떨어질 뿐이다.

 

<법구경>에 이르듯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로한 사람에게 길은 멀다」 라고 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생과 사는 아득할 뿐이다.

공허한 분별망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른 법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명천화상은 이를 본구를 이렇게 해설했다.

「비록 거울 속의 형상은 볼 수 있지만

물속의 달그림자는 붙잡을 수 없다.

진실로 세상 사람들은 이 깨달음의 성품[覺性]을 등지고

그 영상(影像)을 인정하는 바람에

생사의 바다에 유랑하면서 머리를 내밀었다

머리를 빠트렸다. 목전의 경계에

깊이 탐착하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우경(賢愚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밝은 달밤에 여러 원숭이가

나무 옆에 있는 우물가에서 홀연히

달그림자를 발견하자 즉시 서로 번갈아 가면서

우물 속으로 내려가 달을 붙잡으려 하나

끝내 붙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진실로 일체중생이 외연(外緣)을 쫓아가면서

근본을 돌이키려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물속에서 달을 잡으려 하니

어찌 붙잡을 수 있으랴[水中捉月爭拈得]”라고 한 것이다.」

 

@사진: 두륜산 대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