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제19구 육반신통은 공이며 비공이다.

2024. 7. 31. 11:09증도가

 

6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지 않으며

한 덩어리 둥근 광명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네!

 

<原文>

六般神用空不空(육반신용공불공)

一顆圓光色非色(일과원광색비색)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수심결>에서

「삼계(三界, 욕계· 색계· 무색계)의 불타는

번뇌(극심한 괴로움)는 마치 불난 집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오래 머물러

오랜 고통을 감수(甘受)하는가.

그 윤회를 면하는 길은 붓다의 깨달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만약 붓다를 찾으려면

이 마음이 곧 붓다이니,

마음을 어찌 이 몸 떠나 멀리서 찾을 것인가.」라고 했다.

진심을 찾는 것은 대승이나 소승이나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수행의 방법에 차이가 날 뿐이다.

영가스님은 그 찾아가는 길을 앞에서

마니주와 여래장으로 설명했다.

마니주와 여래장이란 본래 내 마음인 진심(眞心)이요,

보리심이요, 진여 불성을 말한다.

그러나 이를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은 신비한 것도

신비하지 아니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중생의 본마음은 그 청정함이 객진번뇌에 가려져 있을 뿐

그것을 걷어내면 청정함이 그대로 드러날 뿐

특이한 것도, 신비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본 구(句)는 진심의 본래 공능(功能),

진여 불성의 공능을 대승의

불이문(不二門)으로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곧 제법실상의 의(義)와도 상통한다.

 

六般神用(육반신용)이란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인연으로 하여 방해되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자유자재인 것을 말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보고, 듣고, 웃고, 말하며,

혹은 성내거나 기뻐하거나 옳다 그르다 하는

갖가지의 행위와 동작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무엇이 시킨 것도 아니다.

육근이 육경을 통해 일어켜 육식을 지어내니

이를 육반신용이라고 한 것이다.

신비스러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신용(神用)이고 한 것이다.

다른 표현을 하면 묘용(妙用)이란 의미다.

신비한 묘한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용은 깨닫고 보면

육신(肉身)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본심의 묘한 작용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진심묘용(眞心妙用)이라고 하고

진여대용(眞如大用)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심이 곧 진여이기 때문이다.

 

육근(六根)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말하고,

육경(六境)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말한다.

이 육근이 육경을 대상으로 하여 식(識)이 일어나는데

이를 육식(六識)이라고 하고 또 육진(六塵)이라고 한다.

 

경(境)이란 말과 진(塵)이란 말의 쓰임을 보면

범어(梵語)에서는 근(根)의 대상은

경(境, visaya)이라 하고, 식(識)의 대상은

진(塵, artha)으로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불교 경전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四大가 화합하여 오온이 성립되고 육근은 오온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인연화합으로 지어진 것은 자성(自性)이 없다.

마찬가지로 근(根)의 대상인 육경 또한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무자성인 근(根)이

무자성인 경(境)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식(識) 또한 자성이 없는 것이다.

경(境)이 사라지면 식(識)도 사라진다.

그림자는 나무를 따라다니지만,

나무가 사라지면 그림자는

당연히 사라진다. 공(空)인 것이다.

 

그러나 식(識)으로 말미암아

6진(塵)이 나타남과 비슷하므로

중생들은 6진(塵) 없는데

6진(塵)이 있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러므로 不空이다. 신기루를 예로 들어보자.

신기루는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상을 보게 되는 것은 눈(根)이

형상을 대상(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안식(眼識)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空이면서 공이 아닌 것(不空)이다.

또 다른 예를 보면 눈에 병이 있거나

안근(眼根)이 착란을 일으키게 되면

물건이 없는 중에서 제2의 달과 같은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後句(후귀) 한 덩어리 둥근 밝은 광명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라는 말 또한

不二門(불이문)을 말하고 있다.

<一顆圓光(일과원광)>이란 말은

<一顆明珠(일과명주)>라는 말에서 인용된 것 같다.

명주(明珠)를 원광색(圓光色)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금강경>을 보면

「형상을 지닌 것은 모두 허망하다(凡所有相皆是虛妄)」

라고 했다. 일체가 허망하다면(無)

이는 단견(斷見)에 떨어지고,

허망하지 않다면(有) 상견(常見)에 떨어진다.

그러나 일체제법은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다.

단견도 아니고 상견도 아니다.

물질(色)이 모인 덩어리를 색온(色蘊)이라고 한다.

빛도 마찬가지다. 중생의 눈으로 보면

하늘에 해도 있고 달도 있다. 나도 있고 너도 있다.

실체(자성)가 없지만 내부에(관념으로) 존재하는

사물의(닮은꼴의) 모습[內塵相]’이

마치 외재(外在)하는 것처럼 나타나서

‘식의 대상[識塵]’이 된다.

식(識)이 그것과 ‘비슷한 것(닮은꼴의 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유식에서는 이를 내진상(內塵相)이

식(識)의 소연연(所緣緣)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

경전의 말로 풀이하면

「제법은 공하기 때문에 가유(假有)가 되지 않고

가(假)하기 때문에 실공(實空)이 아니다.

공제이기 때문에 실유가 되며,

가제(假諦)이기 때문에 가유(假有)가 된다」라는 의미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중이 현사(玄沙)에게 묻기를

“들으니, 화상(和尙)이 말씀하시기를

‘시방세계가 일과명주(一顆明珠)라고 말씀하셨는데

학인(學人)은 어떻게 알아야 합니까?’ 하니 현사는

‘온 시방세계가 일과명주인데 알아서 무엇 하느냐?’고 했다.

그 이튿날 현사가 그 승을 만나자, 그 승에게 묻기를

‘온 시방세계가 일과명주라고 한 것을

그대는 어떻게 아느냐?’ 되물었다.

그러자 그 승(僧)은

‘온 시방세계가 일과명주이거늘 알아서 무얼 합니까?’라고

지난번 현사가 말한 그대로 꼭 같은 답을 했다.

현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대가 흑산(黑山) 아래 귀굴(鬼窟) 속에서

활계(活計)를 지을 줄 알았노라.’ 말하였다.

선어(禪語)에서

「처처(處處)가 도량(道場)이요

물물(物物)이 부처인데

어디서 부처를 찾느냐?」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남명천화상은 본 구를 이렇게 풀이했다.

『이 마니주(摩尼珠)는 구슬에

여섯 개의 구멍이 있는데 6근(根)을 비유한 것이다.

미혹으로 인해 6적(賊)에게 스스로

가보(家寶)를 약탈당하고, 소유하고 있는 한량없는

공덕과 법재(法財)를 모두 6적에게 도둑맞는다.

만약 이 사실을 깨친다면

여섯 가지 신통묘용[六般神用]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작용이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입에 있으면 말하고,

발에 있으면 달려서 그 작용이 다함이 없다.

“공이면서 공이 아니다”라고 한 것을 말해보자.

이 오묘한 작용[妙用]은

상대적인 유(有)ㆍ무(無)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만약 도(道)가 있다고 말하면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만약 없다고 말하면 성인은 이것으로 인해 신령스럽다.

이 때문에 ‘공이면서 공이 아니다[空不空]’고 한 것이다.

“한 덩어리 둥근 광명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一顆圓光色非色]”고 한 것을

말해보자. 이 보배 구슬이 불처럼 빛나고

신령스럽게 밝아서 시방세계를 비추기 때문에

진색(眞色)은 형체가 없으면서도

대천세계를 무성하게 벌림을 알 수 있다.

고덕(古德)이 말하기를

“푸르고 푸른 비췻빛 대나무는

모두가 진여(眞如)이고,

울창하게 피어 있는 노란 국화는

반야 아님이 없도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한 덩어리 둥근 광명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