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제13구 나무인형에 무엇을 묻는가?

2024. 7. 24. 14:48증도가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보라

부처를 찾아 공 베풂을 어느 때에 이룰 수 있겠는가.

 

<原文>

喚取機關木人問(환취기관목인문)

求佛施功早晩成(구불시공조만성)

 

<자귀 해설>

機關木人(기관목인)은 나무 인형을 말합니다.

꼭두각시나 허깨비라는 의미입니다.

求佛(구불)은 부처를 구한다는 말인데

이는 부처를 찾는다, 부처를 만난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를 만난다는 말은

깨달음(菩提)을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早晩成(조만성)의 早는 아침을 의미하고,

晩은 저녁, 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미래나 때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의미로 쓰인 말이 아닙니다.

이는 字句를 잘못 해석한 것으로 이렇게 되면

목인형에게 물어봐라. 그러면 부처를 만나

공덕을 베풂이 조만간 성취하리라는 식으로

문맥이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리게 됩니다.

 

증도가를 주석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南明泉和尙頌證道歌事實)를 보면

조만(早晩)이란 말은 중국의 강소성과

절강성의 방언(方言)으로

“어느 때[何時]”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꼭두각시(나무 인형)를 불러 물어봐라,

깨달음을 얻어(부처를 찾아) 공덕을 베풂을

어느 세월에 이루겠는가 하는 의미가 됩니다.

@증도가를 지은 현각(玄覺, 647∼713)은

당나라 때의 승려로, 출생한 곳이

지금의 절강성 온주부(溫州府)

영가현(永嘉縣)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체법은 우리 마음에서 생합입니다.

보리심을 깨닫고 정각을 이루고 열반을 성취하는 것도

그 시작은 이 몸으로 시작합니다.

이 몸을 벗어나서 그 어떤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제3구에서

「무명(無明)의 참 성품이 불성(佛性)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명이 무엇인지, 불성이 무엇인지,

허깨비 같은 이 몸이 왜 법신이라고 하는지

바르게 알아야 무명이 곧 법성이요,

허깨비 같은 이 몸이 불신인 줄 알게 됩니다.

이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나는 영원하다는 상견(常見)에 빠지고,

사라지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는

단견(斷見)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자기 마음을 참되게 관찰한 후에

방편을 일으켜서 중생을 관찰해야

모든 중생이 자각(自覺)의 성품을 참되게 알지 못해

의심과 망상의 전도된 집착을 일으키는 바람에

갖가지 윤회의 큰 괴로움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 때문에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심법을 참되게

증득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보리심관석)」

라고 했습니다.

나무인형은 생각(念)이 없습니다.

사량(思量) 분별(分別)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념(無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심의식(心意識)이 없습니다.

우리가 <빈 병>이라고 말할 때

병 속에 든 것이 없다는 말이지

병(甁)이 없다는 말이 아니듯

사랑분별은 그 자성이 없어 허깨비같이 사라지지만

그 사랑분별을 일으키는 체(體)는 그대로 있습니다.

 

남명천화화상은 그의 주석서에서 이렇게 풀이합니다.

「쉽게 깨닫게 할 수 있음을 거듭 비유해서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깨친 후에는 텅 비고 텅 비어서 대천세계가 없구나.

죄복(罪福)도 없고 손익(損益)도 없으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거나 찾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에 영가대사는 후인(後人)들이

말을 따라 풀이를 하다가

단멸(斷滅)의 견해를 일으킬까 봐 지극히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여기에 특별히 점을 찍어서 손을 쓴 것이다.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반드시 선지식을 만나서

발명(發明)하여 성품을 보았다면,

염(念)이 있는 가운데서 무념(無念)을 요달하고

생멸 가운데서 생멸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그냥 무념(無念)이고 무생(無生)인 것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비유하면 마치 꼭두각시 인형이

심의식의 사념[心念]이 없는데도

성불(成佛)하기를 기약하고자 하는 경우와 같으니,

옳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어느 때에 이루랴’라고 말한 것이다.

조만(早晩)은 강소성과 절강성의 방언(方言)이니,

“어느 때[何時]에 이룰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불정경(佛頂經)』에 이를 두고

상견(常見)이니, 단견(斷見) 하는 전도망상에 빠지는 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허공을 잡아 문지르려는 것과 같으니,

다만 자신의 수고로움만을 더할 뿐이다.

허공을 어떻게 그대가 잡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