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 칠불쇠법(七不衰法) 두 번째 이야기

2024. 6. 12. 19:09경전과교리해설

 

 

앞서 올린 칠불쇠법(七不衰法)은 국가를 위한 이야기였고

이번 두 번째 이야기는 부처님이 교단의 발전과

화합을 위해 설한 <칠불쇠법(七不衰法)>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당시 불교의 교당을 위한 것이었다고는

말할지 모르지만 250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이 칠불쇠법을 관조(觀照)해 보면 평범한 말 같지만,

시공을 초월한 예언이나 한 듯

현시대의 단체나 개인들에게 이르는

귀감(龜鑑)의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첫 번째는

『복잡한 일을 적게 하고 단순한 일을 많이 하라.』는 교훈입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 했습니다.

생각한다는 말을 서구의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불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분별>을 말합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간택심(揀擇心)이라고 말합니다.

간택심은 본래의 마음 일심(一心)

즉 청정심(淸淨心)에서 벗어난 마음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이런저런 궁리로

허망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를 망심(妄心)이라고 합니다.

망심이란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는 마음,

아닌 것을 그렇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이 분별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일으키는 욕망이 있습니다.

식욕(食欲), 명예욕(名譽慾), 색욕(色欲), 명예욕(名譽慾),

재물욕(財物欲) 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오욕(五欲)이라고 합니다.

오욕은 바로, 이 분별심에서 비롯됩니다.

일례로 재물에 대한 욕심을 봅시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운 좋게 하나의 회사를 가지게 되면

더 많은 부(富)를 위해 이런저런 궁리를 짜내어

회사를 늘여가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문어발식으로 늘여가게 됩니다.

사업이 번창해질수록 단순했던 일이

점점 복잡하게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사업이 성공하게 되면 하나의 회사를 가졌을 때는

사장(社長)이라고 불리지만 여러 개의 회사를 가지게 되니

명칭도 회장(會長)으로 바뀌게 됩니다.

부(富)가 명예도 가져다줍니다.

성공한 사업가로 인기도 누리게 되고,

운 좋게 권력도 쥐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오게 됩니다.

더 큰 욕망을 계속 낳게 됩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富)를 향해 살다 보면 일만 있고

사람이라는 자신의 존재는 사라지게 됩니다.

소위 사람이 아니라 일벌레가 되고 맙니다.

사업이 잘돼도 그렇고, 잘못되면 더더욱 그 병은 짙어집니다.

그리고 부(富)가 가져다주는 편리함과

인기와 쾌락에 젖어 이를 행복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밤마다 꿈을 꾸게 됩니다.

꿈속에서는 대통령도 될 수 있고, 재벌 총수도 될 수 있고

유명한 연예인도 될 수 있습니다.

온갖 부귀영화와 쾌락도 마음먹은 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깨고 나면 허망해집니다.

꿈속의 일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승들은 인간의 삶은 <환해(幻海))라고 합니다.

신기루나 무지개 같은 허망한 꿈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욕망이란 꿈에서 깨어나야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공수래공수거>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지만

이를 머리에서 가슴으로 깨닫게 될 때까지는

큰 노력과 시간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욕망이라는 꿈속에서 깨어날 때

진실로 그 말의 의미를 체증(體證)하게 됩니다.

 

삶은 복잡한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하나의 일로 족해야 합니다.

선어(禪語)에

「어사무심(於事無心), 어심무사(於心無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사무심>는 일을 할 때는 복잡하게

여러 마음을 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별 망상으로 가득 찬 복잡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의 단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은 <정심(正心)>을 의미합니다.

<어심무사>는 마음으로 부질없이

이런저런 일을 꾸미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정심(正心)에는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르다고 하는 <정(正)>의 글자를 보면

『 一』과 『止』의 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그처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에 머물 때가

바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잡한 것을 버리고 하나에 몰입하는 것을

선가(禪家)에서는 다른 말로

<방하착(放下著)>이라고도 부릅니다.

말의 뉘앙스는 다르지만 같은 의미입니다.

 

경(經)에서 단순한 일을 많이 하라는 의미는

그 하나에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사자가 한 마리 토끼를 잡을 때라도

온 정신을 집중하듯 마음이 그러해야 합니다.

선가(禪家)의 말을 빌리자면

「백척간두(百尺頭) 진일보(進一步)」란 의미와 상통합니다.

망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험난하고 위험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기업도, 개인이 살아가는 방법에도 머리를 굴려

복잡하게 살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하게 산다는 말은

평상심(平常心)으로 살라고 하는 말입니다.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이 평범한 속에 누리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침묵하기를 즐겨 하고, 많은 말을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침묵하기를 즐기라는 말은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매사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중하지 못한 말은 화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사람들은 하나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열 가지 말을 하게 됩니다.

아는 자는 말이 없지만 모르는 자는 많은 말을 하게 됩니다.

목우자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계초심학인문 (誡初心學人文) >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참여해야 할 일이 없으면서 이 방, 저 방,

이 집 저 집으로 드나들지 말아야 하며,

남이 숨기려 하는 일을 굳이 알아서 도움 될 게 없으니

억지로 캐어내려 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할 일도 아닌데 남의 일에 끼어들어

이런저런 훈수들기를 좋아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본분을 넘어 티를 내고도 싶어 합니다.

묻지도 않은 남의 일에 나서거나, 자기의 일도 아닌 것을

조언이나 충고한답시고 괜스레 개입하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부질없는 이런 말로 인해 화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양수의 계륵(鷄肋)이라는 고사(故事)처럼

자신의 영특함을 과신하다 목숨을 잃게 된 이야기는

좋은 귀감이 될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의 직위나,

부(富)를 믿고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은 일을

앞서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설령 피해는 아니 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괜스레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것도 그렇고

남의 일에 호(好), 불호(不好)를 이야기하는 것도

주제넘은 것으로 이는 결국 자신의 허물이 될 뿐입니다.

 

 

세 번째는 『잠을 적게 자고 쾌락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두뇌가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자는 것도 정도가 지나치지 말아야 하고,

인연 경계에 끄달려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는

휴식이 되어야 합니다. 잠을 자게 되면

우리의 의식은 무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잠을 자면서도 의식이 깨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몽중삼매(夢中三昧)라 합니다.

이는 도(道)의 경지에 오른 고승(高僧)들의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무의식(無意識) 상태가 됩니다.

생각이 많으면 잠자는 시간이 짧아집니다.

아예 잠을 못 이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기네스북의 기록에 의하면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최장 시간은 277시간이라고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사람이 10일 이상 잠을 자지 않으면

심장에 무리가 가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죄자나 정치범을

잠재우지 않는 고문(拷問)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무의식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욕망이라고 합니다.

그 욕망을 프로이트는 리비도(libido)라 했습니다.

성적본능(性的本能)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성적본능은 무의식 속에서 내재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세속을 등진 수행자라 하더라도

인간의 오욕 중에서도 가장 끊기 힘든 것이

색욕(色欲) 즉 성욕이라고 합니다.

<사십이장경>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것이 하나이길 망정이지 둘이면

천하에 도 닦을 사람 하나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힘든 수행이라는 것을 의미입니다.

 

지혜를 불교에서는 명(明)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는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의 삶이란 무의식의 삶입니다.

눈을 뜨고 살고 있지만 꿈을 꾸고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무의식의 삶은 꿈속에 사는 삶입니다.

빛이 아닌 어둠 속에 사는 삶입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 말처럼 인간의 쾌락은

무명(無明) 속에서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동물은 빛이 있는 낮 동안에 짝짓기하지만

유독 어둠 속에서 짝짓기하는 동물은 인간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잠을 줄이고 쾌락을 멀리하는 말은

깨어 있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무리를 이루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무리를 지어 생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취미를 가진 동우회를 결성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지원한다거나,

어떤 지역 일을 도모하기 위해 협력자들을 규합하고,

지역발전을 위해 여러 사람과 결탁하여

지원군이 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한 사회현상이다.

그러나 명분만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그 실 오로지 자기들만의 이익과 권리만 내세우고

이를 누리기 위하여 반대 집단이나 개인을 위해(危害)하고

비방하며, 시위나 집회로 사회에 위협이 된다면

이런 단체는 아무리 명분이 그럴싸하다고 하더라도

이는 사이비 집단에 불과하고,

폭력단체나 모리배 같은 이익 집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범죄자들이 모여 조직을 구성하여 명분상으로

법의 수호를 외친들 그것이 무슨 존립 의미가 있겠는가.

 

사회적인 동물이 생존을 위한

유유상종(類類相從)의 모임은 어쩔 수 없지만

이런 유형의 집단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그만큼 어지럽히고,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징조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 된다.

단적인 예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되는

정치적펜덤 현상은 그 조직이 크고, 방법 또한 교묘하여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좌지우지할 정도로 힘이 막강해져 가고 있습니다.

비록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그들의 집단적인 위협 때문에

방관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먼 앞날을 내다보시고 무리를 지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고 하신 모양입니다.

 

다섯째는 『아무 덕이 없으면서 자랑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 안이 빈 사람일수록 지식을 앞세우고

못생긴 사람일수록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려 한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도 없는 사람은

자기가 전문가인냥 입으로만 떠든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는 갖은 추한 짓을 하면서도

사람들 앞에만 서면, 마치 성인군자인 척하는 사람,

가진 것이 쥐뿔도 없는데도 부자인 척 짝퉁을 들고

명품인 양 허세를 부리는 사람,

부모의 권위나 지위를 이용하여

마치 자기가 유명인인 양 자랑과 허세를 부리는 사람,

포획이나 사냥을 취미로 여기면서 동물보호자로 자처하는 사람

사랑과 자비가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면서

거리에서 종교인 행사하는 사람

사기와 거짓말로 똘똘 뭉친 사람일수록

정직과 청렴한 사람이라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남에 대해서는 투쟁과 논쟁만을 일삼다가

자신이 문제가 되면 협치와 화합을 외치는 사람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다른 철면피 같은 사람,

돌아서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치미 떼는 사람

덕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행동을 반성할 줄도 모르고

도리어 더 뻔뻔하게 자신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남에게 자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보라는 의미가 여기 담겨 있는 것이다.

 

여섯째는 『악한 사람과 짝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생선을 담은 바구니는 비린내가 나고,

향을 담은 주머니는 향냄새가 난다.

정직하고 선한 사람을 가까이하면 심성이 맑아지고,

거짓되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가까이하면 심성 탁해진다.

백정을 친구로 두면 살생의 기술을 배우고,

정원사를 친구로 두면 화초 가꾸는 법을 배울 것이다.

모든 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다.

 

<자경문>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쁜 벗이나 계율을 지키지 않고

세속적 욕망을 즐기는 이를 멀리하여야 한다.

반면 계행이 청정하고 지혜가 밝은 이를 가까이하여야 한다.

만약 속인의 집에 들게 되거든 부디 바른 생각을 굳게

지니되 보고 듣는 경계에 끄달려

방탕하고 삿된 마음에 휩쓸리지 말아야 할 것인바,

하물며 옷깃을 풀어 헤치고 웃고 떠들면서

쓸데없이 잡된 일이나 지껄이고, 때도 아닌 때에 밥

먹고 술 마시며 망령되이 무애행을 하노라 하여

부처님이 정해주신 계율을 크게 어길 것인가?

또(그렇게 함으로써) 어질고 착한 이들과 싫어하고

의심하는 사이가 된다면

어찌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했습니다.

 

선한 것은 가까이하고,

악한 것은 멀리해야 하는 이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불교 또한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하라는 말이

과거 칠불(七佛)에게 공통된 법(칠불통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산이나 숲 같은 한적한 곳에, 있기를 좋아하라.』라는 교훈입니다.

 

영가(永嘉)의 증도가(證道歌)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入深山住蘭若(입심산주란야)

岑崟幽邃長松下(잠음유수장송하)

번역하면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머무니

높은 산 그윽하여 낙락장송 아래로다.

이는 언뜻 보면 풍류의 도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철 스님은 이를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막는 것 없는 천당에 왕생하는 이가 적은 것은

중생이 탐·진·치 삼 독 번뇌로 제집 재산을 삼음이요.

유혹하는 이 없는 악도에 태어나는 사람 많은 것은

사대육신과 온갖 욕망으로 망령되어

마음 보배를 삼는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비구가 되면 처음 배우게 되는 <자경문>에 이른 말이 있습니다.

『누군들 산에 들어가 도 닦고자 하지 않으리오만

그리하지 못함은 애욕에 얽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속에 들어가 마음 닦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힘이 닿는 데로 선행하기를 외면하지 말 것이다.

세간 쾌락을 능히 버린다면 마치 성인처럼

신뢰와 공경을 받고 육바라밀의 하기 어려운 행을 하면

부처님처럼 존중받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이 七不衰法(칠불쇠법)을 닦으면

敎法(교법)은 增長(증장)한다고 했지만

불자(佛子)가 아니더라도 삶의 귀감이 되는 가르침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