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불쇠법(七不衰法) 이야기 하나

2024. 6. 10. 16:01경전과교리해설

 

만법의 원리인 성주괴공(成住壞空)과 같이

한 국가의 흥망성쇠도 필연적인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한 나라가 패망하게 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외세의 힘에 의한 패망보다는 내부의 알력이나

부패로 인한 것이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의 예를 보더라도 왕권의 타락으로

몰락한 로마제국을 비롯하여, 진시황의 진 제국이 그렇고,

가깝게는 붕당정치로 몰락한

대한제국의 역사에서도 이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330년 동안 존속했던

몽골-튀르크계 왕조로, 전성기에는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국가인 무굴제국이나, 삼 대륙을 거의 정복한 알렉산더대왕,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가 있다면

부처님이 생존했던 인도에는 아쇼카(Asoka)왕이 있습니다.

아쇼카는 인도 마가다국 제3왕조인

마우리아 제국의 세 번째 임금으로

인도 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왕입니다.

또한 그는 불교에 귀의한 뒤에

불교를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도 전역은 물론 나아가 동남아시아와

중국, 중앙아시아 나아가 페르시아와 그리스,

이집트 등 헬레니즘 세계로까지 포교관을 보내

불교의 가르침을 전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천관산에 가보면 <아육왕탑>이란

천연 돌탑이 만들어질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진 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 경전에 나온 이야기를 약술(略述)합니다.

아쇼카왕은 빔비사라왕의 2번째 왕자로 태어났지만,

형인 수사마(修私摩)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일종의 찬탈인 셈인데 이로 인해 대신들은 물론

신하들까지 아쇼카왕을 멸시하고 명을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별호가 <무우(無憂)>였는데

무화꽃이 활짝 핀 것을 즐겼는데 나무가 그를 닳았다고 해서

궁녀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화과나무꽃들 모두 꺾어버릴 정도로

아쇼카를 냉대했습니다. 그래서 참다못한 아쇼카왕은

그를 반대한 오백 명 대신들을 물론 궁녀까지

모두 참살해 버렸습니다.

빔비사라왕에게는 101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친동생 한 명을 제외하고 이복형제인 99명 왕자를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물론 왕권 강화의 목적이 있었지만,

그의 살육은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이를 본 성호라는 대신이 포악하게 변한

아쇼카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때리거나 죽이거나 하는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고,

응당 스스로는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드라마의 말을 빌리자면 살인은 청부업자에게 맡기고

젊잖은 선한 사람 행사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받아들인 아쇼카왕은 기리가(耆利柯)라는 백정을 뽑아

집을 지어주고 모든 범죄자를 그 집에서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 집은 8대 지옥만큼 갖은 형구를 갖추고 있었고

그 집에 들어온 자는 절대 살아서는 나가지는 못한다는

철칙까지 만들어 놓은 집으로 옥사(獄事)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기리가는 왕명을 받기 전에 부모의 허락을 구하러 갔다가

부모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부모까지 죽이고

왕명을 수락한 악랄한 자였습니다.

한때 궁에서 죄를 지은 여자를 쇠 절구통에 넣고

쇠 절구로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 악랄하여

전타 기리가(旃陀耆利)라고 불릴 정도로

이명을 지닌 자였습니다.

잔타는 배에다 천을 두르고 부처님이 임신시켰다고

거짓 소문으로 부처님을 힐난했다가

생지옥으로 떨어진 바라문의 딸의 이름에서 따온 말입니다.

 

당시 해상무역으로 큰돈을 번 장자에 한 아들 있었습니다.

그 장자의 아름은 위해(爲海)였는데 물려받은 모든 재산을 보시하고

사문이 되어 걸식으로 공양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걸식 차 들린 집이

불행히도 기리가의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 들어온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위해 사문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리사에게 잡힌 위해는 죽이더라도

한 달간만이라 죽임을 연장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악랄한 기리사도 무슨 마음인지 이를 허락하고

약속한 한 달이 되자 위해를 기름솥 가마에 넣고 불을 지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수단을 써도 불이 지펴지지 않자

기리사가 직접 불을 지폈습니다.

그랬더니 불이 붙고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오자

솥뚜껑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뜨거운 열기 속에 연꽃이 피어있고

그 연꽃 송이 위에 위해가 참선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기리사도 어떻게 할 줄 몰라 했는데 이 소문이 퍼져

아쇼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아쇼카왕이 직접 가리사의 집을 방문하고

집을 나가려는 찰나 기리사가 말합니다.

이 집은 누구도 들어와서는 살아서는 나갈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왕도 예외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아쇼카왕은 대답합니다.

그렇지 그런데 이 집을 지은 후 누가 제일 먼저 이 집에 들어왔지?

그러자 기리사가 말합니다. 당연히 주인이 저입니다.

그러자 아쇼카왕은 그럼 너 먼저 죽어야겠구나 하고

참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정복왕으로도 불리는 아쇼카왕은 칼링가라는

이웃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보병 60만, 기병 10만,

코끼리 부대 9천 마리를 이끌고 쳐들어가

10만이 넘는 인명을 해쳤는데,

폐허가 된 칼링가의 수도를 직접 둘러보다가

자신의 야심으로 무수한 인명이 죽고

고아가 된 아이들 모습과 미쳐버린 사람들 모습에

충격을 받아 불교에 귀의했다고 합니다.

그는 부처님 사후에 그가 정복한 나라에

8만 4천 개의 탑을 지을 정도로

불교 포교에 힘쓴 왕으로 그의 이칭 또한 폭군왕에서

전륜성왕, 법왕, 정복왕 등 다양한 이칭을 가지게 된 왕입니다.

 

그가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주변의 작은 국가들을

하나하나씩 정복해 나갈 때쯤에

그중 하나인 밧지국을 정복을 하려고

부처님에게 문의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들은 부처님이 아난에게 설한 법이 바로

「칠불쇠법(七不衰法)」입니다.

밧지국은 한때는 방대한 국가였지만

당시에는 작은 부족국가 정도로 몰락한 국가였기에

정복하는 데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규모의 나라였는데

아쇼카왕은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조언을 바랬던 것입니다.

 

이는 잡아함경 제23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釋迦牟尼(석가모니) 부처님이 '라자가하[왕사성] 기사굴산'에

제자 천이백오십 명과 함께 계실 때의 일입니다.

마가다국의 아사세왕은 작은 나라로서

대국인 마가다국에 순종하지 않는 밧지국을 침공하기 전에,

부처님께 대신인 우사를 보내어 전쟁을 일으키면,

승리할 수 있을지를 여쭙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신을 맞은 부처님은 대답 대신, 제자 아난다에게 물었다.

 

"아난다야, 내가 예전에 밧지국에 머물며

「七不衰法(칠불쇠법)」을 가르쳐준 적이 있는데

요즘 그들은 어떠하더냐?"

"부처님, 밧지국 사람들은 지금도 부처님이 가르친

「七不衰法(칠불쇠법)」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자주 모임을 갖고, 바른 일에 대해 의논합니다.

둘째, 회의 중에는 임금과 신하가,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며,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을 존경하는, 기풍이 있습니다.

셋째, 옛 풍습을 지키며, 예의를 존중합니다.

넷째, 부모님께 효도하며, 어른을 존경합니다.

다섯째, 돌아가신 조상을 받들고 가업 잇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도덕적이며, 음란하지 않습니다.

일곱째, 사문과 바라문을 공경하고, 계율을 지키며,

바르게 생활하는데 게으르지 않습니다."

 

"아난다야, 이「七不衰法(칠불쇠법)」가운데

한 가지만 지켜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밧지국은 일곱 가지를 다 지킨다면,

그 나라는 더욱 안온하고, 강성하여,

누구의 침략을 받아도 망하지 않을 것이다."

사신은, 이 대화 내용을 아사세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아사세왕은 말뜻을 알아듣고 전쟁을 포기했습니다.

~이하 중략(中略)~

 

부처님의 이 설법 당시의 시대 상황과

현시대의 상황을 비교하면 다르지만

이를 참고해 볼만이 귀감의 글입니다.

첫째 자주 모임을 갖고 바른 일에 대해 논의한다는 것은

소통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소신을 피력하고

또 상대의 소신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른 일이라는 어느 한쪽에 치우친 편파적인 일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중도의 길을 밝힌 것입니다.

 

둘째 공명정대하고 존경을 말한 것은

힘에 의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힘은 다수결에서 좌우되지만

그렇다고 선동된 여론을 등에 업고 행하는 것은

또 다른 힘이 됩니다. 대의명분을 앞세우지만

그런 힘은 편파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리당략에 의한, 어떤 집단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뿐입니다.

그것은 공명정대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국민에게

무엇이 도움이 되는 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존경하는 기풍이란 상대에 대한

어법(語法)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토론이든 아니든 간에 논쟁을 벌이게 되면

격해지기 쉽고 예(禮)를 벗어나기 일쑤고,

심지어는 폭력까지도 행사하게 됩니다.

토론은 공명정대하고 또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겸양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옛 풍습을 잘 지킨다는 것은

어느 나라이든 그 나라의 풍습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일순간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전통을 지켜가며 순차적인, 단계적인 절차로 나아가야 합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옛말이 있듯

옛것만 따라도 아니 되고, 또 무시해서도 안 되듯

새로운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는 한쪽을 우선시한다면 무리수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진보니, 보수니 하는 사고 관념을

부처님이 예측했나 봅니다.

넷째 효도를 말한 것은 인륜의 도를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개념을 앞세우는 바람에

인륜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성범죄는

바로 우리의 인륜이 무너져 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륜의 첫걸음은 바로 효(孝)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자가

무슨 가정을 화목하게 꾸려갈 수 있으며

나아가서 사회나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습니까?

인륜에는 경제보다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경제문제가 개입되는

순간 인륜의 벽은 무너지게 됩니다. 깊이 명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섯째 돌아가신 조상을 받들고 가업을 잇는다는 말은

오늘날 전통문화 계승의 측면에서 보면

더없이 본보기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통이란 경제성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문화를 살찌게 하는 것입니다.

계승되는 전통문화를 대중적인 눈으로 보면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인기도 그다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루가 멀다고 초고속으로 발전하는

디지털 문명 속에서 일생을 그런 일에 쏟아붓는다는 것은

현시대적인 감각에 비추어 보면

허망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런 문화 계승이 있으므로

한민족이라는 얼을 온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바라는 정책전문가들이라면

당연히 귀담아 둘이어야 할 말입니다.

 

여섯째 도덕적이며 음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가정을 가진 개인은 물론

국가의 녹을 받는 자라면 당연히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은 사필귀정입니다.

윗말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게 된다는 말은

흘러간 옛말이 아닙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한 본보기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곱째 바라문을 지키고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집

단적 사회적인 윤리와 도덕을 말합니다.

개인 간의 윤리와 도덕도 중요하지만,

집단적인 활동을 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는 사회라는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더 엄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 정의는

힘에 의한 정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정의가 실현될 수 없는 사회로 변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종 열성 팬 현상에다, 다양한 집단이 형성되고,

이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 자신의 집단 소속자들에게는

관대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생겨둘 말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