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통 이야기
2024. 4. 6. 08:30ㆍ경전과교리해설
《반야심경》을 보면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본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 照見五蘊皆空...)」
라는 말로 시작된다.
오온(五蘊)이란 말은
다섯 가지의 덩어리 혹은 집합을 의미한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의미한다.
색온(色蘊)은 물질, 몸을 의미하고, 수온(受蘊)은 느낌을,
상온(想蘊)은 상상하고 연상하는 것들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알아 온 것들이 해당한다.
행온(行蘊)은 행위, 해왔던 것들을,
식온(識蘊)은: 식별하고 구별하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물질이나 우리의 몸뚱아리 등은
본다(見)고 표현할 수 있지만,
감정이나 느낌, 생각들을 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관자재보살은 오온을 모두 <본다>라고 했을까?
<見> 자 앞에 <照> 가 붙어 있어 청담(靑潭)스님이나
명봉(明峰) 스님의 한글 반야심경 해설서를 보면
<비추어 본다>,
<비췌 본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본다>라는 의미에서는 같은 의미다.
<본다(見)> 말의 의미를 살펴보자.
본다는 것은 <이것은 콩이 아니고 팥이다> 라는 식으로
분별하여 안다는 것이다.
분별 이것이 중생의 무명이요, 번뇌가 되는 것이다.
흔히 중생의 번뇌를 객진번뇌(客塵煩惱)라고 표현한다.
객진(客塵)은 번뇌를 가리키는 말이고,
번뇌(煩惱)는 심성(心性)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치(理致)에 미혹(迷惑)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객(客)이라 하고
심성(心性)을 더럽히므로 진(塵)이라 한다.
객진번뇌는 곧 심성을 더럽히는 무명 등이 객진번뇌라 할 수 있다.
허망한 것을 진실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이는 뭐같이 생겼다든지.
슬프다, 기쁘다, 옳다 그르다 등
이렇게 분별하는 것은 모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라는
육근(六根)의 대경이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경계로 말미암아
분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해서 아는 마음은
육진(六塵)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육진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사물이나 생각들이
검은 장막에 가려 그 실재를 보지 못하고
투사된 것을 보기 때문이다.
검은 장막이란 곧 사념의 구름, 편견, 선입관,
허튼 지식들이 그것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거울을 볼 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반사체가 아니라 실체의 제 얼굴로 착각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마음이란 진짜 마음이 아니고
이처럼 육진(六塵)의 분별영사(分別影事)이다.
분별영사는 육진경계의 빛깔이나 소리나
냄새 따위를 대하여 생각을 일으켜서 인식하는 마음이니
사물의 실상인 속 알맹이가 아니고
사물의 투사체 즉 거죽인 그림자를 따라서 분별하는 것이다.
만약 투사된 그것을 참마음이라고 고집한다면
미망에 빠진 것이니 이렇게 분별하는 마음이
곧 번뇌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경에 대하여 육근이 움직이지 않으면
객진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경에 대하여 육근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초월한다면 분별의 마음은 자체가 없게 되는 것이다.
구름이 그치면 푸른 하늘이 나타나듯이
망심이 사라지면 본래 참마음이 들어나는 것이다.
일례로 부채가 있다고 해도 부채가 움직일 때 바람이 일고
부채를 가만히 두면 바람이 일지 않는 것과 같이
분별심은 육진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말을 빌리자면
삼세육추(三細六麤)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육진(六塵)의 경계를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가?
육근을 초월하면 육신통(六神通)을 얻게 된다고 경전은 말한다.
육신통은 신족통(神足通),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을 말한다.
천안통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 袁天綱(원천강)이란 도에 밝은 이인(異人)이 있었다.
나라 안에서는 너무나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가 죽은 후
그의 9대 孫이 사는 마을에 군수가 부임했다.
불행히도 그때 원천강의 9대손이 죄를 짓고 감옥에 있을 때다.
군수는 원천강의 이름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마침 옛 원천강이 살았던 마을에 부임했으니
필히 집안에
가보(家寶) 같은 것이 있을 거로 생각하고
그 가보를 가지고 오라고 가족들에 명했다.
원천강이 죽을 때 남겨 둔 보물이 하나 있었는데
9대손까지는 열어보지 말라는 유훈과 함께
전해 내려온 가보(家寶)였다.
옛날 군수 정도면 민초들의 생사여탈(生事與奪)을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런 군수가 명을 내렸으니 아니 가지고 갈 수 없었다.
가족이 가보를 들고 동헌을 찾아가자
군수는 유명한 사람의 귀한 가보를
동헌에 앉아서 받기는 예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동헌 섬돌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동헌 섬돌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대들보가 부러지면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동헌 의자에 앉아 있었다면 그대로 압사(壓死)가 되었을 것이다.
압사를 면한 군수는 숨을 돌리며
원천강의 9대손의 가족이 가져온 가보를 보았다.
9겹의 비단으로 꽁꽁 싸맨 가보를 열어보니
안에는 펼지 한 장만 있었다.
원천강이 직접 쓴
「救爾壓樑死(구이압량사) 活我九代孫(활아구대손)」
라는 글이 전부였다.
<네가 대들보에 치여 죽을 것을 내가 구해 주었으니
나의 9대손을 살려 주게>라는 의미의 편지였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설법하시다가
걸식을 나갔던 아난이 음녀(淫女)
마등가(摩登伽)의 주술에 걸린 것을
천안통(天眼通)으로 보시고 문수보살을 보내 아난을 구했듯이
원천강 역시 미래의 재앙을 알고 편지 한 장을 남김으로써
감옥에 갇힌 그의 구 대손을 구한 것은
시공(時空)을 넘어 미래를 본 천안통이 열렸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등불을 본다고 하자. 등불이 보는 것이 아니고
눈이 보는 것처럼 여기지만 실은 눈이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보는 것이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보는 것이니
마음이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육근을 초월하게 되면 육근의 기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소리를 듣게 되고, 귀로 보게 되고,
눈으로 냄새를 맡고, 눈으로 맛을 알게 된다고 한다.
또한 시공간(視空間)을 넘나들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육근호용(六根互用)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육신통(六神通)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십지보살이나 아라한과 같은
여래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부릴 수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천안통(天眼通)의 제일인자는
아나율타라고 하는데 그는 천안통을 얻어서
눈이 없어도 삼천대천세계를 다 본다고 한다.
어리석은 중생이야 육신통을 얻으면 얼마나 족하겠는가만은
이 또한 분별망상의 바램이니 방하착(放下著).
@사진: 강진 남미륵사 관음전의 여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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