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 입처개진
2024. 8. 12. 09:53ㆍ경전과교리해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란 이 말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임제(臨濟義玄, ?~867) 선사의
언행록인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네가 주인이 되면
그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진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곧 진여불성을 의미합니다.
그 참 의미를 살펴봅시다.
먼저 첫구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처(處)라는 말은
동서남북 상하좌우 곧 모든 장소를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머무는
일체의 장소나 환경을 의미합니다.
주인(主人)이라는 말은 깨어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미망(迷妄)에서 깨어있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청정합니다.
이 마음을 대승에서는 자성이라고 하고,
진여불성이라고 합니다.
이 청정한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바로 사량(思量) 분별심(分別心)입니다.
미망(迷妄)에 빠진 마음입니다.
사량 분별심이 들어오면 청정한 마음이 오염됩니다.
그래서 사량 분별심을 도둑이라 하고, 객이라고 하며
이에 대해 청정한 본래 마음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잠들어 있으면 도둑이 들듯
어느 곳에 있든, 어떤 환경에 있든
깨어있는 그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미망(迷妄)에서 깨어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선어(禪語)에 말하는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모두 선(禪)이다.」
라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선(禪)을 추구하는 마음은
청정한 마음 곧 불성, 진여를 찾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찾지 말고
내 마음 안에서 찾으라는 의미를
내가 처하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보조국사 지눌은 《수심결》에 이르기를
「무릇 요즘 사람들 미혹된 지 오래여서,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모르고,
자기 성품이 참 진리인 줄 몰라서,
진리를 구하려 하면 멀리 성인들만 추앙하고,
붓다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관조(觀照)하지 않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진여불성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있는 부처를 보라고 한 것입니다.
지눌스님은 내 안에서 부처를 본다라고 했고
임제 선사는 수처작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두 번째 구의 <立處皆眞(입처개진)>은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진리요,
진여(眞如) 불성(佛性) 자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처(立處)>라는 말은
드러난 의미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서 있는 그 자리>라는 막연히 지금 서있는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과거와 미래의 중간인
현재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바로> 네가 서 있는 그 순간을 의미합니다.
지금 바로 서 있는 그 자리는 무상(無相),
무념(無念), 무작(無作)의 그 순간을 의미합니다.
황벽 스님의 시자였던 낙포원안(843~898) 스님은
이를 “입처즉진(立處卽眞)”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卽)> 시간을 요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는 의미입니다.
<개(皆)>를 <즉(卽)>으로 바뀌어 놓은 것은
아마도 이를 드러내고 한 것일 것입니다.
《입법계체성경(入法界體性經)》을 보면
부처님과 문수사리와의 대담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경(經)은 수(隋:581~618)나라 때
사문 사나굴다(闍那崛多: 梵名은 Jñānagupta))가
번역한 경입니다. 대장경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실제라 이르느냐?”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나의 제[我所際]가 있는 것이
곧 실제(實際)며,
범부제(凡夫際)가 있는 것이 곧 실제며,
업(業)과 과보(果報)인 일체 모든 법이 모두 실제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와 같이 믿는다면
바로 진실한 믿음입니다.」
여기서 <나의 제(際)>라는 것은 처(處)를 말합니다.
내가 처한 곳이 곧 실제(實際)요,
중생이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실제라는 의미입니다.
<실제(實際)>란 진여의 실리(實理)를 극(極)한
그 궁극(窮極)에 이름을 말합니다.
쉽게 풀어보면 진여불성의 본성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지도론32》에서는
「실제(實際)는 법성을 실증(實證)함으로
제(際)라고 한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바로 실제이며,
중생이 머무는 지금 그 자리가 실제라는 말은,
임제 선사가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말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는
이 말을 단순히 옛 경전의 말씀이나
선사의 말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후회가 없는 삶을 충실히 영위하기 위해서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매사 방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지나가 버린 순간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으므로
순간순간의 삶을 항상 신중하고
소중하게 영위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의 중심을 잃으면
부질없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주인행세를 하게 됩니다.
과거에 매이고, 미래에 매여, 하는 일마다,
처하는 상황마다 번뇌와 갈등이 야기 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 또한 흘러가고 있기에 머묾이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참된 행복한 삶과 평안한 삶은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현재도 아닙니다.
발을 딛고 있는 <바로 지금>입니다.
바로 지금 깨어 있는 그 마음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란 이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원문과 번역을 함께 올려놓습니다.
이 자료는 <펌>한 글이라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원문>
「師示衆云 道流 佛法無用功處 是平常無事
我屎送尿 著衣喫飯 困來卽臥 愚人笑我 智乃知焉
古人云 向外作工夫 總是癡頑漢
爾且隨處作主 立處皆眞
境來回換不得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 自爲解脫大海
今時學者 總不識法 猶如觸鼻羊 逢著物 安在口裏
奴郞不辨 賓主不分 如是之流 邪心入道
鬧處卽入 不得名爲眞出家人 正是眞俗家人」
<번역>
「선사가 대중들에게 이르시길, 도는 유행하지만
불법은 애써 힘들일 것이 없다.
평시 그대로 사는 것이니 탈 없이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잠자면 그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옛 성인이 말씀하시길, “밖을 향해 공부하지 말라.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짓일 뿐이다.”
그러니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된다.
어떤 경계가 다가온다 해도 꺼들리지 않아야 한다.
설령 묵은 습기와 무간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죄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자리에 서면)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할 것이다.
요즈음 공부하는 이들은 모두들 법을 모른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종과 주인을 가리지 못하며, 손님인지 주인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는 삿된 마음으로 道[(불교)를 공부하니
그러므로 번잡스럽게 드나들기만 하니
진정한 출가인이라고 이름할 수 없으니 이는 바로 속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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