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그것 있는 거여, 없는 거야?
2024. 8. 9. 20:59ㆍ경전과교리해설
부모 未生前 이 몸은 어디서 왔다가
날숨 끊어지면 어디로 가는가
소리가 없어도 꽃은 핀다고 하고
눈물이 없어도 새는 왜 운다고 하는가?
온 곳은 모르는데 바람은 불어오고
가는 곳이 없는데 해는 왜 서산에 지는가.
위는 비어도 물은 밑으로 흐르고
밑은 비어도 불은 왜 위로 솟는가.
알 수 없으라. 한목숨 가는 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태어난 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필연이다.
이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불가역(不可逆)의 진리다.
그렇다면 죽음으로서 <나>라는 존재는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아니면 다시 내세에 다른 몸을 받아
환생하게 되는가?
한편으로 궁금증이 생기고
한편으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당연히 윤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윤회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유무(有無)의 문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윤회사상은
어떤 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격랑 속에서 전쟁과 가난과 궁핍,
사회적 신분제도 등 때문에 고통받고
억압에 시달렸든 중생들이 현실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막연한 바램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윤회(輪廻)는 오랜 역사를 지닌
인도 계통의 종교인 힌두교, 자이나교에서는
브라만과 아트만(atman) 교리로
이를 정립하고 있지만,
불교는 무아관(無我觀)을 근본 교리를 삼아
이를 부정하면서도 윤회 이야기가 전생담을 빌어
초기경전 곳곳에 나오고 있다.
기독교 역시 553년 제5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투표로서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면서
초기 성경에 나오는 윤회사상을 배제하였지만,
현재의 성경 속에는 많은 부분이
남아 있음을 성서학자들은 예시하고 있다.
이는 윤회의 문제 즉 영혼의 유무(有無) 문제를
단정적으로 결정하기는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회(輪廻)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윤회'는 saṃsāra라고 한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정처 없이 헤매다, 빙글빙글 돈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한자로 번역하면서
바퀴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해서
바퀴 윤(輪)자를 써 윤회(輪廻)라고 한 것이다.
그에 반해서 영어권에서는
윤회를 <reincarnation> 이라고 한다.
<re-incarnation>이란 이 말의 뜻은
영혼이 새로운 육체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윤회에 의한 환생(幻生), 화신(化身),
영혼 환생(metempsychosis: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람
또는 동물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다는 신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삼사라와 같은
<끝없이 반복한다>라는 의미는 없다.
또한 그 환생이 오로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인지,
반복되는지도 모호하고,
또한 영혼에 대한 정의도 불투명하다.
영혼(靈魂)이라 하면 없다가 생기는 것인지,
있다가 살아지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상주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먼저 <영혼이 돌고 돈다는 의미>를 살펴보자.
우리 전래동요에 이런 것이 있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바닷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하늘나라 가고 싶어 구름이 된다.
구름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고향 동네 그리워서 빗물이 된다.
빗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친구들을 만나려고 냇가로 간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가려고 강으로 간다."
끝없는 반복이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불교 역시 중생의 생사는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시작되었다고 경전은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위 전래동요는
윤회사상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 간과된 것이 있다.
우리 사는 이 세계를 기세간(器世間)이라고 한다.
기세간은 국토세간과 중생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토세간은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변이(變異)하지만,
주체가 없고 단지 인연의 법칙에 따라 변이(變移)할 뿐이다.
그러나 중생은 십이연기로 생사가 일어나고
업식(業識)에 따라 육도(六度)를 윤회하게 된다.
다시 말해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인과(因果)의 법칙에 따라
연쇄 관계를 지어가면서 변할 뿐이지만,
중생은 지은 업(業)에 따라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을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 또다시 인간으로 수레바퀴 돌 듯
돌아다니게 된다는 의미다.
이것을 중생의 윤회라고 하는 것인데
중생세간에서는 업을 짓는 주체가 있는 것이다.
국토세간에서 윤회(변이)를 시작과 끝이 없지만,
중생세간에서는 시작은 알 수 없지만
그 끝은 깨달으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주체를 <아(我)>라 하며,
<아(我)>는 곧 오음(五陰)인 것이다.
오음은 사대(四大)가 인연으로 화합한 것이다.
인연으로 화합된 것은 자성이 없다.
참된 아(實我)가 없다는 의미다.
공(空)이면 무상(無相)하고, 생사가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아(我)>가 사라져 없다면
다시 말해서 <공(空)>이 되면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12연기도 없고(공),
육도 윤회도 없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중생은 나라고 주장하는 아(我)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기본 요소들이 화합하여
생겨난 것일 뿐 영원불변의 참된 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我空]은 깨닫지도 못하고,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연이 모여서
생겨났으므로 절대의 실체와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法空]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12연기가 있고,
육도 윤회가 일어난다는 의미다.
《문수사리문경》을 보면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물질은 4대(大)여서 일체가 무상(無常)한지라,
만약 무상한 것이라면 진실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면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라면 그럴 이치가 없으니,
그럴 이치가 없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없다.
연기는 가유(假有)이기 때문에 공(空)이다.
그러나 인연으로 가유(假有)가
연기(緣起)함으로 없는 것이 아니다.
실공(實空)은 아니다.
이 삿된 소견을 지닌 사람들은
그럴 이치가 없음에도 그릇 고집하는지라.
마치 아지랑이를 보고서
물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과 같으니,
실제로 물이 없건만, 눈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내가 없음에도 그릇되게
나라는 생각을 내는 것은 다 어둡고 미혹되고
삿된 소견이고 바른 소견이 아니다.」라고 한다.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으로,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존재의 굴레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인도의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이 아트만(atman) 사상은 몸(오음)을 떠나서
<아>가 있다는 것인지, 과거세의 <나>와
환생한 <나>가 같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다시 말해서 육도 윤회에서 업으로 받은 몸이
과거세의 몸과 다르다면
업을 지은 몸과 받는 몸이 다른 것이 되고,
<아(我)>가 사라지지 않고 내세에까지 영원한 것이라면
생사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중론 관사견품》에서 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과거세에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았는가,
이것들은 ‘상주한다.’ (‘무상하다’) 따위의 견해들인데
과거세에 의거하는 것이다.
내가 미래세에 존재하겠는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겠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겠는가,
이것들은 ‘유한하다.’,
‘무한하다.’ 따위의 견해들인데
미래세에 의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릇된 견해이다.」라고 했다.
《문수사리문경》에서는 육도 윤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만약에 내가 있어서 일체 곳에 두루 한다면
이는 다섯 갈래[五道]에 모두 두루 할 것이다.
인도[人]와 천도[天]는 즐거운 곳이고,
지옥․아귀․축생은 괴로운 곳인데,
만약 내가 일체 곳에 두루 한다면
지옥의 괴로움을 받는 내가 곧 인도․천도에서도
괴로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즐거움이란 선업(善業)으로 말미암아 얻고
괴로움이란 악업(惡業)으로 말미암아 얻으며,
즐거움이란 애착을 내고 괴로움이란 진심을 내며,
혹 용맹스럽거나 건장함도 있고 혹 겁내거나
두려워함도 있을 것이니,
이와 같이 모든 상(相)이 다르기 때문에
두루 하지 않은 줄 알아라.
나는 이것을 진실한 관찰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내가 3세를 뛰어넘었다면
과거세는 이미 지나가 등불처럼 사라졌고,
미래세는 아직 다가오지 않아 미래의 등불과 같고,
현재세는 머물지 않아 마치 흐르는 물과 같으며,
나라는 자체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어서 어떤 시절(時節)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절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시절이 없다면 수(數)가 없고
수가 없으므로 나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중생의 마음이란 모은다는 뜻이며,
뜻이란 기억한다는 뜻이며,
의식이란 현재에 안다는 뜻이니,
이 마음과 뜻과 알
음알이로써 헤아리기 때문에 육도가 있고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인연화합으로 지어진 것은 자성이 없다고 했다.
뭇 연(緣)에서 발생한 법(法)은
자성(自性)이 없기에 적멸(寂滅)이다.
적멸이란 이것이 없고 저것이 없는,
상(相)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언설의 길이 끊어져 있고 희론이 소멸해 있는 것이다.
육도란 마음이 지은 것이다.
업식(業識)에 따라 받는 과보(果報)다.
그 업식은 육근과 육경의 화합에서 생한 것이다.
그 식(識)이 자성이 없는 것임에서 벗어나면(깨달으면)
육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육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없는 것이다.
대승(大乘)에서는 ‘3계(界)에 식(識)만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3계(界)란 마음만 있을 뿐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에 대한 총괄적인 명칭이다.
그 마음이란, 서로 응함[相應]이 있는 것이 법이다.
육도(六度)란 업식(業識)의 인과응보에 대한 것이다.
신구의(身口意)에 의한 인과응보를 말하는 것이다.
자성(自性)이 없는 육근과 육경의 인연화합으로
지어진 것이 육식(六識)이니
이 육식(六識)이 짓는 것이 업식(業識)이다.
그러므로 육식(六識) 또한 무자성(無自性)이다.
그러므로 마음 밖에 6진(塵)이 따로 없는데
늘 6진 있는 듯함은 식(識)이 생긴 까닭이니
마치 눈에 백태가 있는 사람이
털이나 두 개의 달 따위를 봄과 같다고 경은 말한다.
육도가 그러하다는 의미다.
초기 경전에서 육도 윤회가 많이 언급된 것은
무아(無我)인 이 몸을 참나로 잘못 알고
미망에 빠져 삼독(三毒:탐진치)의 악업을 짓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일깨우기 위한
부처님의 방편설의 교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진: 경남 고성 보현암과 중국 영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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