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 박문수와 개차법(開遮法)

2024. 4. 3. 12:24경전과교리해설

 

어사 박문수가 한적한 어느 마을로 암행을 나갈 때 일이다.

날은 저물고 하룻밤 잠잘 곳을 찾으러 나갔다가

도적들에게 쫓기는 한 사람을 만났다.

도망자는 박문수에게 못 본 척해달라고 애걸하고는

으슥한 곳을 찾아 급히 찾아 몸을 숨겼다.

뒤이어 칼을 든 우락부락한 도적 떼들이 들이닥쳤다.

박문수를 보자 도적 떼는 험상궂은 얼굴로 칼을 들이대며

「이봐, 지금 지나간....」 하고 말을 꺼내다가

「에이!」하고 그냥 가버렸다.

왜 그랬을까?

어사 박문수는 재치 있게 장님행세를 했기 때문이다.

앞을 못 보는 장님에게 어디로 도망갔느냐고 묻는다면

이는 천하에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박문수의 재치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불교 용어로 개차법(開遮法)이란 것이 있다.

방편을 열어서 살생이라는 중한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개차법(開遮法)이라고 한다.

 

「거짓이 때로는 진실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말이 있지만

어려운 상황을 재치 있게 대치함으로써

위험한 상황을 피해 가는 방편이 개차법(開遮法)이다.

이를 단순히 상황 모면이라는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종교적인 도의 견지에서 보면 중생의 어리석음 일깨워

참된 마음자리를 깨우치게 하는 한 방법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진실과 거짓이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사회의 규범이나

윤리관과 어긋나지 않으면 진실이 되고,

이를 가리고 덮거나 왜곡하려고 하는 것은 거짓이 된다.

양심에 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양심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전통적으로 내려온 사회규범이나 윤리관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인위적이다.

인위적이란 말은 비본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실재가 없는 것이 다수의 이익과 안전

또는 체제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형상화되고

윤리관 내지 정의의 개념으로 정착되어

우리에게 각인되고 전승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런 진리와 거짓의 실체는 없지만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허락하면 그것이 진실이 되고

전통이 되고 규범이 되고 윤리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르시길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해도 그릇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진실일 수 있다.」라고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한 생각이 머릿속에 박히면 헤어날 줄 모른다.

탐욕, 분노, 욕망, 번뇌, 살생 등등 한 생각에 집착되면

외길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세속의 욕망, 번뇌, 괴로움 이 모든 것은

참된 내 마음을 깨닫지 못한 분별 망상에서 비롯된다.

이 분별 망상을 일깨우는 방편이 필요하다.

삶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 끊어질 수 없다.

강물을 거스르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흐르는 물줄기의 방향만 바꾸어주면 된다.

삶의 방향만 바꾸어주면 된다.

그래서 종교는 방편을 만들었다.

지옥을 말하고 천국과 극락을 말함으로써

악행을 막아 선행을 짓게 유도하고,

그 보답으로 천국을 강조함으로써

어리석은 마음의 물줄기를 바꾸는 방편을 만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경전에 있다.<불설정업장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주 오래전 중향세계(衆香世界)의

무구정광여래(無垢淨光如來)라는 부처님이 계실 때

용시(勇施)라는 비구가 있었다.

학식도 높았지만, 금상첨화로 용모도 훤칠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 여인이 용시비구에 반하여 끝내 상사병에 걸렸다,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보전하고 있던 어느 날

용시비구가 탁발을 나오자 그녀의 어머니가

딸을 위해 설법을 해주길 용시비구에게 부탁드렸다.

불자(佛子)라면 자비를 행하는 것이 도리인지라

쾌히 허락하고 설법해주었다.

설법이 효험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나

날이 갈수록 딸의 병은 하루하루 호전되어 갔다.

멀어지면 사랑도 식는다(out of mind)라고 했던가.

멀어지면 사랑이 식지만 <이웃사촌>이라고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 더 정감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듯 혈기 왕성한 비구가 젊은 여인을 자주 만나게 되니

정이 들게 되고, 정이 들다 보니 끝내 음행(淫行)을 저지르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여인에게는 남편이 있었던 모양이다.

멀리 떠나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자 여인도,

용시비구도 둘이 저질은 음행이 탄로가 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둘이 모의하여 음식에 독을 타서

그녀의 남편을 독살해 버리고 몰래 야산에 암장해 버렸다.

 

불교의 율법에는 바라이죄가 있다.

음행, 도적질, 살생, 거짓말인데 이를 4 바라이(波羅夷)라 한다.

이 중 한 가지만 범해도 승단(僧團)에서는

이를 최고의 무거운 죄로 여기고 있다.

형법에서 최고 무거운 죄를 범하면 사형에 처하지만,

종교집단인 승단(僧團)에는

사형에 해당되는 것이 승단에서 축출되는 것이다.

 

용시비구는 한 가지도 아닌

음행과 살생 두가지 파계(破戒)를 저질렀으니

그의 고뇌와 번뇌의 고통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비국다라보살을 찾아가 일심으로 참회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우쳐 훗날 여래가 되었으니

그 여래가 보월여래(寶月如來)라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불설정업장경>에 나온 이야기를 필자 편집했다.

 

사람의 모든 업행(業行)은 인과(因果)의 법칙을 따르게 되어 있다.

나쁜 일을 저지르면 벌을 받게 되고, 선행을 하면 복락을 받게 된다.

그래서 지옥과 천당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와 불교도 지옥과 천당을 만들었다.

불교는 천당 대신 극락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불교에서는 지옥과 극락이라는 말에

해탈과 열반이라는 또 다른 교리가 덧붙여 있다.

그 길의 하나가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는 것이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은 불생불멸(不生不滅)과 같은 의미다.

이는 우리 본래의 마음 즉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그 마음의 실재(reality)를 증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하자면 강변을 걷다 보면

강물에 비친 가로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강물에 비친 가로등은 허상인 줄 알지만

흐르는 그 강물은 진짜로 보인다.

이처럼 우리가 사물을 봄에는 모든 사물은

강물에 비친 가로등과 같은 데 어리석은 마음이

허상을 진짜로 여기는 데 반하여

강물이 진짜로 보이듯 그 그림자를 보는 그 마음은 진짜이다.

 

하나 더 비유하자면 꿈속에서 살인을 저질렀는데

깨어나서 보니 꿈이었다.

꿈속에서 살인을 저질은 마음도 내 마음이요,

깨어나서 꿈인 줄 아는 마음도 내 마음이다.

꿈을 깨고 나면, 허망한 분별 망상에서 깨어나면

살인도 없고 살인자도 없다.

내 본래 마음이 검은 장막에 가려지면

살인도 일어나고 분노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 장막이란 또한 사념의 구름, 편견, 선입관, 허튼 지식들,

오욕의 구름들, 이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이런 모두가 분별 망상이다.

어리석은 중생이 분별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음에

불법의 방편을 통하여 무생법인을 깨닫게 함으로서는

본래 마음자리. 즉 진여의 본 자리로 돌아가게 함이니

이 또한 개차법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