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 (제4부) 자등명 법등명의 소고(小考)
2024. 3. 14. 12:23ㆍ경전과교리해설
아주 오래전 양산의 모 절에 머물 때 이야기다.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의 도반인 친구 몇 분과
친분이 있는 몇 신도와 함께 좌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모처럼 만난 탓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교와 연을 맺게 된 각자의 동기가 화제가 되었다.
모두가 이미 한세상을 살아 온 사람들,
그것도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라
거리낌 없이 허심탄회하게 각자 인생 살아온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스님은 부모가 돌아가시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절에 머물다 스님이 되었다고 하고,
어느 스님은 젊은 시절에 사업이 망해
도피 겸 의지한 곳이 절이라 머뭇거리다 보니
절이 좋아 스님이 되었다고 했다.
늦게 출가한 연세 지긋한 스님은 죽음이 두려워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또 어떤 스님은 하는 일마다 되는 것도 없고,
돈도 못 버니 마누라의 구박도 심해
모두 다 팽개치고 절에 들어왔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내게 질문이 떨어졌다.
「처사는 어떤 연유로 불교와 인연이 맺게 되었나요?」
「내 꼬라지를 알고 싶어서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자
모두들 폭소를 터트렸다.
「내 꼬라지를 알고 싶다」
이 말은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 뭐꼬?>라는 화두를 완곡하게 내 나름대로 말한 것이다.
<살고는 있는데 나는 누구이며,
삶이란 것이 어떤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다.
짧은 인생에 긴 하루를 보내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태어났으니 인생 여정을 마치는 날까지
그 여행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 아닌가.
삶도 그렇지만 모든 여행이 그렇듯,
가고 싶은 목적지가 있다면,
그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교통수단도 있어야 한다.
가령 섬이나 먼 외국이라면
비행기나 배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국내 여행이라면 자동차나 버스 기차 등
교통수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목적지도 다르고,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다를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교통수단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길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스승을 찾고, 유명한 철학자나 지식인들을 찾아가고,
절이나 교회를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삶의 목적지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세월의 무게를 느끼는 나이가 되면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도(道)란 무엇이며 그 도를 찾아 떠나는
수행자들은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는 배는 등대 불빛이 의지가 되고
깊은 산중을 헤매는 여행자에게는 나침판이 의지가 되듯
도의 길을 가는 수행자에게는 스승이 의지처가 된다.
그런데 그 등댓불이 꺼지고, 나침판이 고장 나고,
따르던 스승이 떠나면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이는 쿠시나가라의 성 밖, 사라 나무숲 속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남긴 부처님의 유촉(遺囑)이다.
동국역경원에서 발간한 <불교성전>에서는 이를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중략~」
라고 풀이하고 있다.
도의 길에 의지처는 자기 자신이며, 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마음을 뜻하며,
법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 마음이란 곧 진심(眞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등명(自燈明)은 곧 진심을 깨달아
그것에 의지하라는 의미가 된다.
법등명(法燈明)은 진심(眞心)의 법에 따라
행함을 근본으로 삼으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그 진심(眞心)은 어떻게 깨닫는가?
진심(眞心)이란 눈으로 보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야만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自己>란 오음의 화합물인 <自己>를 말한 것인가?
이것이 <자기>라면 이는 <假我>이며 <에고>일 뿐이다.
이런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自我> 라고 여겨는 이 마음이란
과거의 경험. 과거에 배워 온 것,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에서 축적되어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아란, 무엇인가 되려고 하는 욕망,
그것을 추구하는 노력, 경쟁심
이러한 정신작용 전체가 자아이며,
이와 같은 정신작용은 자기를 타인으로부터 분리하고
자기 자신을 격리하려는 주인공이 에고요,
자아(自我) 라는 의미이다.
그런 에고의 마음이 권위, 명예, 부에 대한 욕심과 야망,
출세, 지식, 전통, 믿음 등에 대한 갖가지 외부적인 행동이나
내적인 정신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삶을 살아가는 데 안전을 확보해 주는,
편리한 방편은 되겠지만 에고에 만족을 가져다주는
자양분이 될 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세속적이라고 말하고,
거기에 몰입하는 자를 일러 에고이스트라 부르는 것이다.
유촉의 의미가
이런 에고의 마음을 나의 등불로 삼으라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특히 이런 에고의 마음은 종교, 철학과 논리,
믿음에 의지하여 현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방어할 이유를 찾고 합리화를 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철학자, 유명 지식인, 논리학자,
종교가들이 말하는 말에 탐닉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말의 상징이 실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듭거듭 반복되면 반복을 통해
자동으로 최면에 걸리게 되고,
계속된 반복으로 관념이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
러나 그 믿음은 진심(眞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아(假我)요, 에고인 것이다.
진심(眞心)이란 <능엄경>의 설명을 따르면
「허망한 것을 떠난 것을 진(眞)이라고 하고(離妄名眞),
신령하게 밝히 보는 것을 심(心)이라(靈鑑曰心) 한다.」
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眞은 離妄, 즉 헛된 것,
그릇된 것, 진실하지 않은 妄을 떠나서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이
<참되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에고의 욕구는 특별함 내세우기 위해
영적으로 어떤 것을 입증하고자 하는
에고이스트들도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이기를 원하는 자, 특별하기를 원하는 자,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 자,
영적 힘을 얻고자 하는 그런 자들이 많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유촉에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한 것>은
진심이 아닌 것은 모두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전통이나 그
어떤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오고,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얻어져 삶의 일부분이 되고 피와 살이 되어
나의 존재 속에 순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학자(道學者)를 보자.
그들은 도(道)의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도의 철학>을 믿는 자다. 철학과 교리만을 믿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철학에 따라서 삶을 영위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음미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가슴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일어나지도 않았다.
철학과 교리라는 것은 무지개, 꽃, 해, 달 별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은 시각장애인이
거기에 대해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과 같다.
때로는 정상인 사람보다도
더 합리적으로 정확하게 말할 수도 있다.
서울을 안 가본 사람이 가본 사람을 이긴다는 말처럼.
그들이 경전이나 성경의 기록을 보고는
부처나 예수의 일을 정확히 되풀이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기억에 의한 반복일 뿐이다.
진심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믿는 에고는 그래서 빌려 온 자아라고 한다.
에고는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다른 이들에, 공공(公共)의 의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시중에 이른 말이 있다.
「여자가 혼자 말하면 독백이지만 둘이 말하면 카탈로그가 된다.」 고.
그래서 전통이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이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말을 한다고 해서, 경전이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얻은 지식은 쓸데없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지식은 단지 피상적인 것임을 이해할 때
<가아(假我)> 가 아닌 <진아(眞我)>라는 변화가 일어난다.
에고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마음의 등불이 커진다.
지식을 통해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그런 마음,
지식을 통해 우월감을 느끼고 모르는 사람보다
지식을 통해 자신을 상류층에,
지성인으로 낄 수가 있다고 느끼는
그런 마음들이 허상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지식은 에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확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식에 투자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승들은 지식이라는 습관은
인간이 가진 가장 고전적인 습관이며
또한 가장 위험한 습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우화가 있다.
홀로 사는 한 노파가 아들 내외가 사는 집으로 찾아왔다.
한 일주일 동안은 아들 내외는 반가운 마음으로 함께 즐겁게 보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갈 낌새가 보이지 않자
두 부부는 불편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옆에 있어 계속 신경이 쓰이고,
며느리는 자유롭게 살다가 간섭받아 가며
시부모와 함께 지낸다는 것이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들 내외는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본가로 돌아가게 할까 하고 방법을 생각하다가
한 꾀를 내었다. 거짓 부부 싸움을 벌이면 어머니가
어느 한쪽을 편을 들 수밖에 없을 테니
그렇게 되면 적어도 아들 내외 어느 한쪽에
미안함 감을 느껴 당연히 떠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다음날 아들이 아내에게 커피를 한잔 끓여 오라고 했다.
아내는 커피를 끓어 내오면서 일부러
소파에 부딪혀 남편의 바지에 뜨거운 커피를 쏟아버렸다.
화들짝 놀란 남편은
「여자가 왜 이리 경박해! 항상 들렁들렁하더니
그 버릇 여전하구먼.」 하고 핏잔을 주었다.
그러자 아내도 질세라
「내가 당신 하녀요. 커피 정도는 당신이 끓일 수도 있잖아요?
말 좀 가려서 하면 안 돼요?」
하고 목소리를 높여 대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시어머니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어머니, 내 말이 맞지 않아요.
요만한 일로 이렇게 수모들 당해야 해요?」 하고.
그러자 어머니가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난, 누구 편도 들지 않으련다.」 그리고 이어서
「난 그저 앞으로 두서너 달만 있다 가련다.」
진심(眞心)은 세상의 소리를 쫓아가지 않는다.
그것이 누구의 소리라 할지라도.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진리를 등불로 삼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진심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진심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름도, 모양도 없다. 단지 감응에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무어라 정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은 설명이 없다.
모든 설명은 사후약방문이다.
철학은 설명을 하고 있기에 생명력이 없다.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정립된 것은 과거이며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진심은 죽은 자가 깨닫는 것이 아니다.
자등명(自燈明)은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순간에 자신의 마음에서 찾는 것이다.
진리의 길은 들어가는 문이 없다.
문이 없다면 모든 길이 진리의 길이다.
그래서 도(道)란 것은 길 없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길과 목적지가 하나임을 의미한다.
만일 당신이그 길 위에 있다면
당신은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의 아름다움이다.
길과 목적지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여행과 목적이 일치하기 때문에,
즉 여행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길 위에 있다면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道)의 의미이다.
진심(眞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등명(自燈明)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옛 선승들은 삶의 길을 묻는 것은
허황된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속의 물고기가
목마르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광저우 육용사 탑)
도(道)는 길을 의미한다.
즉 길 자체가 목적이며 수단이 곧 목적이고
그밖에는 다른 어떠한 목적도 없다.
만약 목적지를 갖게 될 때 거기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목적지를 갖게 될 때
거기에 대한 준비가 따른다. 그리고 시간, 방법,
기술, 미덕, 인격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도 항상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걱정하게 될 것이다.
도달할 수 있을까? 없을까? 다시 길을 잃지는 않을까?
이러한 두려움 걱정 근심들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목적지가 미래의 것이기 때문이다.
길이 목적지일 때 거기에는 어떠한 미래도 없다.
그때 미래는 파괴되고 시간은 사라진다.
내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자등명(自燈明)이란 먼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진리라 무엇인가?
그 질문의 답은 목적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은 미래다.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미래가 만들어 지면 마음의 트릭이 생기고
수많은 이정표를 만들게 된다.
길과 목적지가 분리된다.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에 마음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에고가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욕망이 생긴다.
욕망에서 벗어난 마음은 바로 자유 자체이다.
욕망이 없는 마음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어떠한 계획도 바램도 갖지 않는 마음이
바로 바다에 도달하게 된다.
삶은 분리되지 않은 전체 즉 하나로 보라. 그것이 진심(眞心)이다.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
귀와 눈을 위한 달콤한 소리, 감미로운 소리,
쓴 소리에도 의지하지 말라.
의지해야 할 것은 바로 지금 나 자신의 마음이다.
현재의 내 마음을 등불로 삼고,
내 마음의 진심(眞心)에 따라 거기에 의존하라,
그 진심이 일러주는 대로 행함이 바로 진리다.
그 진리의 등불에 의지하라.
그래서 부처님이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라는 유촉을 남긴 것이다.
@사진: 중국 광저우탑과 진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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