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6) 삼세육추(三細六麤) 와 분별심

2024. 3. 24. 10:38경전과교리해설

사람 마음은 알쏭달쏭 요지경(瑤池鏡)이다.

한번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자.

저런 몹쓸 짓을 한 살인자는 사형시켜야 마땅하고 여기다가

금방 사형은 너무하지 하고 자비심을 일으킨다.

살인자가 선인으로 돌변한 것도 아니고,

보는 내가 둘이 아닌데 왜 그럴까?

내 마음이지만 이랬다저랬다 하는 내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어디서 그런 마음이 왔는지,

어느 무의식층의 한 부분에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다.

내 마음이지만 알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이다. 요지경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대승불교에서는 마음을 法이라고 표현한다.

법이란 곧 사람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의 사물(世間法)과 관념(出世間法) 등이

그 존재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우리 마음은

항구불변(恒久不變)한 한결같은 마음과

움직이는 마음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자를 <心眞如門>이라 하고 후자를 <心生滅門>이라고 한다.

생멸문은 항구불변한 마음이 생멸하는 마음과 더불어 있지만

그 둘은 각각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이 아니어서

이것을 아뢰야라 부른다.

이 아뢰야식은 <깨달은 마음(覺)>과

<어리석은 마음(不覺)>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깨달음이란 마음의 본체가

그릇된 생각을 떠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릇된 생각이란 있는 그대로

진여가 하나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과거 경험. 배워 온 것,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이다.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쌓여온 관념, 기억,

경험, 야심, 욕망 등이 쌓여 작용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깨닫지 못한 마음(不覺)이다.

깨달은 이 마음을 眞如라고 한다.

진여란 항구불변한 한결같은 마음이다.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다.

마음의 본성은 동요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다.

바람이 불면 바다에 파도가 인다.

그러나 파도와 바닷물의 습성(濕性)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일체 모든 현상은 오직 妄念에 의지하여 차별이 있게 된다.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 경계의 모양이 없게 된다.

일체 사물의 현상은 근본부터 말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문자나 개념으로서 알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분석적인 사변(思辨)이 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한결같으며 변화도 파괴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본래의 이 마음의 속성이기 때문에

이름을 眞如라 한 것이다.

眞如란 말은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 붙여진 이름이며,

이 말을 가지고 그 밖의 모든 다른 말의

無用性을 가리키는 말에 불과하다.

모든 말과 표현은 실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본체를 보여주기 위하여 빌려 쓴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의 내 마음을 깨닫지 못한 그릇된 마음을 말한다.

깨달은 마음을 본각(本覺)이라고 한다.

깨닫지 못한 마음을 불각(不覺)이라고 한다.

그릇된 마음이란 갖가지 환상과 꿈,

그리고 욕망이 축적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히고 얻은 지식이나,

경험 등을 통하여 쌓아온 관념이나 이해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깨달은 마음도 <나>요, 깨닫지 못한 마음도 <나>이다.

이는 마치 길을 가는 사람이 방향을 의지하고 가지만

방향을 잘못 잡은 것과 같은 것으로,

깨달은 마음과 깨닫지 못한 마음도 <나>의 마음이다.

 

이 깨닫지 못한 마음의 인식 작용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교리가 <삼세육추(三細六麤)>라는 교리다.

『대승기신론』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삼세(三細)란 것은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상(相)이요,

육추(六麤)란 지말무명(枝末無明)의 상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근본불각(根本不覺)으로부터 생겨난

세 가지 미세한 상과 다시 경계를 연(緣)으로 하여 일어나는

여섯 가지 추(麤)한 상을 말한다.

세(細)는 너무 미세하여 드러나지 않음을 의미하고

추(麤)는 드러남을 의미한다.

 

깨닫지 못한 마음(不覺)에 의지함으로

마음이 움직여 3가지 業相을 일으킨다.

하나는 어리석음이 일으키는

최초의 잠재적 충동 즉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니

불각(不覺)을 의지하여 마음이 동요하는 것을 업(業)이라고 한다.

깨달으면 곧 동요가 없고, 동요하면 괴로움이 있게 되는 것이니

결과는 원인을 떠나지 않는다.

둘은 나(我)라는 주체가 나타나는 능견상(能見相)이니

동요함을 의지함으로 <나>라는 생각이 나게 되는 것이다.

동요하지 않으면 곧 내가 없는 것이다.

셋은 내가 생각하고 봄으로 나타나는 境界相이니

이는 능견상을 의지함으로 경계의 망념이 나타나는 것이다.

나의 견해를 떠나면 곧 경계가 없어진다.

 

경계가 있으므로 다시 6가지 모양이 차례로 생기게 된다.

하나는 지상(智相)이니 경계를 의지하여

마음이 일어나 사랑하고 미워하는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다.

둘은 상속상(相續相)이니 智相을 의지하여 생긴다.

이미 생긴 愛憎이 계속되어 苦다,

樂이다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셋은 집취상(執取相)이니 相續相을 의지하여 생긴다.

앞의 상속상 때문에 인연 따라 경계를 생각하고

苦樂의 경계에 대한 집착을 일으켜 가는 모습이다.

넷은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집취상에 의지하여 허망 집착의 생각이 더욱 커지면

다시 그 위에 헛된 名字語句를 세우고

조잡한 아집을 세우는 것이다.

다섯은 기업상(起業相)이니 名字를 의지하여 생긴다.

이상의 모든 상은 생각으로 일으킨 업상인데

起業相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 善惡의 두 가지 업을 짓는다.

여섯은 업계고상(業繫苦相)은 기업상을 의지해서 생긴다.

업을 지으면 그것을 원인으로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그 결과가 우리로 하여금 고통 속에 속박하여

자유롭지 못하게 함으로 업계고상이라 한다.

 

삼세육추(三細六麤)는 깨닫지 못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의 인식 작용을 설명한 것이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속성은 사물을 둘로 구분하는

만성적인 습관을 지니고 있다.

신과 세상, 육체와 영혼, 높음과 낮음, 선과 악 등등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습관이 되어 있고,

또 긍정보다 부정적인 것에 습관적으로 익숙해 있다.

이것들은 모두 분별심에서 기인한 것이다.

분별심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우리가 쌓아온 인식의 필터를 통해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마음에서 생기는

분별심 때문에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禪의 바이블로 회자하는 <信心銘>을 보면 첫 구가 이렇게 시작한다.

「至道無難(지도무난) 唯嫌揀擇(유혐간택)」

도에 이르는 길은 어렵지 않다. 오로지 간택심을 멀리하라는 의미다.

간택(揀擇)이란 분별하는 마음이다. 선택하는 마음이다.

분별하는 마음은 생멸문의 어리석은 마음(不覺)이다.

이 어리석은 마음에서 모든 불행, 행복, 혼돈, 슬픔, 기쁨,

야망, 우월성 등 갖가지 번뇌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분별은 선택하는 마음이다. 선택은 구속을 뜻한다.

선택하지 않음은 자유를 뜻한다.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올가미에 걸린다.

시비(是非), 선악(善惡), 희비애락(喜悲哀樂)이라는

번뇌의 올가미에 걸리게 된다. 선택은 가치 부여를 하게 된다.

선택된 그것과 同一化가 된다. 잠의 최면술적인 상태에 빠진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요지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은 지속적이고 또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순간적이다.

마음이 생명을 부여한 것은 어떤 것이든지 순간적일 수밖에 없다.

마음이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말은 주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옳다,

그르다 등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이렇게 생명을 부여한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다.

 

주관적으로 해석이 끝났을 때 마음은 이미 변해버렸다.

가령 어떤 사람의 행위를 두고

“저 행위는 성추행이다.”라고 단정하는 순간

마음속에는 “아니지. 성추행으로 보기는 좀 과한 게 아닐까?”라는

다른 생각이 바로 이어서 일어난다.

우리 마음은 찰나 찰나에 변하기 때문이다.

《인왕경》에 의하면 사물은 1초에 216,000번 생성했다가 소멸하며

우리 마음은 1 찰나에는 9백 번의 생멸(生滅)이 일어난다고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권136)에는

1 찰나를 시간상으로 계산하면

75분의 1초(약 0.013초)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한 생각을 내는 데는

0.013초 동안에 9백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우리는 <내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내린 주관적인 한 생각이

더 이상 해석을 지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똑같은 상황과 환경 속에서는

마음은 두 가지의 연속적인 순간을 지속시킬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한 생각이 들어오면 찰나이지만

그것을 비운 다음에야 다음 생각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렇게 찰나 찰나에 변해가고 있다.

마음은 하나의 흐름이다. 그 흐름은 순간순간 변한다.

<이 여자 이쁘다>라고 느꼈을 때는

이미 마음은 9백 번의 생멸이 일어나 변해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언을 선택하면

그것의 인정(認定)이라는 올가미에 걸리게 된다.

선택하게 되면 그 선택한 것과 하나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가 된다는 말은 선택은 가치 부여(同一化)를 낳는다는 의미다,

가치가 부여되면 우리의 인식은 상징화되고

마치 절대적인 진실로 여겨지는 상태가 된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 순간,

분별심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삼세육추의 계명자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름답다>, <추하다>, <좋다>, <나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아름답다> 이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스스로 올가미를 씌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 스스로 만들어 낸 관념일 뿐이다.

나 자신의 이미지일 뿐이다. 이것은 실제적이 아니라 심리적이다.

<더러움>과 <깨끗함> 등등 이런 상대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 낸 주관이요 사념일 뿐이다.

 

@생멸문의 마음은 움직이는 마음이다. 어리석은 마음(不覺)이

움직이는 것, 가고 오는 환영이다.

환영이란 내 마음속에 일어나 사라지는 망념(妄念)이다.

푸른 하늘을 가리는 구름처럼

청정한 본래 마음을 가리는 사념(思念)이다.

 

깨달음이란 우리 인간 마음의 본체가

그릇된 생각들을 떠나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릇된 이 생각 저 생각이 없는 것이

마치 虛空界와 같아야 한다.

차별적인 이 세계가 평등한 하나의 모습으로

이해되는 경지에 올라야 한다.

삼세육추(三細六麤)는 어리석은 중생,

깨닫지 못한 중생을 일깨우기 위한 가르침이다.

 

깨달음을 성취하려면 모든 분별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달마대사도 이르지 않았는가.

「外息諸緣(외식제연) 內心無喘(내심무천)

心如障壁(심여장벽) 可以入道(가이입도)」 라고.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내려놓고, 안으로는 헐떡거림을 쉬어라.

마음은 오로지 벽처럼 가지면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다.

 

마음에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난다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나쁜 것과 좋은 것의 구별은 名字相 즉 언어의 한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도 명자상의 의거한 思考의 영역에 불과하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도 심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옥과 천국이 존재하는 곳은

그대의 탐욕과 두려움 속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환영이다.

깨닫지 못한 마음(不覺)에서 일어나는 환영이다.

마음에 티끌만 한 의문이 생겨도,

분별심이 일어난다면 깨달음의 경지에 나아갈 수 없다.

삼세육추(三細六麤)는 어리석은 마음(不覺)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진: 해남 달마산 도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