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제3부)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대한 소고(小考)

2024. 3. 9. 00:06경전과교리해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은

붓다의 탄생게(誕生偈)에서 나오는 말이다.

경전에 따라 이어지는 레토닉(retoric)이 다양하다.

파리어 경전에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라고 했다.

번역하면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고, 삼계가 고통 속에 있으니

내가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라는 의미다.

한역 『장아함경(長阿含經)』에서는

“천상천하 유아위존 요도중생 생로병사

[天上天下 唯我爲尊 要度衆生 生老病死]”. 라고 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내가 존귀하다.

요컨대 나는 중생들을 생로병사에서 건질 것이다.’라는 뜻이다.

 

<천상천하(天上天下)>는 좁게 보면 중생이 사는 이 세계가 되고,

넓게 보면 삼계(三界)가 된다.

삼계(三界)를 내용상으로 보면 육도(六道)로 세분되는데,

육도란 중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태어나는 존재 양상을

여섯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육도(六道)란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天)을 말하는데

이곳에서 말하는 곳은 부처의 탄생게(誕生偈)이므로

인간계를 한정해서 볼 여지는 있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서응경(瑞應經)》上을 보면

<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홀로 높다.

삼계(三界)가 모두 고통인데 어찌 즐거워할 수 있을까?>

라고 하였고,

《인과경(因果經)》一 에서는

「보살은 곧 문득 연화 위에 떨어저도

부지(扶持)하는 자 없이 스스로 칠보(七步)를 걸어가서

그 右手를 들고

<나는 일체 인간 중에 가장 높고 가장 勝 하다.

무량한 생사가 이제 다했구나.

이생에서 일체의 人天을 이롭게 하리라>라고

사자후를 토했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로써 여기서 말하는 <천상천하>는

인천(人天)의 세계를 두루 포함하고 것임을 알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아우르는 소리라면

이는 인천(人天)의 모든 중생을 위한 소리

즉 진리의 외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경의 의미를

문자에만 집착하여 한 인간의 소리,

불교의 교주로서 하는 소리로만

이를 이해하면 경의 본래 의미를 벗어나게 된다.

 

@선가(禪家)의 이런 공안(公案)이 있다.

“세존께서 태어나셨을 때 일곱 걸음 두루 걷고서

사방을 둘러본 후,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할 뿐이다.’

이에 운문 문언선사(雲門文偃禪師, 864~949)가 평하기를

“내가 당시에 그 광경을 보았다면, 한 방에 때려죽이고

개에게 먹이로 주어서 천하의 태평을 도모했을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의

『선문염송(禪門拈頌)』 2칙

세존주행(世尊周行)에 나오는 이야기다.

 

메뉴는 음식이 아니다. 말은 단지 메뉴에 불과하다.

모든 성서(聖書)라는 것도 말이다.

그러므로 현자들의 말일지라도 말은 위안이나 위로

또는 열중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진리를 감응하는데

혁신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목적지를 알려주는 지도일 뿐이다.

진리의 접근이 명상적이라면 종교적 접근은 정치적이다.

진리의 접근이 개인적이라면 종교적 접근은 사회적이다.

보수화된, 집단화된 종교는 더욱 그렇다.

집단화된 사회는 체제 유지를 위해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지식과 교육, 전통, 도덕, 양심, 계율, 야망, 개념,

이데올로기 등 많은 것을 요구한다.

성경이나 경전을 비롯한 모든 성서(聖書)는

관련 추종자나 신봉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지자나 스승을 교주화시키고

신성화(神聖化)시키는 것도 상례다.

그렇다고 세상에 내가 제일 고귀하다,

신보다도 높다고 어느 사람이 그렇게 외친다면

이 얼마나 교만하고 방자한 소리로 들리겠는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이 말도

부처를 그런 종교적인 접근에서 이해된다면 어찌 용납되겠는가?

 

이런 우화가 있다.

 

어느 오페라 극장에서 졸고 있던 한 사내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제발 코를 좀 골지 마세요> 안내인 간청하듯 말했다.

<당신은 지금 다른 사람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것 바요> 사내는 성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돈을 내고 이 좌석을 산 거요.

그러니까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소>

<그건 그렇습니다> 안내인이 대답했다.

< 하지만 선생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을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물론 어느 집단이라도 체제 유지와

개념과 이데올로기 때문에

전체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돌출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리의 소리이든 아니든 간에.

 

마음이 지식을 모으고 믿음을 쌓는 일은 무척 쉬운 일이다.

그것은 아무런 위험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무척 쉬운 일이다.

그래서 교회를 가고, 성당에 가고 절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가 아닌 불교도인의 소리가 있고,

예수가 아닌 기독교인의 소리가 있는 것이다.

이 공안은 그런 외침,

소리에 쫓아가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진리란 어떤 특정한 공간이나 한정된 시간 속,

어느 특정한 사람의 말이나 집단을

대변하는 소리가 아님을

이 공안은 반어법적(反語法的)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 경에 따라서 독존(獨尊)과 위존(爲尊)이 혼용되고 있는 데

그 의미를 살펴보자.

尊의 자원을 보면 <貴> 라는 의미, <高> 라는 의미가 있다.

또 어른을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공경>이란 의미가 있다.

위의 설한 <인과경>에서는 이를 <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느 것으로 풀이해도 그 문맥의 의미로 보면

대동소이(大同小異) 하지만 문제는

독존(獨尊) 앞에 붙은 독(獨)의 의미이다.

독(獨)은 오로지, 유일한 것, 둘이 아닌 절대 하나를 의미하다.

위존(爲尊)의 존(尊)이 보편적인 의미에서 말한 것이라면

독존(獨尊)은 그 어느 것과 비교될 수 없는 존(尊)이라는 것이다.

가령 외아들이 생부인 아버지를 존귀한 분으로 여기는 것과

다른 집의 아들이 생부가 아닌 그를 존귀하다고 여긴다고 해도

이는 엄연히 다른 것과 같이

신성(神聖)이나 존귀함을 논할 때

기독교인이 보는 부처와

불교도인이 보는 예수는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보편적인 감정으로 말하는 존귀는

상대에 따라, 인연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탄생게>에서 말하는 <獨尊>의 의미는

이러한 상대적인,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존귀함이 아니라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상대를 초월한 절대적인 존귀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살펴보자.

우리가 누구를 평할 때 그 사람은 참 독특(獨特)하다거나

특별(特別)하다는 말을 사용한다.

獨特하다는 말과 特別하다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혼용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누구를 獨特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

독특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이 특별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特別하다고 말할 경우는 누구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뛰어나 있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특별함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고,

독특함은 결코 비교를 수반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일례로 아프리카인 피부가 검은 것은 독특한 것이지

특별한 것은 아니듯 독특함은 본래적 의미를 띄고,

특별함은 관계적,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가 자신을 특별하다고 주장할 때는

다른 사람보다 더 고귀하고 우월하며

다른 사람은 비천하고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에서 <유아독존(唯我獨尊)>의 <독존(獨尊)>은

일반적, 세속적인 의미의 이런 특별한 귀함(尊)이 아니라,

비교될 수 없는 본래적 의미에서 절대적인,

독특한 의미에서의 존(尊)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에서

이 말은 인간계에서 존귀하다는 그 어떤 존귀함보다도,

또 천상계의 신들이 누리는 어떤 존귀함보다도

비교될 수 없는 더 귀(貴)하고,

더 높은 절대적 尊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를 뭇 중생들로부터 공양받을 만한 성인이라 하여

응공(應供)이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유아(唯我)의 의미를 살펴보자.

<온 세상에 내가 제일 존귀하다>는

<나(我)>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교학에서는 <我> 를 <眞我> 와 <假我> 2가지로 분리한다.

진아(眞我)는 실아(實我)라고도 부른다.

인도 철학에서 아(我)를 아트만 [ātman] 이라 부른다.

불교사전에 따르면,

1)實我는 인도 외도가 주장하는 것으로

범부의 妄情에 상대하여 존재하는 我의 思想을 말한다.

2)불교에서는 오온(五蘊)의 화합을 가리켜 假我라 하여

실지로 있는 我體가 아니라 한다.

<佛地論一>에 <내가 말한 모든 蘊은 假我다> 라고 했다.

다시 말해 오온의 화합체인 나는 실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智度論 一>에 <불제자들은 비록 我가 없음을 알고도

俗法에 따라 我를 설하나 實我는 아니다>라고 했다.

3)眞我는 대승에서만 쓰는 말로

열반의 四德인 常樂我淨의 我德을 말한다.

眞으로 성품을 삼기에 眞我라 한다고 했다.

 

 

우리가 <나> 라고 여기는 이 실체를

불교에서는 오온(五蘊)의 화합체라고 한다.

오온(五蘊)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인연으로 화합된 것을 의미한다. 색(色)은 물질을 의미한다.

인연으로 조합된 것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게 된다.

오온은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다 사라지게 된다.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실재(實在)가 아닌 비실재(非實在)다.

비실재(非實在)란 단멸하는 존재란 의미다. 환영이다.

그래서 가아(假我)라 한다.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은 이 <가아(假我)>이다.

이 <가아(假我)>를 우리는 자아(自我)라고 여기고 있다.

심리학에서 자아(自我)는 곧 에고(ego)를 의미한다.

에고란 인식과 행동의 주체자라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인식의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나>의 실체를 <진아(眞我)>와 <가아(假我)>로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사고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물을 둘로 구분하려는 우리 인식의 만성적인 습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동전이 앞과 뒤가 있다고 해서 두 개의 동전이 아니듯,

<나>라는 존재를 인식함에 <眞我>와 <假我>로 둘로 분류하지만

<나>는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인 것이다.

다만 <假我>는 밖으로 드러나 있고,

<眞我>는 내 안 깊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 숨어 있는 것을 찾는 것은 비유하자면

군대의 암호와 같은 것이다.

전쟁터에서 수색대가 본진으로 돌아올 때

초소에서 암호를 알면 본영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모르면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세속의 삶에서 의식이 깨어 있으면 <진아>를 알게 되고,

잠들어 있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숨어 있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참선, 명상 등 수행을,

암호는 깨달음을 비유한 것이다.

 

꿈속에서 깨어나면 꿈속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듯 우리가 <진아(眞我)>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삶이 허망하고 환상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의식이 잠들어 있는 이것을 불교에서는 無明이라고 한다.

 

중생들은 삶은 공허하다고, 세상이 허망하다고 한다.

모두가 환상이요,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상도 세상을 보는 <나>도 환상이고,

비실제라면 삶은 무슨 의미가 있고,

진리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보는 나도,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도 정말 환상인가?

하나 분명한 것은 <보는 자> 이외에는 모든 것이 환상이다.

보는 자 이외에는 모든 것이 꿈이다.

오로지 아는 자만이 진실하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 환상이지만 보는 나는 환상적이 아니다.

우리는 밤에 한 형태의 꿈을 보았다면

낮에는 다른 형태의 꿈을 보게 된다.

밤에는 낮의 꿈들이 잊혀지고,

낮에는 밤의 꿈들이 잊혀진다.

우리는 때때로 눈을 뜬 채 꿈을 꾸기도 하고,

때로는 눈을 감고 꿈을 꾸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의식만은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는다.

밤이 낮으로, 낮이 밤으로, 꿈이 생각으로,

생각이 꿈으로, 모든 것이 변하지만

한 가지 즉 보는 <나>만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영원한 것은 진실하다.

영원하다는 것은 生滅을 초월했다는 의미다.

진실이란 생로병사와 같은 일체 번뇌를 벗어나 있다는 의미다.

반면 변하는 것은 환상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이란 영원히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상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단지 순간적이다.

 

@ 다른 한 예를 들어 보자. 거울 앞에 서면 <나>의 영상이 비친다.

거울 앞에 비친 영상은 진실이 아니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 역시 진실이 아니다.

단지 한 가지 즉, <내가 거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인식>과

<거울이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의식만이 진실이다.>

보는 내 의식을 다른 <나>가 그 의식을 보는 것이다.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그 초월적인 의식만이 진실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여기서 말하는 <나>는 내가 지금까지

<나>라고 여긴 <나>가 아니라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나> 자신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나>로 알고 있는 그 <나>는

외부 세계에 속하고, 외부 세계와 마찬가지로 비실제적이다.

다시 말해 이는 의식의 내면세계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더 실제가 되고

그 중심에 서는 순간 진리 자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라고 여긴 <나>는

모든 환상 모든 꿈과 욕망이 축적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나>는 지금까지 나라고 여겨왔던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것은 영원한 <나> 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나>가 떨어져 나갈 때

실제의 <나>가 일어난다.

자아가 사라질 때 실제의 자아가 다가온다.

<假我>가 사라질 때 <眞我>가 드러난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眞我의 본질은 어디서 온 것이 아니다.

<나>의 심연(深淵)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나>의 것도 아니고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그것은 모두의 것이며 모든 것의 중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중생의 본질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일체 사물의 본질과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온 세상에서 내가 제일 존귀하다>를 말한 것은

바로 이 우주의 중심, 만물의 본질을 깨달은 자가 <나>이며,

<나>는 곧 진리라는 의미다.

그 깨달음의 진리는 무엇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로, 무등(無等), 무상(無上), 최고(最高)의 진리임으로

존귀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탄생게에서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한 것이다.

 

@사진: 구채구 진주탄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