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팔정도(八正道)의 정(正)의 의미

2024. 1. 31. 17:09경전과교리해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 있다.

선가(禪家)의 말을 빌리자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의미다

불교 공부를 하다가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난삽(難澁)한 교리의 체계를 따라가다 보면

핵심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쉽게 말해 달을 쳐다보려다 목이 휘어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용인 와우정사에서)

 

일례로 팔정도(八正道)에 대한 교리의 설명을 보자.

『팔정도(八正道)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 정정(正定)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대승불교권에 속하지만,

불교를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팔정도에 의하여 수행하고 생활하게 되어 있다.

이 팔정도는 팔지성도(八支聖道)라고도 하며,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道)’라는 의미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쉽게 설명하면 입으로 짓는 것, 몸으로 짓는 것,

마음으로 짓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하면 될 텐데

이를 8가지로 복잡하게 분류하고,

교학에서는 다시 이것을 사념처,

18계, 업의 연기 등으로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팔정도를 설명하는 말의 앞에는 <정(正)>을 붙여 놓았다.

입으로도 정(正)을 행하고, 몸으로도 정(正)을 행하고,

마음으로도 정(正)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正)을 앞의 말에 붙인 참 의미가 무엇일까?

 

(진천 보탑사에서)

 

정(正) 은 <바르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바르다는 것은 어느 한쪽에 기울여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허공의 줄타기와 같이 어느 한쪽으로 기우면 줄에서 떨어지게 되는 것처럼

양극단(兩極端)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정(正)이란 의미이다.

반대편으로 움직이지 말고 양극단으로 치닫지 말고

중간에 머물러 있어라는 의미가 팔정도의 정(正)의 의미이다.

이는 곧 불교의 핵심 교리인 중도(中道)를 의미하는 것이다.

 

(은평 수국사에서)

 

우리의 마음은 한쪽 편에서 다른 편으로 옮겨가는 습성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보고 실컷 먹어보고 싶다는

포식(飽食)의 생각이 들다가도

아니지, 건강에 안 좋을 거야 하고

바로 절식(絶食)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꽃을 보고 상대가 <아름답다> 말하면

<벌써 시들었구먼> 하는 부정적인 마음을 일으킨다.

시비(是非)선악에 대한 마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옳다고 말하면 이건 아니라고 말하게 되고,

성욕을 느끼다가도 금방 절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이기적(利己的)으로, 때로는 이타적(利他的)

쉽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움직이고자 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이다.

 

(함안 마애사에서)

바른 마음을 한자로 정심(正心)이라고 한다.

정심(正心)은 곧 일심(一心)을 의미한다.

양극단에 머물지 않은 마음이다.

정(正)은 하나를 의미한 <一> 자와

머물다, 그친다는 <止> 자의 합성어다.

양극단에 머물지 않고 중간에 머무는 것이

<一心>이요 <中道>인 것이다.

 

마음이 일심(一心)에 머물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혼란한 것이다.

항상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려는 혼란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혼란한 마음은 분별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마음이 중간에 머물지 못하고 이쪽을 보면 저쪽 같고,

저쪽을 보면 이쪽 같다고 마음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언제나 남에게 시시비비(是是非非)로 충고하기를 좋아한다.

혼란을 곧 분별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칭찬을 하다가도 비난을 퍼붓고,

책임을 전혀 지지 않으면서 참으로 자비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하고 싶어 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선한 마음이란 것도

미묘한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중간에 머물지 않으면

이것저것 시시비비의 분별심을 짓게 되는 것이다.

선가(禪家)의 귀감서인 <신심명(信心銘)>에서

그 첫 구(句)가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고 밝혔듯이

분별을 멀리하라는 것은

곧 양극단에 머물지 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야차)

 

우리 마음은 의식적인 면에서도 상대적인 양극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드러나는 것은 의식(意識)이고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무의식(無意識)의 세계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의식적인 마음으로는 善을 생각하고,

몸으로 善한 행동을 하고 입으로 善한 말을 하지만

무의식에 숨겨진 다른 한쪽의 마음에는 악의 생각

그리고 악한 행동과 악한 말이 숨어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것도

언제가 의식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일심(一心)에 머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팔정도의 정념(正念), 정사유(正思惟),

정정(正定)의 정(正)은 이를 경계한 것이다.

 

(화성 신흥사에서)

 

팔정도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이어지고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로 이어지지만,

이는 곧 중도(中道)를 설명하기 위한 방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성제(四聖諦)는 부처가 인도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후 그의 제자였던 5 비구들을 찾아가

처음으로 설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말도,

부처가 열반에 들면서 아난에게 남긴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란 유촉도

처음과 끝이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는,

양극에 머물지 말라는 중도의 의미를 밝힌 것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