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제2부) 불이(不異)와 불이(不二)의 소고(小考)
2024. 2. 26. 12:53ㆍ경전과교리해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보면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라는 말이 나온다.
色이 空과 다르지 않고(不異), 空은 色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어서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했다.
色이 곧 空이요, 空이 곧 色이라는 의미다.
앞의 구절에서는 <같지 않다(不異)>란 말이
<卽>이란 말로 바로 <같다(同一)>로 비약하여 말하고 있다.
<다르지 않다>가 <같다>는 말로 바로 이어지지만
중간 설명이 비어 있다.
경은 12처 6식 등으로 세분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이른 차처(此處)하고 그 의미만을 살펴보자
먼저 불이(不二)라는 말을 살펴보자.
불광대사전에 의하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불이(不二)는 一實의 理가 如如平等하여
분별이 없으므로 不二라 한다.
보살은 분별이 없으므로 一實平等의 理에 悟入하므로
入不二法門이라 한다.
유마경 入不二法門品에
「三十三人이 不二法을 얻었다는 것.
유마경 입불이법문품에 有의 연기는 二法에 끝나는 것.
二法이 이미 廢하면 玄境에 들게 된다.
離와 眞이 모두 名이 둘이므로, 不二라 한다.」 하였고,
大乘義章一 「不二는 無異를 말하는 것.
이는 經中의 一實義 이다.
一實의 理는 妙寂離相 의 如如平等이
피차(彼此) 없으므로 不二라 한다.」
또 十二門論疏上에 「一道淸淨 故稱不二」라 했다. 」
우리가 어떤 명제를 말할 때 2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는 논리적인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변증법적인 방법이다.
논리적인 방법에 있어서 대치되는 두 명제는 완전히 상대적이다.
A는 A이지 절대로 B가 될 수 없다는 의미다.
중생은 중생이고 부처는 부처라는 의미다.
중생이 부처가 된다는 것이 아니고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것이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不二門>은 문밖은 세속이고
문 안은 非俗 즉 부처의 세계라는 것을
상대적으로 구분하여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변증법적인 방법에서는
두 명제가 완전히 상대적인 반대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방법을 취한다.
정(正)과 반(反)에서 합(合)을 도출해 내기 때문이다.
경의 말을 빌리자면 중생 안에 부처가 있고
부처 안에 중생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중생이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게 보면 불이(不二)는 논리적인 방법으로 설명한 것이고
불이(不異)는 변증법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선가(禪家)에서는 문장의 말을 따라가지 말고
문장의 행간(行間)을 읽으라는 말이 있다.
불이(不異)와 불이(不二)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앞에서 말한 <다르지 않다는 말(不異)>은
둘이 相反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에 유의할 점이 있다.
A가 B와 다르지 않다고 A가 바로 B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올챙이가 커서 개구리가 되므로
올챙이는 개구리와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개구리와 올챙이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올챙이가 크면 개구리가 되기 때문이다.
<다르지 않다>는 말은 <가깝다>는 의미와도 다르다.
가령 <사실에 가깝다>고 할 경우,
이는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불이(不異)란 말은 여러 경전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 의미를 좀 더 검색해 보니 이렇게 분류하고 있다.
@불이(不異):
⓵범어 ananya. 다르지 않는 것
⓶범어 anánârtha. 別異性이 없다.(中論序偈)
⓷범어 anánârtha 특별한 것은 아니다(中論)
⓸범어 samavasthita 가운데 住하고 있는 것( 중론)
앞의 3가지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네 번째의 (가운데 주(住)하고 있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에 따라 적용해 보면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란
말의 불이(不異)는 색(色)과 공(空)의 가운데 머물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이는 논리적으로 상대적인 정(正)과 반(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변증법적으로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정반(正反) 합(合)을 말하는 것이다.
정(正) 안에 반(反)이 있고,
반(反) 안에 정(正)이 있다는 의미에서 합(合)을 도출한 것이다.
경으로 보면 색(色) 안에 공(空)이 있고,
공(空)안에 색(色)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불교의 최고 교리인
중도(中道)를 말하고 가리키고 있다.
<가운데 住 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이를 가리킨 것이다.
우리가 경(經)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타성에 젖어
건성으로, 습관적으로 읽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우화(偶話)가 있다.
갑돌이는 부친이 돌아가시자 사망신고를 하러 주민센터를 찾았다.
창구에 사람이 많아 한참 기다렸다.
마침내 차례가 와서 창구 앞에 서자
호적담당자는 흘깃 쳐다보면서 상투적인 질문을 한다.
「어떻게 오셨어요?」
갑돌이는 말했다.
「사망신고 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담당자가 말했다.
「본인이세요. 비대면은 안되거든요. 본인이 오셔야 합니다.」
이 우화는 어법상(語法上)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용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타성과 관습에 젖어 사는 삶의 한 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깨어 있지 못한 어둠의 삶, 무명(無明)의 늪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불이(不二)와 불이(不異)라는 말이 삶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같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곧 모든 존재의 본성은 같으며 그 같음은 독특하다는 것이다.
다른 경전에서 이를 <獨存>이라 표현하고 있지만 같은 의미다.
다르지 않다는 말은 비교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
특별한 것이 없다는 의미다.
본성은 도(道), 진여(眞如), 필경공,
법성 그 무엇이라 불러도 좋다.
특별함이 없다는 말은 비교하지 말라는 의미다.
우리가 우리 존재가 독특함을 알게 되면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스스로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
야심, 비교, 시기, 갈등이 개입하게 되고,
자신이 우월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끌어내기 시작하고
그래서 싸우고 투쟁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고 실행에 옮기기 위해
기를 쓰게 되고 이 쓸데없는 일에
전 생애를 허비하게 되는 것은
<不異> 를 <異> 로 알고,
<不二>를 <二>로 알고 사는 삶이다.
다시 말해 무명의 늪에 살고 있는 것이다.
경전에 이른 말이 있다.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同體」
이 말은 곧
천지와 만물의 뿌리가 나와 둘이 아니고(不二)
만물의 존재가 나와 다르지 않다(不異)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진: 상해 동방명주탑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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