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와 함허득통 화상

2023. 3. 5. 21:02경전과교리해설

 

금강경은 불교 반야경 중에서도 백미로 일컬어지는 경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하며 이의 해설서인

금강경오가해는

조선 초기 배불정책과 배불론 속에서 불교의 정법과 이치를 밝힘으로써

불교를 지켜내고자 애썼다는 함허화상(涵虛和尙)으로 알려져 있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함허(涵虛·1376~1433) 화상은 조선전기의 승려로

법명은 기화(己和)이며, 속명은 유수이(劉守伊),

호는 득통(得通) 또는 무준(無準)이며,

함허는 그가 머물던 당호가 함허당(涵虛堂)이므로

함허득통이라 칭한 것이다.

속성은 유(劉) 씨며 남원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청(聽)이며 벼슬은 전객시사(典客侍事)를 지냈고,

어머니는 방(方) 씨였다.

 

운악산 솔

21세 때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하던 벗의 죽음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과 몸의 허망함을 느껴 1396년(태조 5) 출가했다.

1397년 회암사(檜巖寺)에 가서 무학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이로써 지공(指空)·나옹·무학의 법통을 이었다.

 

 

이후 여러 산으로 돌아다니며 수행에 전념했고,

1404년(태종 4) 다시 회암사로 돌아와 수행한 끝에 크게 깨달았다.

그 뒤 1406년부터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에서 4년간

〈반야경 般若經〉을 가르치는 등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1414년에는 평산(平山)의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峯寺)의 작은 방에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 붙이고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를 강의하고,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說誼〉를

저술했다(조선 태종 17년/1417년).

선가(禪家)의 법통을 이었으면서도 스승인 무학과는 달리

교에 대한 저술을 많이 남겼으며 사상도 교학적인 경향이 강했다.

 

유교의 배불론에 대한 호불의 입장에서,

불교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유학자들의 비판을 반박했다.

선 사상이 현실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최치원이 주장했던 불교·유교·도교의 삼교일치설을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운악산 미륵바위

 

@『금강경오가해』는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금강경』에 대한 주석서로서, 당나라 종밀(宗密)의 찬요(纂要),

양나라 부대사(傅大士)의 찬(贊), 당나라 혜능(慧能)의 구결(口訣),

송나라 야보(冶父)의 송(頌), 송나라 종경(宗鏡)의

제강(提綱) 등의 책을 가리킨다.

저자는 이들 주석의 어려운 부분에 해석을 붙였는데,

이를 ‘설의’라고 하였다.

 

저자는 『금강경오가해』를 다른 판본들과 비교하여

탈자·중복·뒤바뀜·오자 등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다른 책을 참고할 수 없는 경우에는 뜻에 따라

바르고 틀린 것을 판단하여 정확한 교정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경문 중 중요한 부분이나 마땅히 해석이 있어야 할 곳은

집중적으로 주석을 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금강경오가해』에 대해 저자가 주석을 가한 곳은

『금강경』 본문과 야보와 종경의 저술에 대해서이다.

종밀·부흡·혜능 등의 주석에 대해서는 오자의 정정에 그치고 있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설의를 한 것은

저자의 선 사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등사 만월보전

『금강경오가해』 중 종밀의 『찬요』는

인도 유식학파에 속한 무착(無着)의 18주설(十八住說)과

세친(世親)의 27단의설(二十七斷疑說)을 계승하여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주석을 한 것이다.

 

종밀은 화엄종에 속한 고승이지만 선에도 밝았으며

선과 교가 하나임을 주장한 사람으로서,

그의 『찬요』는 『금강경』에 대한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을 받아들여

중국의 화엄학과 선을 접속시킨 입장에 있었다.

그리고 부흡이 생존했던 중국의 남북조시대에는

대승불교의 공사 상(空思想)을

노장학(老莊學)의 입장에서 해석하던 시대이다.

부흡의 『협송』은 그 시대의 선의 풍조를 풍기고 있으며,

선의 측면에서 『금강경』을 보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문헌이다.

 

그리고 야보의 『협주』는 송나라 때 선에 입각해서

『금강경』을 주석한 것이며, 종경의 『제강』도

사상적 견지에서는 야보의 저술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회암사 대웅전

이 두 사람의 『금강경』 풀이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교학적인 색채가 사라지고 순전히 선적인 해석을 베풀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금강경오가해』는 『금강경』에 대한

인도 유식학파의 논리적인 해석으로부터

중국선의 형성과 완숙에 이르는 노선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주석을 의식적으로 배열한 것이라 할 수가 있다.

기화는 『금강경』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게 하고

불교의 참다운 뜻이 일상생활에 직결되는 것임을 밝히고자,

『금강경오가해설의』를 저술하였다.

이 책이 저술된 뒤로는 우리나라의

『금강경』 유통이 이 책에 의해 주도되었다.

 

 

함허득통(涵虛得通) 스님은 고려 우왕(禑王) 2년(1376)에 중원(지금의 충주)에서 유민(劉民)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휘(諱)는 총(聰)이고 벼슬은 전객사사(典客寺事)이며 어머니는 방씨(方氏)이다. 스님의 모친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서 대성자모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했다고 한다.

관악산 의상암에 가서 머리를 깎고 병자년(1396)에 승려가 되었다. 이듬해 정축년(丁丑年) 이른 봄에 처음으로 회암사에 가서 왕사 무학 묘엄존자(妙嚴尊者)를 만나 친히 법요를 들었다. 이 인연으로 스님은 임제종 계통으로 제21세손이며 나옹 밑으로 제2세가 된다.

스님은 무학스님 밑에 조금 있다가 하직하고 여러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수행에 전념하였다. 갑신년(1404) 봄에 스님은 회암사로 돌아와 한 방을 치우고 지냈는데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여일하였다. 스님은 신해년(1431) 가을에 영남 희양산 봉암사에 들어가 퇴락한 절을 수리했다.

그러나 스님은 법을 펴지 못하고 선덕8년(1433)계축3월15일 발병하여 심신이 편치 못했다.

 

현등사 함허득통선사 승탑과 석등

4월 1일 신시에 스님은 조용히 앉아

“湛然空寂 本無一物(담연공적 본무일물)

*담연 공적하여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神靈光赫 洞徹十方(신령광혁 통철시방)

*신령스러운 빛이 혁혁하여 온 세상에 뚜렷하도다.

更無身心 受彼生死 (갱무신심 수피생사)

*몸과 마음이 생사를 받지않아

去來往復 也無罣碍”(거래왕복 야무가애)

*오고 감에 아무 거리낌이 없도다.

라 하고, 조금 있다가 또

“臨行擧目 十方碧落 (임행거목 시방벽락)

*나아가려다 눈을 뜨니 온 세상이 온통 푸른빛이구나

無中有路 西方極樂”(무주유로 서방극락)

*없는 가운데 길이 있으니 서방극락이로다.

이라 했다.

정수사 함허득통선사 승탑

이것이 곧 스님의 열반송이다. 문도들은 5일 동안 그대로 모셔두었는데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다비 후 치골을 향수에 씻으니 뼈에 붙은 사리가 확연히 빛났다. 효령대군이 이 사실을 상달하니 왕이 명령하여 제자들이 네 곳(현등사, 봉암사, 정수사, 연봉사)에 부도를 세우게 했다. 스님의 세수는 58세이며 법랍은 38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