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과 올빼미 이야기

2024. 2. 5. 12:34국내 명산과 사찰

주왕산(周王山) 대전사(大典寺)를 지나면

자하교와 주왕산으로 갈라지는 길에

여느 산에서 볼 수 없는 올빼미 조형물을 세워둔 이정표가 있다.

올빼미야 어느 산인들 없겠느냐마는

주왕산은 올빼미로 유명한 것도 아닌데

어떤 이유로 이런 조형물을 세워 놓았을까?

주왕산은 강원도의 설악산, 영암의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암산(岩山)에 속하며,

봉화 청령산과 진안 마이산과 더불어

3대 기암(旗岩)에 속하는 산이다.

명산이기에 올빼미 정도야 있음 직하겠지만

유독 하고많은 산새 중에서 올빼미를 상징으로 삼았을까.

 

주왕산은 전설이 많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가?

주왕산은 높이 722.1m로 풍광이 뛰어나고 계곡이 깊어

은둔자들과 선사들이 이 산에 살았다 하여

대둔산(大屯山)이라 했고,

또 바위로 둘러싸인 산이라 하여 석병산(石屛山),

병풍산(屛風山)이라고도 했다.

또 신라 선덕여왕 때 무열왕계의 김주원(金周元)이

상대등 김경신(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여기에 피신하여 머물렀다고 해서 주방산(周房山)이라고도 했다.

또한 신라시대 중국 최초 통일 천하를 이룩한

진나라 때 복야상서란 벼슬을 지낸 주의라는 사람의

팔 대 손(孫) 주도(周鍍)가 진나라를 다시 세우겠다고

군사를 모아서 장안으로 쳐들어갔다가

패하여 도망 다니던 중

신라의 석병산이 깊고 험하다는 소리를 듣고

이곳에 은둔하였다가 신라의 상장군 마일성 장군에게

토벌되었는데 주왕이 머문 산이라 하여 주왕산이라고 불렀다.

이 석병산이 곧 주왕산의 옛 이름이다.

또한 고려 말의 고승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1320~1376)선사가

이곳에서 수도할 때 이 산을 주왕산이라 불러

지금까지 주왕산이라 불린다고 한다.

 

@<주왕사적 이야기>

이 이야기는 주왕산에 얽힌 비전(秘傳)으로 알려진

<주왕사적>이란 것에 연유한다.

이는 대전사를 창건한 통일신라 시대 효공왕과

선덕왕의 국사를 지낸 낭공대사의 기록인데

낭공대사는 주왕산의 창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마당에 가리비조개바위 밑에 <주왕사적>을 묻어 두었다.

그리고 땅속에 묻힌 채로 오대(五代)에 걸쳐 인계토록 하였다.

주왕사적은 작성된 후 114년이 지난 1034년에 출토되었는데

낭공대사의 뜻에 따라 전달 개봉되었다.

개봉한 사람은 다만 <재주 없는 사람>으로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낭공대사(郎空大師)는 흥덕왕 7년에서

신덕왕 5년(서기 916) 생존한 스님으로

낭공대사는 스님의 시호다.

이를 기리는 사적비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바로 그것이다.

김생의 필체가 남아 있는 유일한 비(碑)라고 한다.

이 비(碑)는 통일신라의 국사였던

낭공대사(832~916)를 기리는 비석으로

고려 광종 5년(954)에 비문의 앞면은 최인연(崔仁渷)이,

뒷면은 대사의 문하법손(門下法孫)인 석순백(釋純白)이 지었는데,

글씨는 김생의 행서를 집자하였다.

18세기 조선 문인 성대중은 이렇게 평했다.

"그 획이 마치 삼만 근의 활을 당겨서

한 발에 가히 수많은 군사를 쓰러뜨릴 것 같다."

주왕사적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앞부분에

비결 편과 과정 등을 설명한 추가 부분이 덧붙여 있는데

비결은 주왕산에서 일어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중국과 관련된 이야기로 꾸며져 있으며

연대(年代)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또한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야행성 맹금(猛禽)인 올빼미를 닮은 꼴이다.

 

 

 

주왕산은 명산이면서도 대표적인 사찰은

유일하게도 대전사(大典事)이다.

대전사는 672년 신라 문무왕 12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왕사적에 의하면 신라 말 892년 진성여왕 6년에

낭공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낭공대사는 통일신라 때

효공왕과 선덕여왕 2대에 걸쳐 국사를 지낸 스님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2호 보물 제1570호 지정되어 있고,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조선 현종(1672) 때 중창되었다.

대웅전 격인 보광전은 화강석 기단 위에

전면 3칸, 측면 3칸의 구조로

천장은 우물 정(井)모양으로 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과

주왕암(周王庵)이 있다.

백련암은 주왕의 딸 이름에서 유래하고

주왕암은 주왕에서 유래한다.

 

대전사 뒤편 비석처럼 우뚝 선 이 바위는 대장암으로

주왕이 신라의 마장군과 대적할 때 신라 군사를 속이려고

정상에 깃발을 세우고 능선을 볏짚으로 둘러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위장했다는 설이 있고,

이를 점령한 마장군이 산 정상에 대장기(大將旗)를 세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자세히 보면

정상 바위 중간 한 부분이 떨어져 있는데

이는 마장군이 쏜 화살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정상에는 70평 정도의 평지가 있고 여기에 묘를 쓰면

후손에 왕후장상 같은 인걸(人傑)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어느 해부터인가 마을에 가뭄이 극심하여

마을 사람들이 정상에 올라가 보았더니 묘가 있어

이를 다른 곳으로 옮겼더니 이후로 비가 내리고

가뭄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대전사 보광전 보물 제1570호

보광전의 건물 구조는 화강석 기단 위에 화강석 초석을 놓고

약간 흘림이 있는 원주를 세워 구성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지붕은 전면에만 부연을 단 겹처마의 맞배지붕이고,

구조는 2고주 5량 가구이며, 다포계 양식으로

외 2출목 3 제공, 내 2출목 3제공을 이루는데

전면은 앙설형이고 배면은 교두형으로 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 목조건축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청송 대전사 보광전은 건축연대가 명확한

조선 중기 다포양식의 목조건물로서

공포양식 등에 있어서 중기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내부 단청과 벽화는 회화성이 돋보이는 빼어난 작품으로

건축 당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조선 중기

불교미술의 중요한 자료로서

국가 지정 유산(보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주왕산의 유래와 주왕산 대전사의 유래를 살펴보아도

올빼미와 연관된 기록은 어느 하나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 이야기 속에

올빼미의 속성을 은유적으로 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올빼미는 조류의 한 종류로

넓은 의미에서는 올빼미목의 부엉이와 소쩍새가 아닌

야행성 맹금류를 의미하며 모두 120여 종이 있다.

좁은 의미로는 회갈색올빼미(S .nivicolum)를 가리킨다.

야행성이라는 점 때문에 '밤샘'을 의미하는 비유적 의미로 많이 쓰인다.

이렇게 탄생한 말이 올빼미족. 재밌게도 영미권에서도

밤늦게까지 깨어 있는 사람을 가리켜 "night owl"이라 칭한다.

 

참매가 낮의 숲을 지배한다면 올빼미는 밤의 숲을 지배한다.

올빼미에 대한 평가는 서양권, 일본과 한국,

중국의 문화적 대접이 완전히 정반대이다.

서구의 우화 등에서는 지혜로운 새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올빼미를 지식의 새로 여겼기 때문이다.

지혜가 강조되는 아테나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아테나의 이명 '글라우코피스(Glaukopis)'는 한때

'올빼미 눈의 여신'이라고 해석되기도 했다.

 

올ㄹ빼미

신화에 의하면 옛날에 아테나 여신께

에리크토니오스라고 하는 어미 없는 아이 하나가 있었다.

아테나 여신은 이 아이를 아르카디아 버들로 짠 바구니에다 넣고

이 바구니를 케크롭스 왕의 세 딸에게 맡겼다.

 

케크롭스 왕은 반은 인간이었고, 반은 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테나 여신은 세 딸에게 절대 상자를 열어보지 말라 당부하였다.

첫째인 판드로소스 (Pandrosos)와 둘째인 헤르세는

아테나 여신의 말을 따랐다. 그런데 셋째인

아글라우로스 (Aglauros)는 여신의 말에 복종하는

두 언니를 겁쟁이라고 하면서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똬리를 튼 뱀과 아기가 있었다.

몰래 감시하던 전령사 까마귀는 그녀들이

아테나 여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뚜껑을 열었기에

아테나 여신에게 날아가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러나 아테나 여신은 까마귀에게 상을 주지 않고

까마귀가 자리하고 있는

신조(神鳥)의 자리에서 까마귀를 내쫓고는

그 자리는 밤새인 올빼미에게 주어버리고

까마귀는 불에 처해 버렸다.

함부로 입을 놀린 것에 대한 처벌을 한 것이다.

그 후 까마귀 깃털은 불에 탄 재처럼 검은색이 되었다고 한다.

 

까마귀의 자리를 빼앗은 올빼미는

본래 레스보스섬의 공주였던 뉘티메네라고 한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유혹하여 몸을 섞은 탓에

그 벌로 올빼미가 되어 사람들의 눈이 있을 때나,

날빛이 비칠 때는 날지 않아.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밤에만 날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올빼미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었다.

동양에서는 까마귀는 반포조(反哺鳥)라 하여

부모에게 먹이를 가져다 먹이는

효성스러운 새로 알려진 데 반해

올빼미는 은혜를 저버리고

제 어미를 잡아먹는 패륜적인 불효조로 알려졌다.

그래서 올빼미는 재앙을 불러오는 재수 없는 새로

고금을 통틀어 ‘불인(不仁)과

악인(惡人)’의 상징으로 치부되어 왔다.

새끼 올빼미가 어미새를 잡아먹는 일은 실제로 없으나,

이러한 이미지가 굳어진 탓에

올빼미 효(梟)가 붙은 단어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둔제한람(遯齊閒覽)』에 보면 이런 기록이 전한다.

“올빼미는 어미를 잡아먹는 불효를 행하는 까닭에

옛사람이 국을 끓이고, 또 나무에다 그 머리를 내걸었다.

그래서 후인들이 적의 머리를 내걸어

무리에게 보이는 것을 일러 효수(梟首)라고 하였다.”

효수형이란 목을 베어 장대에 매달아

사람들에게 이를 구경하도록 하는 형벌이다.

또 삼국지에서 보듯 능력은 확실한데

인성에 논란이 있는 인물을 효웅(梟雄)이라고 불리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조조였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올빼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에서 올빼미는

암살자나 살인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소쩍새와 부엉이, 올빼미는 올빼미목, 올빼미과에 속하는

올빼미 종류인 야행성 맹금류이다.

접동새는 소쩍새의 평안도 사투리이다.

올빼미목에 속하는 조류는 전 세계에 220종 이상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10종류가 넘는다.

쥐, 작은 새, 토끼, 꿩, 곤충, 다람쥐 등이 이들의 주요한 먹이이다

 

부엉이는 절벽이나 벼랑 위 둥지에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지만,

올빼미는 오래되고 큰 나무의 구멍에 둥지를 튼다.

알에서 깨어난 올빼미는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로 성장하고,

100일 정도가 지나면 둥지를 벗어나 먹이 사냥을 한다.

중국에는 이때 새끼 올빼미가

갑자기 어미를 잡아먹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기에,

올빼미는 불효의 상징이 되었다.

사람들은 올빼미를 잡으면 죽여서 나무에 매달아서,

불효에 대한 경각심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류생태학자들에 의하면 수리부엉이는 새끼가 죽으면

어미가 먹어 치우거나, 다른 새끼들에게 먹인다고 한다.

이것은 야생동물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고,

어미를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는 부엉이의 이런 습성이

잘못 알려진 것이라 한다. 한자로 올빼미 효(梟)는

나무에 매달려 있는 새라는 의미인데,

여기에는 ‘목을 베어 달다’라는 뜻도 있다.

큰 범죄자의 목을 베어서 군중 앞에 높이 매달았던

효수(梟首) 또는 효시(梟示)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부엉이

 

중국 양나라 때 유협(劉勰)이 엮은 『유자(劉子)』에는

“올빼미는 그 새끼를 백 일 동안 품어 기른다.

날개가 생겨나면 어미를 잡아먹고 날아간다”라고 했다.

『금경』에서도 “올빼미는 둥지에 있을 때는

어미가 이를 먹여 기른다. 날개가 생기면

어미의 눈알을 쪼아먹고 날아가 버린다.”라고 했다.

조류생태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한다.

 

동양에서 올빼미는 집에 와서 울면 그 집 주인이 죽고

그 집에 재앙이 드는 아주 불길하고 재수 없는 새로 알려져 왔다.

『시경』에 「치효(鴟鴞)」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치효는 올빼미의 한자 이름이다.

 

올빼미야 올빼미야!

鴟鴞鴟梟

내 자식을 이미 잡아먹었으니

旣取我子

내 집은 헐지 말아다오.

無毁我室

 

여기서 올빼미는 다른 새의 새끼를 잡아먹고

그 집까지 차지해버리는 못된 새로 그려져 있다.

또 『금경』에는 괴복(怪鵩)이라 하고,

“일명 휴류(鵂鶹)라고도 한다.

중국의 강동 지역에서는 괴조(怪鳥)라고 부른다.

울음소리를 들으면 재앙이 많이 생기므로

사람들이 이를 미워하여 귀를 막곤 한다”라고 적혀 있다.

화조(禍鳥)로도 불렸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올빼미가 주로 집에

화재를 불러온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올빼미 때문에 생긴 여러 차례의 불상사를 적고 있다.

 

 

올빼미는 인간의 목뼈와 비교해 두 배가 넘은

14개의 목뼈가 있어 회전이 유연하다.

턱 아래 혈액 저장 주머니가 있어

회전할 때 혈액의 막힘이 없어

뇌와 눈에 혈액 공급에도 지장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도 목표물을 정확하게 낚아채는

암흑 속의 포식자로 활동할 수 있으며,

오랫동안 무서운 눈과 발톱을 지닌 불길하고

무서운 느낌을 주는 흉조凶鳥로 믿어졌다.

‘부엉이’와 ‘올빼미’는 구별되지 않고 쓰여 왔는데,

이것이 들어간 단어에는 긍정적 이미지도 조금 있다.

‘부엉이살림’은 조금씩 열심히 저축하여

자기도 모르게 부쩍 커진 탄탄한 살림을 말한다.

부엉이가 사냥하여 먹잇감을 하나하나 저장해둔

고목 나무 속의 부엉이 둥지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올빼미는 어둠 속에 활동하는 음흉한 동물이며,

계산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뜻하는 부엉이셈처럼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 새다.

오늘날에도 늦게 일어나며 해가 지고서야

정신이 다시 맑아져서 활동하는 사람을

올빼미족이라 부르는데

이런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야먕을 성취하기 먼 이곳 주왕산에 도망 나와

은거하면서 항쟁을 벌렸든 주왕(周王) 주도(周鍍)의 옛 고사를 빌어

반인륜적이며 불효조로 여겨지는 올빼미를 통하여

오염되고 부패한 우리 사회에 경계심을 주기 위해

주왕산에 이런 올빼미 조형물을 세워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