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환성사

2023. 12. 24. 00:42국내 명산과 사찰

 

원효대사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한 사찰 중 경산에 있으면서도

환성사(環城寺)는  불굴사와 제석사와 달리

원효대사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원효대사의 생몰연대는 617년(신라 진평왕 39)에서

686년(신라 신문왕 6)이라서

환성사의 창건보다 훨씬 앞서기 때문이다.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환성사(環城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835년(흥덕왕 10) 심지왕사가 창건한 절로

고려말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 뒤 중창했다.

1635년(인조 13) 신감대사가 중건하고,

1898년 긍월대사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환성사(環城寺)라는 사명(寺名)은 환성사가

경산시 하양읍 팔공산(八公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사찰이 마치 산들이

성(城)들이 둘러싼 모습과 같아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환성사 경내를 들어서면 왼쪽에 승탑군(부도군)이 보이고

일주문을 지나면 수월관(水月觀)이 보인다.

수월관 밑을 지나면 석탑이 있는 안마당에 이르는데

정면에는 마당보다 한 단 높은 터 위에

대웅전(보물 제562호)이 세워져 있으며,

서쪽에는 심검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이 있고,

맞은편에는 요사채와 산신각이 있다.

필자가 찾았을 때는 늦가을이라서

그런지 산하가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일주문

환성사의 일주문은 여느 사찰과 달리 석조 덤벙초석으로 지은 것이 특이하다.

부연하면 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놓은 것을 주춧돌이라고 하는데

이를 초석(礎石)이라고 한다.

이 초석과 기둥을 합쳐 우리말로 <주춧돌>이라 부른다.

초석은 돌의 가공 여부에 따라 막돌초석과 다듬돌초석으로 구분되는데

막돌초석을 덩벙초석이라고 한다.

덩벙초석이란 건물을 받치고 있는 초석이 덤벙덤벙 놓았다고 하여

덤빙초석이라 한 것이다.

 

환성사의 일주문은 덤벙초석으로 4개의 돌기둥을 일렬로 세우고

건물은 맞배지붕으로 가운데 2개의 기동은 팔각형인데

바깥쪽 2개의 돌기둥은 사각으로 되어 있다.

팔각기둥은 팔정도를 상징하고 사각기둥은 사성제를 상징한다.

일주문은 이익공의 다포식 공포를 짰으며

양쪽 지붕의 합각 부분에는 풍판을 달았다.

 

 

승탑군과 탑비

일주문 왼쪽에 있는 부도에서는 3기의 탑비와 6기의 승탑이 조성되어 있다.

불문(佛門)에서는 승려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사리(舍利),

즉 유골(遺骨)을 돌로 만든 묘탑(墓塔)에 안치하는데,

이를 부도(浮屠) 또는 승탑(僧塔)이라 부른다.

탑비는 이러한 부도와 함께 조성되는 것으로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는 일생의 행적을 적은 것이다

별도 안내서나 사찰의 설명이 없어 부도의 주인은 알 수 없지만

승탑과 탑비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탑은 주로 사찰안에 있지만,

승탑은 사찰 밖에 있는데

환성사의 승탑은 일주문 왼쪽에 조성되어 있다.

 

 

 

 

 

 

 

 

 

 

 

 

 

 

수월관(水月觀)

경산 환성사 수윌관(慶山 環城寺 水月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15호

 

대개의 사찰에서는 경내를 진입하기 위해서는

만세루나 보제루 등 전각을 조성해 놓는데

경산 환성사 수월관(水月觀)이 이에 해당한다.

다만 편액에 전각을 알리는 <루(樓)>은 생략되었다.

수월관은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다락집 형태로 지어진 건물로 조선 숙종 대인

1700년쯤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나,

수월관 아래를 통해 대웅전 마당으로 오를 수 있어

절의 입구 역할도 하였다. 이를 누하진입형(樓下進入形)이라 하는데

전각 아래를 지나려면 고개를 숙여서 대웅전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므로

이는 경건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수월관을 지을 때 절 앞에 큰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누각에서 보면 달이 연못에 비치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서

수월관(水月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누각 내부의 단청은 매우 화려하며,

특히 들보를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그림이 특색 있다.

또 날렵하고 길게 뻗은 처마의 구조와 단청의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화성지(花城誌)에 의하면 환성사는

조선시대 임고서원에 속하며 공물을 드렸는데

숙종 때 박서봉과 황윤중이 상소하여 하양향교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층석탑

환석사의 이 삼 층 석탑은 본래 있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시대적으로 현재 이 삼 층 석탑은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형태를 보면 이웃한 불굴사의 적멸보궁 앞에 세워진

삼층석탑을 모본(模本)으로 한 것 같은데

상대면석과 하대면석에 탱주를 조성한 것은 비슷하지만

지대석은 불굴사의 삼층석탑에 비교해 빈약하다.

환성사의 이 삼층석탑은 연화탑으로 불리고 있다.

 

 

 

노주석

대웅전 앞마당에 2기의 노주석이 세워져 있다.

노주석(露柱石)은 노반지주(露盤之柱), 광명대(光明臺),

정료대(庭燎臺)라고도 하는데 순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부른다.

노주석은 용도는 사찰의 야간 법회 때 불을 밝히거나

숯불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데 쓰였다.

노주석은 주로 문경 일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없다.

경산 환성사의 이 노주석은 문경 사불산 대승사와

김용사의 노주석과 같이 현재 발견된 노주석은 모두

조선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

 

 

 환성사 대웅전

명칭: 경산 환성사 대웅전

문화재지정: 보물 제562호

조성한 시대: 조선시대

 

팔공산 기슭에 있는 환성사는 흥덕왕 10년(835)에

심지왕사가 처음 지었으나 고려 후기에 불타버렸다고 한다.

조선 인조 13년(1635)에 신감대사가 다시 지었으며,

광무 원년(1897) 항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환성사의 중심 건물로 높이 1.6m 높이의 석단 위에

전면 5칸, 측면 4칸으로 지붕은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막돌로 쌓은 석대 위에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앞면의 기둥 사이에는 정자살 분합을 달았고

양 옆면의 첫 칸에만 정자살 문을 달았는데,

현재 우측은 문틀을 그대로 둔 채 토벽으로 처리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은 가운데만 굵고 높거나 크지 않고

건물의 앞면과 옆면 길이가 거의 같아서 매우 안정된 비례를 이루고 있다.

공포는 평방 위에 주두를 놓고

외 삼출 목·내사출목의 포작으로 된 다포계 양식이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문수와 보현보살을 협시로 두고 있고,

법당 내부의 가구는 매우 장중하며 천장은 우물천장이다.

 

 

 

 

 

 

뒷벽 천장에는 운궁을 장치하고 그 아래에 불단을 설치했는데,

이를 수미단이라 불린다. 목공예적 장식이 매우 아름다워

현재 수미단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3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은 1976년 낡은 목재를 갈아내고

단청 무늬와 퇴색된 색채에 비슷하게 보수하였으며,

바깥쪽 단청은 새로 칠하여 옛것과 새것의 색이 섞여 있다.

건물의 구조나 단청이 대체로 예스러움을 지닌 건축물이다.

필자가 방문할 때도 대웅전은 2차 보수 중이라 어수선했다.

 

 

 

@경산 환성사 대웅전 수미단 (慶山 環城寺 大雄殿 須彌壇)

문화재 지정: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39호

조성한 시대: 조선시대

 

수미단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여기는

상상의 산인 수미산을 본떠 만든 불상을 모신 대좌를 말한다.

경산 환성사 대웅전 수미단은 정면 12칸,

측면 4칸의 가구 수법으로 만들어진 3단의 수미단으로,

크기는 길이 652㎝, 너비 220㎝, 높이 114㎝의

장방형으로 받침과 몸체 그리고 덮개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수미단 전면 아래 받침에는 황룡과 청룡 여섯 마리,

법당 좌우 측면에는 꽃과 금강저,

밧줄을 문 귀면이 부처님을 수호하고 있다.

 

위 수미단 덮개 부분 아래에는 연꽃을 새겨 연화좌를 나타내었다.

수미단 중간 몸체 부분은 아름다운 조각으로 꾸몄는데,

전면 열두 개, 좌우 측면 여덟 개의 칸에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민화풍의 길상 문양과 꽃과 새, 물고기 등을 조각하여

대담하게 성적 묘사를 했다. 좌·우측 2면에는 연꽃 속에는

혼인색(婚姻色)을 띤 한 쌍의 물고기가

연잎 사이로 헤엄치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쌍을 이룬 물고기는 부부의 화합과 다산(多産)을,

두 송이의 연꽃은 연달아 지속되는 부부애를,

연실(蓮實)은 다자다복(多子多福)을 나타내고 있다.

 

이 수미단은 후불벽 뒷면에 출입구가 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며,

내부의 일부 부재에는 묵서(墨書)가 남아 있다.

또한 극락정토에 사는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를 비롯하여

다양한 동물과 새, 꽃 등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 수미단이 제작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환성사 대웅전이 1635년에 고쳐 지어진 점과 조

각 장식이 영천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과 비슷한 점을 근거로

17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 중앙에는 암수 한 쌍의 오리가 활짝 핀 연꽃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인데 춘정(春情)이 발동한 수컷이

날갯짓으로 암컷의 등을 타고 교미(交尾)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또 이 광경을 지켜본 작은 물총새 수컷이 짝을 부르니

반대편에서 암컷이 짝을 찾아 날아드는 모습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적극적인 부부 사랑을 표현하였다.

 

@전면 좌측에는 암수 봉황이 휘어진 연리지 꽃 속에서

암수 봉황이 아름다운 꼬리를 서로 교차하고,

수컷 봉(鳳)이 암컷 황(凰)의 머리를 누르는 모습으로 애정을 표현하였다.

특히 봉황의 뒤에는 활짝 핀 연리지 꽃은

봉황 부부의 애정을 적극적으로 거들고 있다.

연리지는 뿌리와 줄기가 각기 다른 두 나무가 붙어서

하나가 된 가지를 말하는데 춘추전국시대

한빙(韓)과 그의 아내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규보는 “연리지에 꽃 피니 봄이 늙지 않고(連理花開春不老)”라 하여

부부의 사랑을 연리지에 비유하였다.

@단정학 한 쌍 눈길

활짝 핀 여러 송이의 꽃과 봉오리를 배경으로

단정학(丹頂鶴) 한 쌍이 여유롭게 쉬고 있다.

예로부터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단정학은 장수를 기원하고,

부부애를 과시하는 상징으로 여겨 왔다.

학은 한 번 짝을 맺으면 부부가 평생 해로하고

늘 가족 단위로 집단을 이루기 때문에 사랑을 받아온 길조이다.

 

이 밖에도 수미단에는 가릉빈가는 연꽃을,

원숭이는 보주를 바치는 등등 이를 통해

중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부처님께 기원하였다.

이처럼 환성사 수미단에는 이규보의 시를 옮겨 놓은 듯하다.

일부를 옮겨보면,

 

“하늘과 땅이 갈라져 음과 양이 생겨나고(二儀剖判有陰陽)

수컷이 암컷 불러 여자가 남자를 따르네(雄或呼雌女逐郞)

돌아온 봉이 황을 찾으니 참으로 다정하고(歸鳳求凰眞眷戀)

외로운 난새 짝을 잃으니 혼자 방황하네(孤鸞失偶却徊徨)

나무에는 연리지 있어 뭇 초목과 다르고(木聞連理殊群卉)

꽃에는 동심초 있어 뭇 풀과는 다르다네(花見同心異衆芳)

닭은 제 짝이 죽으면 다시 배필을 얻고(不有婦夫鷄得匹)

기러기는 형제가 없어도 나란히 날아가네(亦無兄弟聯行).”

 

환성사 대웅전 수미단의 조각을 통해 우리 조상들은

사랑과 장수, 다자다복 등을 기원하였다.

 

신중탱

 

 

산령*천태각

 

명부전

 

 

 

 

 

 

심검당

명칭: 경산 환성사 심검당

문화재 지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

조성한 시대: 신라 흥덕왕 10년(835)

 

전면 3칸 측면 3칸의 주포식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다.

후면 벽은 무등산 증심사의 오백전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심검당 현판에 ‘도광4년갑신추파서(道光四年甲申秋波書)’라 쓰여 있는데,

도광 4년은 조선 순조 24(1824)년이다.

그러나 창건 당시의 현판은 아니다.

성화연간(成化年間, 1465∼1487)에 건립된

개심사심검당(開心寺尋劍堂)과 유사하며

은해사거조암영산전(銀海寺居祖庵靈山殿, 국보 제14호)보다

1세기경 뒤진 것이므로 조선 전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1976년 해체, 중수되었다.<자료인용>

 

심검당 측면 벽

 

 

 

 

 

용연(龍淵)

수월관(水月觀)이라는 이름이 이 연못에서 유래되었다.

전설로는 신라 흥덕왕 10년(835)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할 때

이 연못을 함께 조성했다고 한다. 심지왕사는 이 연못이 있는 한

사찰이 흥성(興盛)하라고 했는데 왕사의 예언대로

사찰은 크게 번창하고 신도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절의 주지는 끊임없이 찾아드는

신도들 때문에 수행에 방해가 되어 고심하고 있었는데

어떤 방문객이 연못 때문에 그런 것이니 연못을 메꾸어 버리면

신도들이 줄 것이라고 일러주자 방문객 말대로 연못을 메꾸어 버리자

연못 속에서 금송아지 한 마리가 울면서 튀어나와

동화사 쪽으로 날아갔고 사찰은 불이 나

대웅전과 수월관만 빼놓고 모두 전소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연못은 옛 전설을 상기하기 위해

2005년 7월에 다시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늦가을 정취가 묻어나는 환성사의 풍경을 담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