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과 주왕굴 이야기
2024. 2. 11. 13:32ㆍ국내 명산과 사찰
인간은 삶은 욕망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욕망은 자아(自我)의 존재를 확립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투쟁이기도 하지만 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취한다.
안으로는 자기와의 싸움하기도 하고,
밖으로는 남을 이기기 위해
필연적으로 투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욕망의 근본 원인은 나름대로 사람마다 그 이유가 있겠지만
그 대표적인 것이 유교에서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들고
불교에서는 오욕(五慾)을 들고 있다.
오욕(五慾)이란 불교에서 경계하는 인간의 5가지 욕망으로,
재물욕(財物慾), 색욕(色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欲),
명예욕(名譽欲)을 말하고, 칠정(七情)은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愛), 미움(惡), 욕망(欲)을 말한다.
이는 유교의 <예기(禮記)>에 나온 것으로
인간의 감정적인 면에서 고찰한 것이다.
불교는 오욕(五慾)을 가장 금기시하는 데
특히 오욕 중 명예욕은 뜬구름과 같이
부질없는 것일 줄 알면서도 벗어나기 힘든 가장 큰 욕망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가장 참혹한 피바람을 일으킨 것도 바로 명예욕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패권(覇權)을 향한 권력욕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표만 주면
조상의 묘도 팔아넘긴다는 말처럼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형제간에서도 일어나는
이런 권력의 투쟁은 실패하면 패가망신하고
나락(奈落)으로 떨어지지만 일단 권력만 잡으면
무소불위(無所不爲)로 모든 욕망을 해소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키고,
반대파를 숙청하고 갖은 권모술수(權謀術數)로
암투와 모략을 꾸미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보면
그 시작은 언제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내세우고,
정의를 내세우고, 민생을 앞세우고,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함이었다고 역설(力說)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보면 결국 자신의 명예욕,
권리욕을 성취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왕굴에 얽힌 주왕의 전설도 같은 맥락을 띄고 있다.
청송 주왕산은 전설이 많은 산이다.
그중에서도 주왕산 주왕굴에 얽힌 전설이 단연 으뜸이다.
주왕산은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삼대 암산(巖山)에다
청량산, 마이산과 더불어 삼대 기암(奇巖)에 속하며
폭포 또한 포항 내연산 12폭포만큼은 아니지만
뛰어난 3대 폭포를 자랑하는 산이다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자하성
수달래의 전설
주왕굴 가는 길은 수달래의 전설과 돌무더기만 남은
자하성의 전설로부터 시작된다.
산철쭉으로도 불리는 이 꽃이 유난히 붉은 것은
주왕의 죽음으로 흘러내린 핏물을 타고 피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한다. 또 화살을 맞고
명을 끊었기에 수단화(壽斷花)라고도 불린다.
주왕굴로 가는 입구에는 주왕암이 세워져 있다.
주왕을 기리기 위한 암자인데
온통 거대한 기암이 둘러쌓고 있는 곳에
주왕굴로 가는 작은 오솔길에 철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주왕암의 첫 정자는 주왕을 기리는 가학루(駕鶴樓)다.
가학(駕鶴)이란 천자가 타는 수레를 일컫는 말이다.
주왕암의 당우라야 요사채와 가학루와 나한전이 전부다.
필자가 방문 당시에는 법당은 비어 있었다.
아직 제대로 불사(佛事)를 일으키지 못한 모양이다.
주왕산의 주왕굴의 주인인 주왕(周王)은 어떤 인물인가.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주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중국 당나라 때의 주도(周鍍)는 자신을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당나라 수도 장안을 공격했으나 안녹산의 난을 평정한
곽자의(郭子儀) 장군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망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주도는 진(秦)나라 때 복야상서를 지닌 주의라는
사람의 9대손으로 태어나 대단히 총명했다고 한다.
후주(後周)라는 나라는 중국의 고대국가 역사를 보면
907년부터 송이 건국된 960년까지 5대 10국이 난립했는데
5호 10국의 마지막 왕조다. 오대(五代)의 마지막 왕조로
951년에 후한을 무너뜨리고 곽위(郭威)가
개봉(開封)에 세운 국가이다.
국호는 주(周)이지만 과거 무왕(武王)이 세운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주, 성씨를 따라 곽주(郭周), 시주(柴周)라고 부른다.
곽위는 황제가 되었지만 거병할 때
자식이 모두 살해되어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954년에 죽을 때 처남의 아들인 시영(柴榮)을 양자로 세워
제위를 잇게 하니 이가 후주 세종(世宗, 954년 ~ 959년)이다.
그러나 세종 역시 959년, 겨우 39살에 병사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시종훈에게 제위를 잇게 하였지만
군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서
장군 조광윤(趙匡胤)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통일 왕조의 초석을 닦은 후주도 겨우 9년 만에 멸망하고,
조씨에 의한 송(宋)이 개창되었다.
그러나 이 오대 최후의 왕조인 후주의 황족인 시씨는
조광윤의 쿠데타 때에 선양(宣讓)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대귀족으로서 대우받았고,
시종훈 본인도 조광윤의 후한 대우와 보호를 받았다.
그런데 주왕의 전설은 당나라 때 안녹산의 난을 평정한
명장 중 한 분인 곽부의 장군에게 패하여
신라의 석병산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안녹산의 난은 755년경에 발발했는데
망하지도 않은 나라의 부흥도 그렇고
인물과 시대 또한 맞지 않는다.
대전사에서 발견된 낭공대사(郞空大師)의 비전(祕傳)인
<주왕사적>의 비기(祕記)에 의하면
인물과 연대가 왜곡되었음을 말하고 있으니
이 사실은 그렇다 하고 넘어가자.
주왕은 반란이 실패하자 멀리 한반도의 석병산으로 피신했다.
그는 산 입구가 되는 주방천 협곡에 산성(자하성)을 쌓고
재기를 노린다. 나중에 주왕이
신라 땅에 숨어 들어간 것을 안 당나라에서는
그를 잡아달라고 신라에 요청했다.
신라는 마일성 장군의 형제들을 필두로
진압군을 이곳 석병산으로 보내 주왕과 그의 군사들을 격퇴했다.
신라군과의 싸움에서 패한 주왕은 폭포수가 입구를 가리고 있는
주왕굴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몰래 세수하러 나왔던 주왕은
그만 마장군의 낚시에 걸려 생포되어
당나라 장안에서 참수되었다고 하고,
또 주왕이 마장군의 화살과 철퇴를 맞고 최후를 맞았다고도 전한다.
주왕이 신라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흘린 피가
주방천을 물들인 뒤 붉은 꽃망울을 피웠다는 꽃이 주왕산 수달래이다.
그래서 수달래는 주왕의 넋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장굴은 주왕이 갑옷과 무기를 숨긴 곳으로 전해진다.
기봉은 주왕이 적과 대치할 때 대장기를 세웠다고도 전해지고,
군량미처럼 보이기 위해 낱가리를 돌렸다고도 전해진다.
주왕산 초입의 대전사(大典寺)는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을 위해
고려 태조 2년 보조국사 지눌이 세웠다고 전해지고,
백련암은 주왕의 딸 백련공주의 이름을 딴 암자라고 한다.
연화굴은 백련공주가 성불한 곳이라고도 하고
주왕이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라고도 한다.
주왕굴 앞의 주왕암은 주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곳이라고 한다.
이것이 주왕산에 전해지는 주왕의 전설이다.
전설(傳說)이란 역사의 한 사실만을 끌어다가
인물과 시대를 왜곡하여 드라마틱하게 연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를 더 벗어나 비이성적이고 초현실의 세계로 둔갑하면
그것은 신화(神話)가 되어 버린다.
주왕산에는 이런 전설이 많이 배어 있다.
달기폭포니 달기약수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는 주(周)나라와는 상관도 없는 지명이다.
이 이름은 중국의 옛 상고시대의 은(殷)나라 시대
폭군으로 불리는 주(紂)왕 애첩인
<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달기라는 이름만 따온 것이다.
주왕산에는 신라의 왕위 쟁탈 사건과 연계된 이런 전설도 전한다.
신라 시대의 원성왕(김경신)과 왕위 계승을 다투었던 김주원이
당시 이 산에서 군사를 이끌고 농성하여
그 이름을 따 주왕산이라 했다는 가설이 있다.
이 설은 제1폭포를 오르다 보면 급수대를 만나는데
그 급수대의 안내판에 적혀 있는 내용에 따르면
김주원(金周元)이 김경신(金敬信)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이곳 주왕산에 대궐을 건립하였다는데,
당시 산 위에는 우물이 없어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우물물을 대신하였는데 그 후 이곳을 급수대라 불렸다고 한다.
역사를 보면 왕위 계승 싸움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원성왕에게 정치적 위협을 느꼈던지 서라벌 정계를 떠나
본인의 장원(莊園)과 친족 세력이 있는
명주(오늘날의 강릉시)지방으로 물러나게 되고
원성왕 2년(786)에는 원성왕이 그의 세력을 달래기 위해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하였다.
후에 김주원은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역사의 기록만으로 보면 김주원이
이곳 주왕산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자하교)
김주원이 사후 그의 아들 김헌창이
822년 3월 18일(신라 헌덕왕 14년),
웅천주 도독으로 재임 중이던 신라 진골 귀족으로 난을 일으켰는데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것은 김주원이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난 지 무려 37년 후로
원성왕 이후 세 번이나 왕이 바뀐 뒤니,
아버지의 왕위를 이유로 난을 일으켰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다.
이는 김헌창이 본인의 권력욕과 야심 때문에
난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
제3폭포 상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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