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의 발자취 3) 경산 반룡사

2023. 12. 31. 08:36국내 명산과 사찰

 

경상북도 경산은 원효대사와 설총

그리고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선사(一然禪師: 1206~1289)가

태어난 곳으로

이들 3명을 배출한 3 성현(聖賢)의 고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원효대사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마지막 코스로

반룡사(盤龍寺)를 찾았다.

반룡사(盤龍寺)라는 이름은 가진 사찰은 국내에 3곳이 있다.

평양에 하나가 있고

통일신라의 제40대 애장왕 3년 802년에

해인사와 함께 창건되었다는

고령 반룡사와 경산 반룡사가 있다.

 

경산 반룡사(盤龍寺)는 경북 경산시

용전면 구룡산 자락(반룡산)에 자리를 잡은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 무열왕 7년(서기 661년)에

신라 삼국통일의 성업을 달성하기 위한 호국도량으로

원효에 의해 창건된 신라 왕실 기원 사찰이며,

이후 고려시대 원흥국사가 중창하면서 신흥사라 하였다.

전국의 수많은 석학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당대의 석학 이인로 (1152∼1220) 또한 이곳 신흥사에서

낙조의 아름다움을 산거(居)라는 시로

신사의 고즈넉함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신흥사는

60여 년에 걸쳐 내원암, 벽운암, 대적암, 은선암, 안적암까지

5개의 암자와 26동의 대가람을 완성하며 반룡사라 하였다.

임진왜란과 1916년 화재로 인해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1997년 이후 복원된 모습이다.

 

주요 당우로는 누각을 비롯하여 대웅전, 천불전, 산신각이 전부이며

석조물로는 삼 층 석탑과 석조관음 입상이 왕재에 세워져 있다.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59호로 지정된

화문면석부재(花紋面石部材)가 남아있다.

 

누각(樓閣)

높은 돌담 위에 2층 누각으로 일반 사찰의 보제루나 만세루에 해당한다.

반룡사의 마스코트로 1층은 석조 기둥 위에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누각(樓閣)으로

지붕은 주포식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반룡사의 이 누각은 누하진입(樓下進入) 형으로

계단을 오르면 전면에 삼 층 석탑이 보이고

그 뒤편에 다시 돌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보인다.

 

 

 

 

 

삼층석탑

이 석탑은 최근에 조성된 삼층석탑이다.

기단부의 상대면석은 신라의 양식을 모방하여 탱주를 조각하였고

탑신부의 옥개석 받침은 모두 5계단으로 동일하다.

상륜부는 보개 위에 보주를 올려놓았다.

이웃한 불굴사의 삼층석탑(보물 제429호)을 모방한 것 같으나

기단부와 탑신부는 같지만, 상륜부는 다르게 조성되어 있다.

 

 

 

 

 

대웅전

대웅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반룡사의 주 법당이다.

법당 수미단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협시로 관음보살을 우협시로 지장보살을 모셨다.

 

 

 

 

관음보살

지장보살

주존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석가모니불로 보이지만

협시보살을 기준으로 보면 아미타불이 된다.

관음보살의 원통보관이 특이하다.

원통보관으로는 대개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과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24호)을 모방하는데

반룡사의 관음보살의 낮은 보관과는 형태가 매우 다르다.

탱화로는 신중탱, 지장탱, 칠성탱이 조성되어 있다.

 

신중탱

지장탱

 

칠성탱

 

산령각(山靈閣)

대웅전 좌측 뒤편에 흙담을 둘러싸여 있는 산령각은

전면 1칸, 측면 1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법당에는 산신탱이 걸려 있다. 산신탱 옆에는 작은 독성탱이 걸려 있다.

 

 

 

천불전

산령각 아래 천불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주포식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 소불로 1,000불 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다.

본존 뒤편 탱화는 아미타탱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로 두고 있다.

 

 

 

 

 

 

 

석조관음입상과 왕재(王峴)

구룡산 기슭에 자리한 반룡사 대웅전 뒤편 고갯길 언덕에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서 있다.

구룡산, 이 고갯길은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태어난 손자 설총을 만나기 위해

태종 무열왕 내외가 자주 넘어왔다는 전설을 지닌 고갯길이다.

한자로는 왕현(王峴)으로 표기하는데

우리말로는 왕재 즉 왕의 고갯길이라는 의미다.

 

 

 

 

 

설총(薛聰)은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인 듯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원효불기 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 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 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경산에서는 원효대사와 일연선사와 더불어

경산의 삼성현으로 꼽히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기록된 설총의 탄생기록을 보면

그의 아버지는 고승 원효(본명 :설서당(薛誓幢)) 대사라고 한다.

원효가 하루는 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을 것이라

(誰許沒斧 我斫支天柱)"라고 노래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전해 듣고 원효가

나라에 크게 쓰일 인재를 낳고자 함을 알고 나서

과부였던 둘째 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원효를 이어주려고

관리를 보내 원효를 데려오게 했는데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던 원효가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져버렸다.

관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려가서 옷을 말리게 했는데,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다가 요석궁에 있던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보냈고

그래서 나은 아들이 바로 설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총은 무열왕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설총의 생모인 요석공주는 어떤 사람일까?

신라 최초 진골 출신 태종 무열왕의 딸로서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보희라 기록되어 있다.

김흠운(金歆運:?~655)과 혼인하였다.

김흠운은 ‘김흠운(金欽運)’으로 쓰기도 하는데

내물마립간의 8대손으로 아버지는

잡찬(迊飡) 달복(達福)이다.

요석공주와 혼인으로 태종 무열왕의 사위가 되고,

훗날 신문왕의 장인이 되기도 한다.

 

그의 생애를 보면 김흠운은 어려서는

화랑 문노(文努)의 낭도로서 수행하였으며,

명예와 기개를 중시하였다.

 

655년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북쪽 변방 33 성을 빼앗기자

낭당대감(郎幢大監)으로 출전하여,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전쟁에 참여하였다.

백제 땅 양산(陽山: 충청북도 영동) 밑에서 진을 치고

조천성(助川城: 충북 영동군 양산면)을 공략하려다가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패배하였다.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일단 후퇴하여

후일을 기약하자고 권유하는 것을 뿌리치고

적과 싸우다가 끝내 대감(大監) 예파(穢破), 소감(小監)

적득(狄得)과 함께 전사하였다.

죽은 뒤 일길찬(一吉飡)에 추증되었으며,

사람들은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는 김흠운 사후

27년이 지난 683년(신문왕 3년)에

왕비가 되어 효소왕을 낳았다. 박창화 저 화랑세기에서는

김흠운의 부인이 바로 요석공주라고 주장한다.

기록에 남은 무열왕의 사위 중에 일찍 전사한 사람이

김흠운밖에 없는 것을 보면 실제로도 가능성이 있는 얘기이긴 하다.

또 삼국사기 효소왕 즉위조에 효소왕의 어머니인

신목왕후의 아버지 김운 공이

김흠운이라고도 불린다는 내용이 있어,

김운과 김흠운은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사실을 요약하면 요석공주는

김흠운과 결혼하여 신목황후가 된 딸을 두었고,

두 번째 결혼으로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것이 된다.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로맨스를

혹자는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백상계(白孀契), 청상계(靑孀契)가

암묵적으로 용인되어듯 우리나라 성문화역사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꽤 흥미롭다.

輕合易離(경합이리)이라 했던가.

가볍게 만나서 쉽게 헤어지는 것이

옛적 우리네 사대부의 성문화였던 것이다.

신라시대 향가인 <서동요>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여성이 남성을 유혹했던 일은 비일비재하고

이 풍습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여성들의 자유로운 성 관습이 유행했다고 했다.

왕실은 일부다처(一夫多妻)제를,

일반 평민은 일부일처(一夫一妻)제가 원칙이었지만

연애는 자유로웠다고 하며.

여성의 재가도 자유로웠다고 한다.

그러므로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와의 혼인은

당시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