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Janus)와 딱따구리

2024. 1. 26. 15:29삶 속의 이야기들

 

세상사 모든 것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외쳐대는 내로남불 하는 사람, 안면 몰수하고 앞의 말과 행동을 뒤집는 철면피 같은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일러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 같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혹자는 이런 사람이 반드시 그릇된 것이 아니라고 반문한다. 사람이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눈은 4개이고 입도 2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양면(兩面)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은 보는 눈이 달라서 앞과 뒤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악인(惡人)이 선인(善人)으로 포장되고 비위나 성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정직한 사람, 도덕군자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눈이 네 개이고 입이 둘이라고 하지만 사람은 같은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남들 앞에서는 이 말 하고 돌아서서는 딴말하고 행동한다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찌 그런 사람을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혹자(或者)는 두 눈으로 보는 것보다 네 개의 눈으로 보면 사실을 더 정확하게 판단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네 상식으로는 당연히 이건 궤변이다. 여러 사람의 입이 다른 것과 한 사람의 입이 다른 것은 완전 별개의 문제다.

 

진리와 양심이 보는 방향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것이 어찌 진리이고 양심이 되겠는가? 이것은 개인이나 어느 집단이 누리고 있는 세력의 대소(大小)에 따라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이는 상황이 불리(不利)하다고 해서 자기에게, 또는 자기편에게만 유리한 면을 골라서 앞서 한 말을 돌아서서 뒤집는 내로남불이요, 철면피(鐵面皮)가 아니겠는가. 살다 보면 상황이 다를 수는 있다. 그래서 오류(誤謬)를 범하기도 하고 잘못 판단하여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과천선(改過遷善)이란 말이 있듯이 앞서 한 말이 판단이 잘못되어 정도를 벗어났다면 사과하고 바로 잡아가야 하는 것도 또한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정치가, 성직자, 교육자는 물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빈부의 차이 없이, 지식인이든 연예인이든 가릴 것 없이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 사람이 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각종 비리나 범죄(犯罪)가 머릿수에 따라 선악시비(善惡是非)가 뒤바뀌니 말이다. 하긴 기관총으로 무고한 시민을 무참히 살육한 미국의 악명 높은 살인자 알 카포네가 법정에서 “내가 살인을 한 것은 단지 살기 위해서 한 짓일 뿐인데 그것이 어찌 죄가 된다고 하는가?” 라는 말처럼 우리나라도 어느 높으신 어른의 말씀같이 내로남불 정도야 양념 정도로 치부하는 사회 풍토가 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부처님 말씀을 빌리자면 현실의 세계가 오탁(五濁)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회주의(機會主義)나 이기주의(利己主義) 자들을 위한 피난처가 넓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善)하다고 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그 선한 양심이 오염되고 부패하고 타락되었을까? 야누스(Janus)라는 말은 본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고 사람이 개선문과 같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건물의 출입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말이 나온 어원을 찾아보니 야누스는 본래 고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문을 지키는 신이었다.

 

악신(惡神)이 아니라 선신(善神)이었다. 기원전 772년 고대 로마의 건국자이자 초대 왕이라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 로물루스(라틴어: Romulus) 시대에는 독립적인 구조물로, 행운을 가져다주는 상징적인 의례용 출입구가 많았는데 이를 야누스라 불렀다. 그 후 시대가 바꾸어 로마가 제국으로 거대해지자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 시대에 군대가 출정할 때는 특별한 미신이 결부되어, 야누스를 통해 행진해갔는데 이 문은 행운(幸運)을 가져오는 것과 불운(不運)을 가져오는 문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아치 길은 야누스 게미누스(Janus Geminus)로 로마 광장(Forum)의 북편에 있는 야누스의 성소로 남아 있다. 그 문은 양쪽으로 열리는 문이 달린 단순한 직 4각형 모양의 청동 구조물이었다. 전통적으로 이 성소의 문들은 전쟁 때는 열려 있고 평화 시에는 닫혀 있었다.

오늘날 인간들은 그 선한 마음이 자기에게, 자기편에게 유리하면 마음을 열고 불리하면 닫아버리는 야누스의 문이 된 모양이다.

 

미술에서 야누스는 양면 얼굴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턱수염을 가졌거나 가지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때때로 4갈래 길의 아치의 정령으로서 4개의 얼굴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영어로 1월을 말하는 January 말도 야누스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고 한다. 해가 바뀜을 의미하는 것인가? 시대 상황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는 의미일까? 야누스의 이 문은 전쟁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이겨야만 한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그릇된 것, 인식 오류로 저질을 잘못된 판단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개과천선의 경종(警鐘)을 의미하는 문(門)일까?

 

 

수락산과 불암산에는 산새가 많기로 알려진 산이다.

숲속의 오솔길을 걷다 보면 나무 위에서 “딱~ 딱” 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무 위에서 나무를 쫓는 딱따구리의 소리다.

딱따구리는 숲속에서 살면서 날카롭고 단단한 부리로 '딱딱' 소리를 내며

나무껍질을 쪼아 구멍을 내고 갈고리같이 생긴 혀로 그 속에 든 벌레를 잡아먹는 이로운 새로 알려졌지만, 인간들의 무분별한 개발로 도심 속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딱딱거리는 그 소리가 오탁의 세계에 빠져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소리 같다고.

 

 

 

 

수락산 매월정을 오르면 딱따구리를 빌어 사회의 경종을 울리는 매월당 김시습의 이런 시가 걸려있다. 수락산을 오르내리면서 무심히 지나갔던 등산객들이여, 잠시 걸음을 멈추어 옛 선인의 이런 경종의 시를 한 번쯤 음미해 보고 가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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