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날의 소요산 풍경
2024. 2. 7. 17:22ㆍ삶 속의 이야기들
눈이 내린 날의 산사는 적막하기 그지없다.
깊은 산속의 절일수록 더욱 그렇다.
웬만한 불심(佛心)이 없다면, 절에 특별한 볼일이 없다면,
누가 미끄러운 눈길을 헤쳐가며 산사를 찾겠는가.
그런데 소요산 자재암은 깊은 산속에 있는 절이 아니다.
웬만큼 큰 눈이 내려도 못 다닐 정도로 위험한 절도 아니다.
자재암은 전철역에서도 그리 멀지 않고,
기온도 영상이라 잠시 나들이하기는 오늘따라 안성맞춤이었다.
느지막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전철을 타고 소요산으로 향했다.
자재암 가는 포장된 길은 이미 눈이 다 녹았고
숲과 계곡에만 눈이 쌓여 있었다.
단풍철이었다면 소요산 자재암 가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겠지만,
눈도 내렸고 또 평일이라서 그런지 오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젊은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대부분이 다 나이 드신 분들이다.
이제 나도 이 대열에 끼인 모양이다.
망팔(望八)도 중반이 넘어서야 하던 일을 접고 나니
이런 것도 소일꺼리가 되는가 보다.
한편으로 서글픈 마음도 들었지만
삶은 달려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지 않겠는가.
그 붉었던 단풍나무도 삭풍에 잎이 지고
눈 서리 맞으니 삭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인생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하지 않던가.
한세상 살다가는 길 메이고, 쫓기며 살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여시래(如是來) 여시거(如是去) 그렇게 살다 가면 될 것을.
인생길 그저 소요(逍遙)한다고 여기며 살다 가자.
옷깃에 스며드는 바람 소리에 한 생각 담아 본다.
자재암 입구의 매표소에 이르니
산행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그냥 들어가라고
매표소 직원이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안에서 손짓만 한다.
일주문을 지나 원효굴에 이르니 참배객이 없어
원효폭포도, 원효굴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다.
눈 녹은 물이 가느다란 물줄기가 되어 졸졸 흘러내린다.
원효굴에는 모신 석조 아미타 삼존불상도
삼매(三昧)에 들었는지 고요하기는 마찬가지다.
원효굴에서 자재암 가는 길은 계단으로 이어진다.
옛적에는 이 금강문에 종을 매달아
오가는 사람들이 종을 치게 되어 있었는데
종은 철거되고 기둥에는 주련이 새겨져 있었다.
금강문의 주련
神光不昧萬古輝猷(신광불매만고휘유)
入此門內莫存知解(입차문내막존지해)
신령스러운 빛이 어둡지 않아 만고에 기리 빛난다.
이 문에 들어오면 알음알이 지식은 내려놓으라는 의미다.
사찰 경내에 들어가는 입구나 해탈문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법어다.
눈 덮인 자재암의 풍경이 겨울 산사다운 정취를 느끼게 한다.
산신각 오르는 계단은 막아 놓았다.
고요의 적막이 온 경내를 감돈다.
나한전 옆 폭포는 옛날처럼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계단으로 돌담을 쌓은 풍경이 웅장스럽게 느껴진다.
선녀탕으로 가 볼까 하다가
돌아 나와 공주봉 쪽으로 잠시 걷다가 가기로 했다.
오솔길 같은 길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이 녹고 있어 미끄럽지도 않았다.
혹시 몰라 아이젠을 가지고 갖지만 착용할 정도도 아니다.
공주봉 가는 길 쉼터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검은 염소 한 마리가 코앞에 멈추고 빤히 쳐다본다. 집
사람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자세히 보니
방목된 염소라 공격성은 드러내지 않았다.
몇 년 전에도 이 부근에서 검은 염소를 만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잽싸게 도망을 갔는데, 요놈은 나를 빤히 주시한다.
참. 대담한 놈이다. 염소 얼굴을 보니
먹이를 구하러 내려온 모양 같았다.
가볍게 나온 길이라 가지고 온 것은 귤과 송편뿐이었다.
귤을 던져주니 본체만체한다. 송편을 던져주어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은커녕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도리어 난감했다.
염소도 한참 멀거니 나를 쳐다보더니 숲속으로 사라진다.
녀석, 무엇 하러 내려왔지.
심심해서 사람이 그리워 내려왔나.
돌아서서 내려오면서 생각하니 참 웃기는 염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왜 태어났는지 모르듯
이 염소도 산에서 내려왔지만 왜 내려왔는지를 모르는 모양이다.
전철을 타려고 역 앞 식당가를 지나는데
왕방울 눈을 한 나무 정승이 입을 굳게 다물고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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