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의 발자취 2) 경산 불굴사와 홍주암

2023. 12. 16. 18:54국내 명산과 사찰

 

 

경산지역 사찰 순례는 제석사를 먼저 포스팅했지만,

사실은 이번 기행의 주목적은 불굴사(佛窟寺)의 홍주암이었다.

필자가 이 절을 찾게 된 것은 묘한 꿈 때문이다.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사찰이 보였는데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사찰이었다.

깨고 나니 다른 것은 기억이 없는데 대웅전의 모습과

<불굴사>란 이름만 선명하게 떠올라 이런 사찰이 있는가 싶어

인터넷에 <불굴사>를 검색해 보았더니 정말 경산에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내려오게 된 것이다.

전생에 나와 무슨 인연이 있었길래 꿈속에 나타났을까 하는

실오라기 같은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원효대사가 처음 수행했던 곳으로 알려진

동굴 법당으로 알려진 홍주암도 관심이 컸다.

홍주암은 옛적에는 원효암, 불굴암, 불암으로

불렸다고 하는 불굴사의 사내 암자다.

 

사찰 안내서에 의하면

불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 690년(신문왕 10)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의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데,

회광당 한옥희대사가 주석 시 옥천암, 천성암, 청룡암 등

12개의 부속 암자와 50여 동의 전각, 8대의 물방아를 갖추고

쌀을 찧어 승려와 신도들의 공양미를 올릴 정도로 대사찰이었다고 전한다.

 

1723년(경종 3)에 중창하였으나

1736년(영조 12)에 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퇴락되었다가,

순천 송광사의 한 노승이 현몽하여 이곳으로 와 중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1860년(철종 11)에 유혜(有惠)·쾌옥(快玉)이 중창하였으며,

1939년에 은해사의 백현(伯鉉)이 다시 중창하였다고 한다.

 

1988년 원조가 본래의 대웅전 위치를 찾아

그 자리에 인도에서 모셔 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적멸보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적멸보궁, 약사보전, 독성각, 산령각,

관음전, 향적전과 요사 등이 있다.

그 밖에 원효와 김유신이 수련하였다는

원효굴 또는 불암으로 부르는 석굴에는

홍주암(紅珠庵) 독성전이 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홍주암 입구 계단 보수 공사 중이라 보지는 못했다.

석굴은 1976년에 내부를 보수하던 중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불상 1점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른 시간에 불굴사에 도착하니 산등선 위에 홍주암이 보이고

입구에 종각이 보인다.

경내로 진입하는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적멸보궁이 보이고 그 앞에 삼 층 석탑이 보인다.

좌측에는 관음전이 보이고 우측에는 향적전이 보인다.

 

 

 

 

 삼층 석탑 앞의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등의 하대석은 복련을 조각하고 간주석은 8각 원형이며, 

상대석은 앙련을 조각하고 그 위에 화창을 만들고

그 위에 옥개석을 올리고 그 위에 보주를 조성해 놓았다.

 

 

 

 

 

@삼층 석탑

명칭: 경산 불굴사 삼층석탑 (慶山 佛窟寺 三層石塔)

조성시대: 신라시대

탑의 높이: 743cm

문화재지정: 보물 제429호

 

삼층석탑은 적멸보궁 앞에 조성되어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린 형식으로

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고 긴 돌로 탑의 구역을 마련하고,

바닥돌은 사방으로 하나씩 4장의 돌을 붙여서 짰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은 꽤 두꺼운 편이며,

돌의 가운데에 2단의 괴임돌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가운데돌에는 모서리기둥(우주)과

가운데기둥(탱주)을 새겼으며, 맨 윗돌은 얇지만,

그 아래에 윗돌과 반듯하게 한 단을 붙여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들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짰는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모두 4단씩으로 줄어들었고

추녀 밑은 반듯하지만, 마무리 부분에서 뚜렷하게 추어올려져 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 역시 완만한 경사를 보이다가

마무리 부분에서 치켜올림이 상당히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남아있다.

 

돌의 마무리에서 정연함을 보여 탑 전체적으로 뚜렷한 비례가 돋보이는 탑이다.

그러나 탑의 규모가 작아진 점이나, 지붕돌의 치켜올림이 지나치게 큰 점,

각 부분의 밑에 새긴 괴임돌의 표현을 강조한 점 등에서 형식적인 면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시기의 탑으로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불굴사 삼층석탑의 조성시대는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작품으로

현재 보물 제4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743㎝의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이다.

 

 

 

염불당과 지장전

삼층석탑 우측에 염불당(念佛堂)을 조성하고

염불당 한쪽에 지장전을 조성해 놓았다.

 

 

 적멸보궁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의 이 건물은

불굴사의 주 법당으로 이용되는 적멸보궁이다.

불굴사의 적멸보궁은 1988년 인도에서 모셔 온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지었는데,

이 자리가 본래 있던 대웅전 자리라고 한다.

내가 꿈속에서 본 대웅전이 지금의 적멸보궁인 모양인데

꿈속에서 보았던 대웅전과는 모습은 비슷한데

주변에 전각이 들어서 있는 것과 대웅전 뒤편 숲을 넓혀

사리탑을 조성해 놓은 것이 달랐다.

 

 

 

 

 

적멸보궁 뒤 쪽에 사리탑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사리탑은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불기 2531년(1987) 회광원조대사가 법당 안에 모셔놓은 것을

불기 2558(2014.7.15.)년

주지 도광 덕조스님이 현 장소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석가모니불이 『화엄경』을 설한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하는 전각으로,

불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이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는 곳임을 상징한다.

따라서 진신인 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불전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서의 석가모니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적멸보궁의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한다.

불굴사의 적멸보궁은 불묘(佛廟)에 사리탑을 세워놓았다.

 

우리나라에는 불사리를 모신 곳이 많지만, 그중 대표적으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①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②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중대(中臺)에 있는 적멸보궁,

③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 있는 적멸보궁,

④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적멸보궁,

⑤ 강원도 정선군 동면 고한리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등이다.

 

5대 적멸보궁 외에도 설악산 봉정암을 비롯하여 선산 도리사,

비슬산 용연사 등이 있고 근래에 조성된 신흥사찰에서도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적멸보궁이 여러 사찰에 조성되고 있는데

불굴사의 이 적멸보궁도 그중 하나에 속한다.

 

불굴사의 적멸보궁의 구조를 보면 수미단을 조성하고

유리벽으로 밖의 사리탑을 조망하게 되어 있고 그 위에 닫집을 세웠다.

 

법당의 닫집은 부처의 세계인 불국정토, 극락세계의 궁전을 가리키는 적멸궁,

칠보궁, 만월궁, 내원궁 등을 상징한다.

이러한 닫집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인다.

형태에 따라 닫집은 보궁형(寶宮形), 운궁형(雲宮形),

보개형(寶蓋形)으로 나눈다.

시대별로는 보개형에서 운궁형, 보궁형으로 발전해왔다.

불굴사의 적멸보궁의 닫집은 운궁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보궁형은 공포를 짜 올려 건물처럼 만든 화려하게 만든 닫집으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 공포 아래에는 짧은 기둥이 달려 있는데

이를 헛기둥[虛柱]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의 닫집이 있다.

 

운궁형은 공포(栱包)를 사용하지 않은 간결한 구조로 되어 있고,

불상 위 천장에 구름, 용, 봉, 비천 등을 장식하고 있는 구조다.

대표적으로 경산 환성사 대웅전과 서산 개심사 대웅전,

봉선사 금당의 닫집에서 볼 수 있다.

 

보개형은 천장 일부를 감실처럼 둥글게 속으로 밀어 넣은 형태인데

고대 불전에서 많이 보인다. 대표적으로 강진 무위사 극락전과

봉정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다.

보개형은 닫집이라고 하기보다는 보개천장으로 불리며

천장의 한 종류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의미와 역할은 닫집과 같다.

 

적멸보궁의 신중탱

 

 

 

 

산령과 독성각

산신과 독성을 모셨다. 삼성각이라면 칠성을 함께 봉안했을 텐데

삼성각이 아닌 전각이기 때문에 독성 산령으로 되어 있다.

 

 

약사보전

전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지은 이 건물은

약사보전으로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로서

법당 안에는 석조 약사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여래입상은 1736년에 내린 큰비로 사찰 전각이 무너질 때

매몰된 것을 순천 송광사 노스님이 현몽하여 발굴한 불상이라 전한다.

상호의 표정과 신체의 표현, 그리고 대좌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약사여래입상

명칭: 불굴사 석조입불상

문화재지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1호

크기: 전체 높이 233cm, 어깨너비: 75cm 머리 높이:53cm

조성연대: 고려시대

 

기단부는 화강암으로 이 화강암 위에 조성된 이 불상은

약사여래로 얼굴 및 왼손 등 파손된 부분이 많아 보수된 것이다.

사찰 안내서에 의하면 갓바위 약사불은 갓을 쓴 남성상이며

불굴사의 이 약사불은 족두리를 쓴 여성상의 약사불이라고 한다.

 

 

 

 

 

 

 

관음전

관음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 주포식 팔작지붕으로

법당 앞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법당에는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관음보살은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연꽃 한 송이를 들도 있고

금색으로 도색된 거신광은 화염상이 조성되어 있다.

 

 

 

 

 

 

관음전에서 바라 본 전경

관음전을 내려 오면서 바라 본 관음전

 

 

 

공덕비

관음전을 내려오니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팔공산 불굴사 원조회광대선사공덕비>라는 비명이 새겨진 공덕비다.

 

좌측은 약사보전, 중앙은 적멸보궁, 우측 건물은 향적전이다.

향적전과 적멸보궁 중간 언덕 부위에 산성독성각이 보인다.

 

 

 

옛 건물의 석주 받침돌인 모양이다.

 

 

 

홍주암

이 석굴은 불굴사 창건 이전에 원효대사가 득도한 석굴이라 해서

원효암(元曉庵), 또는 불암(佛庵)이라고도 불린다.

이 석굴은 또한 김유신 장군의 삼국통일 성취 기도처로도 알려져 있다.

아마도 ‘불굴사’라는 사명이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홍주암을 오르는 비상계단으로 임시 철계단을 조성해 놓았다고 했는데

현재 홍주암은 오르는 돌계단과 철계단 모두 보수한다고

입구가 봉쇄되어 있다.

계단 보수 작업 중인 곳으로 눈 딱 감고 올라가려 했더니

공사 임부들이 나와 꽥꽥 소리를 지른다. 내려가라고.

그냥 돌아서려다 그래도 미련이 가시지 않아

먼발치에서 사진 몇 장 담고 돌아섰다.

 

 

 

 

 

숲속에 있는 부도, 설명도 안내판도 없어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다.

 

미륵불

관음전 뒤편 산 중턱 서 있는 석조 미륵불이 세워져 있다.

 

 

거대한 자연석 바위 위에 석조 연화대좌를 만들고

그위에 이중 보개를 한 석조미륵불입상이 세워져 있다.

목에는 삼도가 분명하고, 수인은 우수(右手)는 시무외인,

좌수(左手)는 여원인을 하고 있고

법의는 통견으로 불상의 옷 주름이 목에 반전(反轉)이 있는

통견의 옷 주름이 대퇴부에서 Y자형으로 갈라져

양다리 표면에서 반원형의 주름을 대칭적으로 표현하는 불상 양식인

이른바 우전왕상식 불상 양식(憂塡王像式佛像樣式)을 취하고 있다.

불상의 조성연대는 알 수 없고 멀리서 보아 그런지 역사가 긴 것 같지는 않다.

홍주암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보수 중이라

입산 금지가 되어 있어 멀리서 사진만 담았다.

 

 

절입구에 세워져 있는 지장보살

 

홍주암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사찰을 내려오면서 망원으로 다시 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