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의 발자취1) 경산 제석사

2023. 12. 4. 21:10국내 명산과 사찰

 

경산은 원효대사와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이 지역은 원효대사가 태어난 제석사와

살던 집을 절로 지은 초개사,

수행처인 용굴사 홍주암, 환성사와

그의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이 유년 시절에 머물었던

반룡사 등이 있다.

이번 경산 기행은 초개사를 제외한

4개의 사찰 순례를 순차적으로 포스팅한다.

그 첫 번째 코스로 제석사를 들렸다.

 

 

제석사는 원효대사(617-688)의 탄생지에 지어진 사찰이다.

원효대사는 신라 고승으로 통불교(원효종, 분함종, 해동종)을 제창하고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고 한국 고대사, 철학사, 사상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며, 독창적 지식체계의 위상과

가치는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에서 꾸준히 재조명되고 있다.

 

원효대사의 출생은 싯다르타(석가모니의 유년시절의 이름)의 탄생과

비슷한 설화를 지니고 있다. 싯다르타는 기원전 563년경

오늘날의 인도와 네팔 사이 국경 근처 히말라야 산 기슭에 있던

샤카 족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는데

마야 부인은 하얀 코끼리가 옆구리를 통해서

자궁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워지자

출산을 위해 고향으로 향하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갑자기 산기를 느끼고 사라수 아래에 출산하였는데

그가 바로 석가모니불이다.

 

원효의 어머니 조씨 부인은 유성이 품에 안기는 태몽을 꾸고

원효를 잉태하여 만삭이 되었을 때

불지촌 북쪽 율곡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산기를 느껴 남편의 옷을 밤나무에 걸어 산실을 마련하고

해산하게 되었는데, 이때 하늘에서 오색구름이 내려와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밤나무 열매의 크기와 굵기가 보통과 달라 사라율(娑羅栗)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후에 원효는 자신이 태어난 밤나무 옆에 절을 지어

사라사(裟羅寺)라 하였다. 제석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출가한 후

생가 곁에 지어졌던 사라사가 폐사되었다가

400여 년 전 밭갈이하던 농부가 불상과 탑신을 발견하고

사찰을 복원했다는 설화가 있다.

제석사에 남아 있는 석조좌불과 부서진 탑신, 석등 연화대석 등이

신라말기의 것으로 보여지고 있어 사라사의 후신이 제석사임을 짐작케 한다.

아울러 제석사에서는 원효대사 탄생일인 음력 5월 4일

매년 다례제와 원효, 설총, 일연선사를 삼성현(三聖賢)으로 모시고

그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삼성현 문화축제를 개최하며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 되면 경산시에서 주최하는

경산자인단오제에 참여한다. 경산자인단오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제석사 편액은 <도천산제척사>로 되어 있다.

뒤편 편액은 <심금당>으로 되어 있다.

 

제석사 입구는 돌계단으로 되어 있다. 고풍스러운 팽나무가 걸쳐 있다.

정편에는 대웅전이 보이고 좌측에 원효성사전이 보인다.

 

 

 

제석사는 당우가 단순하다. 대웅보전과 원효성사전, 삼성각이 전부다.

뒤편에 선원과 요사채가 있다.

 

 

@대웅보전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법당 앞 계단 아래에 석등 연화대석, 탑의 상륜부 등

창건 당시 시대를 가늠한 신라 말기의 석물 일부가 놓여 있다.

 

 

 

수미단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협시불로 아미타불을

우협시불로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있다.

불상의 일반적인 배열로 보면

협시불로서의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의 위치가 바뀌어져 있다.

 

수미단의 봉안된 양 협시불의 좌대와 주불의 좌대가 다르다.

주불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석조 좌불로

그 아래 연화좌대(蓮花座臺) 또한 석조(石造)로

이는 신라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 출처에 대한 기록이나 석조물에 명문(銘文)이 남아있지 않고,

다만 1888년도 당시 자인 현감으로 부임한

오횡묵(吳宖黙)의 자인총쇄록(慈仁叢瑣錄)에 의하면,

그가 자인 현감 부임 이후 처음 찾은 곳을 제석암(帝釋庵)이라 적었다.

 

이를 원문대로 이기(移記)하면,

“음북동(邑北洞)에 도착하여 가마를 관아로 돌려보내고

1명의 통인(通引)을 데리고 작은 암자에 들어갔다.

제석암이라고 편액(扁額)을 걸었는데, 3칸의 건물이었다.

대웅전(大雄殿)은 신라시대 고찰이라고 하였는데,

미륵불(彌勒佛)이 우뚝 서 있고, 영험이 가장 많다고 하였다.

서쪽에는 선방(禪房)이 있었고, 향적주(香積廚)에는

읍인(邑人)이 거처하고 있었다.

대개 들으니 수십 년 이래 스님이 떠나고 없어

문득 황폐한 절이 되어 속인(俗人)들이 지키고 있다고 하였고,

보이는 것이 황량(荒涼)하여 더욱 탄식(歎息)스럽다.”하였다.

본 기록에서 당시 현감(縣監)이 향전(鄕傳)을 인용,

이를 신라시대 고찰(古刹)이라고 지칭한 바가 유일하다.

 

현재 제석사 본당인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지만

위 글에서 보면 창건시 법당의 본존불은 미륵불임을 추측할 수 있는데

미륵불은 유식학에서는 본존불로 여기는 여래이다.

유식의 개조인 아상가(중국명 무착대사)에게

유식을 전한 여래가 미륵불이고,

원효대사 역시 유식학에 밝았기 때문이 아닌가 사족을 달아 본다.

 

 

 

 삼성각

제석사(帝釋寺) 삼성각(三聖閣)은 대웅보전 건립과

같은 시기에 축조(築造)된 전각(殿閣)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법당 안에는 독성, 칠성과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근간에 조성된 것이라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원효성사전(元曉聖師殿)

원효성사전은 대웅보전 좌측에 서향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축조한 2000년 대의 전형적인

박공형 팔작지붕 양식의 전각(殿閣)이다.

 

 

 

 

전각 내부에는 축조 당시에 조성한 목조 원효 성사 상과

뒤편에는 원효 성사의 팔상도(八相圖)를 배치한 후

매년 자인 단옷날 전 다례재(茶禮齋)를 봉행(奉行)하였다.

2023년 2월 12일 이전에 조성한 원효 성사 상이 원만하지 못하다 하여

이를 훼철(毁撤)하고 은행(銀杏) 단목(單木)으로 새로이

원효의 성상(聖像)을 조성하고 봉안(奉安)하였다.

 

 

 

 

옛 창건시 우물이 선원 앞에 있다.

우물벽은 석조로 새로 조성해 나무 뚜껑을 닫아 놓았다.

 

 

 

대웅보전 쪽에서 보면 정문 위쪽에 심검당이란 편액이 보이고

2~3백년은 되어 보이는 팽나무가 걸처 있다. 

 

 

 

(원효대사가 태어났다는 밤나무에 얽힌 이야기)

석가모니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밤은 1톨이 사발만 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에서 일하는 머슴이

"우리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한 끼에 밤 2톨밖에 안 준다."하고

관가에 고발했는데 관리가 고발을 받고 와서 막상 보니

밤 1알이 큰 사발만 한지라

"앞으로는 한 끼에 밤 1톨만 주라." 하고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훗날 원효대사는 옛 살던 집터에 초개사를 짓고,

밤나무 있던 곳으로 알려진 곳에는 사라사(娑羅寺)라는 절을 세웠다고 한다.

사라사 터로 알려진 자리에 지은 절이 현재의 제석사가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