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전의 모태 설화를 지닌 곡성 관음사

2023. 11. 25. 18:56국내 명산과 사찰

 

 

곡성 성덕산 관음사는

고대 소설 심청전의 모태가 되었던 창건 설화를 간직한 사찰로

영조 5년(1729)에 백마선사가 찬술한

<관음사사적(觀音寺事蹟)>에 의하면

1,700여 년 전 백제 분서왕 3년(301)에

중국 진나라 원홍장 황후가 보내온 금동관음상을

성덕보살이 벌교 낙안포에서 모셔 와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관음사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 지정되어 있다.

 

사찰 안내서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23년(1374)까지

다섯 차례 중건한 원통전과 80여 동의 전각이 있었다고 전하여

당시 내륙의 유일한 관음성지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丁酉再亂:1597)으로

원통전을 제외한 모든 당우(堂宇) 소실(燒失)되었으나

그 후 금랑각(金浪閣)을 비롯한 옥계루(玉溪樓)와 영성각(迎聖閣),

명부전, 영산전, 강설당, 등이 새로 지어져

조선 후기까지 중 개축을 거듭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다시 전각이 모두 소실되자

선조 37년(1604) 신희, 담원, 담청 등 세 스님에 의해

5년에 걸쳐 소실된 전각을 모두 복원하였지만,

순조 32년에 큰 홍수가 일어나 전각의 절반이 침수 붕괴하였다고 한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 경의 공비토벌대에 의해

당시 국보 제273호로 지정된 원통전과

국보 제214호로 지정된 금동 관음보살 등

국보 2점과 20여 동의 전각들이 모두 불태워졌다.

 

현재 관음사에는 얼굴만 남은 소조 관음상과

국내에서 유일하게 석조 어람관음 상이 모셔져 있고

수상교각(水上橋閣)인 금랑각을 비롯해

1954년에 대은암(大隱庵)을 옮겨 재건한 원통전과 극락전,

해일당 등을 복원하여 현재 10여 동의 전각을 갖추고 있다.

 

관음사의 심청전과 창건 설화에 대한 위의 기록은

백마선사의 <관음사사적>에 의한 것인데

목판본인 원본은 소실(燒失)되었지만,

인쇄본이 현재 송광사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또 <조선사찰사료집>에도 실려있다.

우리나라가 불교가 전래된 공식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소수림왕 2년(372)에 전해졌고,

백제는 인도 승 마라나타가 영광 법성포에 들어와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전승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곡성 관음사의 창건 설화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백제 분서왕 3년(301)이 진실이라면 고구려보다 71년 앞서고,

마라난타가 백제에 전래한 시기보다 무려 84년이나 앞선 것이 된다.

이는 고구려에 전래하기 이전에 이미 백제에

관음 사찰이 존재했다는 것이 되므로

삼국시대에 불교 역사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게 된다.

 

 

관음사 종무소

 

극락전

전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의 이 건물은 극락전으로

 법당에는 협시보살 없이 아미타불만 봉안되어 있다.

 

 

 

신중탱

 

 

원통전

전면 3칸 측면 3칸 주포식 팔작지붕의 이 건물은 원통전으로

1954년에 대은암(大隱庵)을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관음사 사적>과 원통전 대들보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에 5차례 중건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 경의 공비토벌대에 의해 소실(燒失)되었다.

소실되기 전 당시 원통전은 국보 제273호로 지정되어 있었고,

법당에는 국보 제214호로 지정된 금동 관음보살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멸실되어 국보 지정이 해제되어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이었던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원통전과

관음보살상의 소실되기 전 모습을 찍어둔 사진이 남아있어

이를 당시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아래 사진 참조)

(현재 법당에 봉안된 관음보살상과는 매우 다르다)

 

(소실된 관음사 원통전 옛사진)

(소실된 관음사 금동관음보살상 사진)

 

(현 곡성 관음사 원통전의 관음보살상)

 

산신탱

신중탱

금고

현재 관음사에는 얼굴만 남은 소조 관음상이 유리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원통전 앞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앞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석조 어람관음 상이 모셔져 있다

 

@ 관음사사적에 기록된 심청전 이야기

현재 송광사에는 1729년(영조 5년) 관음사에서 간행된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사적'(玉果縣 聖德山 觀音寺事蹟)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책에는 관음사의 장로였던 우한자(優閑子)가

송광사의 백매자(白梅子) 선사에게 들려준 관음사의 창건 설화와

관음사 원통전을 해체 복원하던 중 발견한

상량문 기록 등에 관한 내용이 남아있다. 

이 책에 실려있는 관음연기(觀音緣起)는 다음과 같다.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이라는 고을에 원량(元良)이라는 장님이 살고 있었다. 

비록 장님이지만 원량은 양반의 후예로 청렴 강직하고

기개가 있어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원량의 부인은 바느질과 품팔이로

생계를 꾸렸지만, 산고(産苦) 끝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태어난 홍장(洪莊)이라는 딸을 원량은 업고 다니면서

이집 저집 젖동냥을 하며 키웠다. 다행히도 홍장은 성장하면서

수려한 용모를 갖췄고 특히 지극한 효심으로 사람들은 이를

대효(大孝)라 칭송하였는데 백제는 물론이고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원량은 길을 걷다 홍법사(弘法寺)의 화주승(化主僧) 성공(性空)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원량에게 대뜸 같이 불사(佛事)를 일으키자면서

큰 시주를 부탁하였다. 원량은 자신은 논밭 한 뙈기 없이 가난하고

게다가 장님인데 어떻게 시주를 할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성공은 전날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내일 아침 길에서 만나는 장님이

큰 시주를 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원량은 잠시 생각하다

자신은 뭣 하나 가진 것 없고 딸린 것이라고 해봐야

효성 지극한 딸이 하나 있을 뿐인데 그 딸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하면

시주하겠다고 말한다. 그때 홍장은 열여섯 살이었다.

 

성공은 원량의 결정에 크게 감사해하였고 원량과 함께

그의 집으로 함께 가 홍장을 만난다. 

그 자리에서 원량은 성공에게 약속한 내용을 홍장에게 설명하는데

평생 아버지를 봉양할 생각이었던 홍장은 애통했지만, 

이윽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홍장이 성공을 따라 길을 나서자 마을 사람들도 모두 슬퍼하였다.

 

 

홍장과 성공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몇 날 며칠을 걸은 끝에

소랑포(蘇浪浦)에 도착하여 잠시 쉬고 있었다. 

그리고 곧 두 척의 붉은 배가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나

순식간에 나루터에 당도하였다. 

그 배에는 진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타고 있었는데

사신들은 홍장을 보더니 황후마마라며 절을 하는 것이었다. 

홍장과 성공이 당황해하자 사신들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였다. 

자신들은 진나라에서 왔으며 영강 정해년(267년)에 황후가 돌아가셨는데

어느 날 황제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새 황후가

이미 동국(東國, 백제)에 태어나 장성하였고 전 황후보다 나은 면도 있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꿈에서 깬 황제는 날이 밝자마자

각종 예물을 가득 챙겨 관상을 잘 보는 사람과 함께

동국으로 보내 새 황후를 맞이하라는 명을 내렸고

걱정을 안고 왔는데 홍장을 보자마자 황후 감임을 직감하게 되어

이제 마음이 놓인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홍장은 자신은 이미 부처님에게 바쳐진 몸이므로 사신들이 가지고 온

예물을 모두 성공에게 준다면 사신들을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신들이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자 성공은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라며 기뻐하면서

자신이 원량을 보살피겠다며 홍법사로 돌아갔다.

 

사신들을 따라 진나라에 가 황제를 만난 홍장은 곧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홍장은  정업(淨業)을 닦고 행하여 나라에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고국을 잊지 못하는 마음에 불상과 탑을 만들어 감로사(甘露寺), 

금강사(金剛寺), 경천사(敬天寺) 등으로 보내며 공덕을 쌓았다. 

그리고 홀로 남은 아버지와 고향을 잊지 못해 정성을 다해

자신의 원불(願佛)로 조성하던 관음상을 석선(石船)에 실어 백제로 보낸다.

 

 

그 후 옥과(玉果, 지금의 곡성군 옥과면)에 살던 성덕(聖德)이라는 처녀가

하루는 낙안포(지금의 벌교) 바닷가를 걷다 빛이 가득한 배를 발견하였는데

배 안에는 관음상이 빛나고 있었다. 성덕은 갑자기 경건한 마음이 들었고

이 관음상을 어디로든 좋은 곳에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들어보았더니 아주 가벼웠다. 성덕은 관음상을 모셔둘 곳을 찾기 위해

관음상을 업고 일단 고향인 옥과로 돌아가기로 하였는데

점점 관음상을 어디에 모실지 고민이 되었다. 

화순의 백아산(白亞山), 담양의 추월산(秋月山), 

옥과의 설산(雪山)이 후보였는데 심사숙고 끝에 백아산에 모시기로 하였다. 

그렇게 백아산을 향해 가다 하늘재(天峙)에 오르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가벼웠던 관음상이 갑자기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성덕은 이곳이 관음상을 모셔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산의 형상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에

터의 크기도 적당하여 그 자리에 관음상을 모시고 절을 지었다.

성덕은 움막을 만들어 그곳에 관음상을 두고 관음사 창건을 발원하는

기도를 매일 드렸는데 산 아래에 살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찾아와

같이 예배하며 기도를 드렸더니 모두가 성취되는 기적이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찾아왔고

후대 사람들이 성덕을 관음사의 개산조(開山祖)로 하여

그의 이름을 따 주산(主山)의 이름을 성덕산(聖德山)이라 하였다.

그 후로도 수백 년 동안 내륙의 관음영지(觀音靈地)로 소문이 나

정유재란 전까지 80여 동의 건물이 있었다.

한편 원량은 딸과의 이별에 슬픔 속에서 매일 눈물을 흘리다

어느 날 홀연히 눈을 떴고 95세까지 장수하며 편안하게 살았다고 한다.

 

관음사 사적기에 실린 이 이야기는 디테일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큰 틀에서

홍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황제의 황후가 되고

장님인 아버지가 눈을 뜬다는 내용이 심청전과

매우 유사해 어떤 관련은 분명히 있어 보인다.

 

기본적으로 관음사사적은 사찰 내에서 구비전승되던 이야기를

1729년에서야 문자로 기록한 것인데 원래도 전승은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내용이 조금씩 바뀔 가능성이 높은데다 이 책을 쓴 백매자 선사가

번잡한 것은 빼고 부족한 것은 더했다고 밝히고 있어

다시 한번 내용이 윤색됐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설화에서 진나라의 사신들은

홍장에게 영강(永康) 정해(丁亥)년에

황후가 돌아가셨다고 하였는데

영강은 서진 혜제의 네 번째 연호로서(300~301년)

이 시기에는 정해년이 없다. 또한 불상을 보냈다는

고국의 절(감로사, 금강사, 경천사)이 모두 고려시대에 창건된 절이므로

이 부분도 후대 어느 시점에서 첨가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충청도 대흥현이라는 것도 문제가 있는데 일단 관음사가

창건된 백제 당시에는 충청도나 대흥현이라는 지명 자체가 없었으며

대흥현은 고려 말에서야 생겼는데 그마저도 지금의 예산군 일대이다.

곡성과는 지리적으로도 멀고 상관관계가 없는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관음사 창건 설화로까지 옮겨온 것인지는 설명이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과거 곡성 일대의 어떤 지명의 발음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대흥'과 비슷하게 변했고 이것이 대흥으로 확립된 후,

나중에 이야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충청도 대흥현으로 설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는 곡성이나 인근 지역에 지금도

'대흥마을'이 여러 곳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이 와전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설화에 나오는 홍법사(弘法寺)라는 절인데 홍법사가

현재 몇 곳 있기는 하나 현존 홍법사 중에서는 역사가 깊은 곳이 없어서

설화 속 홍법사가 지금도 존재하거나, 또는 현존 홍법사가

설화 속 홍법사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또한 대흥현을 충청도로 해석한다 해도

충청도에는 홍법사가 없다. 관음사가 창건되던 시기에는 있었다가

현재는 사라진 절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 역시 특별한 물증은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후대에 와서 설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자료출처: 인터넷 펌)

 

@석조어람관음(魚籃觀音)

삼십삼관음의 한분이다. 이 관음의 명호(名號)를 염(念)하면

나찰, 독룡, 악귀의 해를 제거한다.

손에는 어람(魚籃)를 가지고 있어 이 이름을 얻었다.

불화에서는 물위서 큰 고기를 탄 형상을 하고 있다.

송렴(宋濂)의 어람관음상찬서(魚籃觀音像序)에

「내가 관음의 감응을 얻은 것을 상고해보니

당(唐)나라 원화12(817)년에 협우(陜右)의 금사탄(金沙灘) 위에

한 미염(美豔: 아름다움)한 여자가 람(籃: 대광주리)을 들고 고기를 팔았다.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소실(小室)을 삼으려 하니 여자가 말하기를

내가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품을 한 권씩 줄 터이니

하룻밤에 이 보문품을 외우는 사람이 있으면 남편을 섬기겠다고 하였다.

날이 밝아지자 능히 외우는 자가 20명이나 되었다.

 

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한 사람인데 여러 분을 다 섬길 수 가 없으니

바라건대 하룻밤에 사이에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외울 수 있다면

나는 그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새벽에 ‘금강경’을 외우는 자가 10명이나 되었다.

 

미녀가 또 다시 말하기를 ‘묘법연화경’을 삼일 동아 외우는 자를

나는 진정코 남편으로 받들며 살겠다 하였다.

삼일이 지나자 오직 마씨의 아들만이 외울 수 있었다.

그 미녀가 약속한 대로 예를 갖추어 성혼하여 문에 들어가자마자

그 미녀는 죽어서 그 자리에서 타버렸다.

그 시신의 재를 가져다 묻었더니

어느 날 한 스님이 찾아와서 마씨와 같이 무덤을 파보니

오직 황금 부스러기 골만 남았으므로

그 스님이 말하기를 이는 관세음보살님의 시현이고

마씨 당신을 교화제도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말을 마치자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로부터 협서(陜西)에 송경(誦經)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관음사 선원

금강문

현재 보수 중이다. 단청이 벗겨진 두 분의 금강역사가 봉안되어 있다.

입을 벌리고 있는 금강은 나라연금강(일명 아 금강)이다.

입을 다물고 있는 금강은 밀적금강(일명 홈 금강)이다.

 

금랑각(金浪閣)

수상교각(水上橋閣)이라 불리는 누각이다.

1954년 대은암을 옮겨 원통전을 지을 때 함께 지었다고 한다.

금랑각 아래에는 현재 작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종각

 

선원

다실

 

곡성 관음사 입구 풍경이다.  좌측 다리가 아닌 직진 코스로 들어 간다.

 

<관음사 현지 안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