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산문파의 중심사찰 곡성 태안사(제2부)

2023. 11. 8. 22:24국내 명산과 사찰

약사전은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봉안하고 있다.

약사여래의 협시보살로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두는데

태안사는 협시보살 없이 본존불만 모셨다.

 

 

 

염화실

선원은 옛적 미타전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적인선사탑으로 가는 길이다.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谷城 泰安寺 寂忍禪師塔)

문화재 지정: 보물 제273

조성: 통일신라시대

 

이 탑은 승려 적인선사 혜철의 승탑으로,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대안사는 신라시대 선(禪)을 가르치는 유명한 종파인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높으며,

적인선사 혜철(惠哲)은 대안사가 속한 동리산파를 연 스님이다.

 

 

이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3단의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과 상륜부가 조성되어 있다.

 

기단은 아래(하대면석), ·가운데(중대면석), 윗받침돌(상대면석)로 나뉘는데,

아래 받침돌(하대석)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 받침돌(중대면석)은

그 높이가 매우 낮고, 면마다 가늘고 길게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뒷받침들은 옆면에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몸돌(탑신석)은 낮은 편이지만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다. 그 옆면에 다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넓은 편으로 밑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추녀의 곡선은 완만하며, 각 귀퉁이는 급하게 추어올려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솟은 연꽃 모양의 장식),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 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잘 남아있다.

이러한 머리장식들은 기단과 탑신의 화려한 조각들과 어울려

탑을 전체적으로 장엄하게 보이도록 한다.

 

탑의 전체적인 형태는 무겁지만 너그러운 품위를 지녔고,

각 부분의 조각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 있어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인다.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양식상 석탑을 비롯해

돌로 만든 조형물들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경향인데,

이 탑은 매우 뛰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혜철(惠哲) 선사

시대 고대/남북국

출생 785년(원성왕 1)

사망 861년(경문왕1)

통일신라의 구산선문 중 동리산파의 개조인 승려.

 

속성은 박씨(朴氏). 자는 체공(體空), 호는 혜철(慧徹) 또는 혜철(惠哲)이다.

혜철은 법명이며, 동리화상(桐裏和尙)이라고도 한다.

시호는 적인(寂忍). 경상북도 경주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익히고 22세 때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의 생애와 활동 사항을 보면

선법이 전해지기 전인 814년(헌덕왕 6)에 당나라로 가서

남종선(南宗禪) 계통의 지장선사(地藏禪師) 문하에서 수선하였다.

 

≪경덕전등록 景德傳燈錄≫ 제9권의 기록에 의하면,

지장(地藏)의 법통을 전수받은 자 넷 가운데 셋이

신라인으로서 계림의 도의선사(道義禪師),

신라국의 홍직선사(洪直禪師)와 혜선사(慧禪師)라고 적고 있다.

 

기록의 ‘혜’자는 그의 법호인 혜철(慧徹)의 기록으로 전한다.

그의 탑비에는 그가 지장을 만나서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외국인으로 중국 땅을 멀다 않고 와서

법화(法化:진리로써 교화함)를 청하였다.

뒷날 설하는 바 없이 설하고(無說之說),

법이 없는 중에 있는 법(無法之法)이

해동에 전해지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다.”

 

그는 뜻이 굳고 품성이 영명하여

지장을 만나는 즉시 심인(心印)을 전수 받았다.

지장이 입적하자 공공산(龔公山)을 떠나

중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순례하다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자리를 잡고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 다음 839년(문성왕 1)에 귀국하였다.

 

그때 만백성과 군왕이 그의 귀국을 반기는 상황을

태안사(太安寺) 비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산중에 사람이 없더니 오늘에야 돌아오도다.

나라가 보물을 얻음이라.

불타의 지혜와 달마의 선법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귀국 후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인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태안사(太安寺:지금의 泰安寺)에

머무르면서  교화를 폈다. 이때 문성왕은 때때로 사신을 보내어

설법과 정치의 정도를 청하여 물었다.

 

861년에 입적하자 왕이 적인(寂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 명은 조륜청정(照輪淸淨)으로서 872년에 세워졌으며,

태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太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으로

보물 제273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도(門徒)로는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道詵),

여선사(如禪師)와 광자대사(廣慈大師) 등 수백 인이 있어

가풍을 크게 일으켜 선문 9산 중의 동리산문을 형성,

개창조가 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적인선사탑비

적인선사의 이 탑비는 이수부(螭首部), 비신부(碑身部),

귀부부(龜趺部)를 갖추고 있지만

비신부는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액(題額)은 전서로 <적인선사>이고

비신에는 <적인선사비탑>으로 되어 있다.

비신의 상단부 또는 이수에 비의 묘칭을 새기는데

이것을 제액(題額)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제액은 전서체로 쓰는데

이것을 전액(篆額) 또는 두전(頭篆)이라고 한다.

비문은 최근에 복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비문을 보면, 적인선사는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하였다.

따라서, 이 탑도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범종각

연못을 조성하여 중앙에 삼층석탑을 조성해 놓았다.

 

 

 

 

 

 

 

삼층석탑

연못 가운데 조성된 삼층석탑은 창건 시 조성되었던 탑이 무너지고

또 일부 부재가 분실되었던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탑으로 가는 다리에 <사리탑교>라는 다리 명을 새긴 것으로 보아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모양이다.

탑의 기단부 상대면석을 보면 중앙에 탱주를 조성하고 있고

또 상륜부(지붕돌)의 조각 양식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 층 석탑은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곡성 태안사 동종 (谷城 泰安寺 銅鍾)

문화재 지정: 보물 제1349

조성: 조선시대 선조 14년(1581)

 

태안사에 소장된 조선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종이다.

 

 

맨 위에는 대롱 형태로 솟은 음통과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두 다리로 천판을 누르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그리고 어깨 위(견대)를 돌아가며 입화장식과 그 아래로 연꽃무늬가 돌려 있고,

그 밑에 넓은 띠에는 방형 속에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작은 원 속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넓은 몸체에는 네 군데에 사각형의 연곽이 있는데

그 주위는 당초문으로 장식하고 그 안에 9개의 연회를

나지막하게 돌출 표현하였다. 몸체의 하대는 종구에서

조금 올라와 배치되었는데,

상대와 마찬가지로 연꽃무늬와 당초문을 새겨 넣었다.

 

종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조선 세조 3년(1457)에 이 종을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되어 선조 14년(1581)에 다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대형의 왕실 발원의 범종에서

사찰 중심의 범종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작품으로,

전통 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작과 관련된 명문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주조 기술도 비교적 우수한 16세기 사찰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사진및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곡성 태안사 청동 대바라 (谷城 泰安寺 靑銅 大鈸鑼)

문화재 지정: 보물 제956

조성: 조선시대

바라란 절에서 종교적으로 사용되거나 춤을 출 때 사용하는 타악기이다.

 

냄비 뚜껑같이 생긴 두 개의 얇고 둥근 놋쇠 판으로 만들며,

놋쇠 판 중앙의 볼록하게 솟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꿰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혀서 소리를 낸다.

 

이 바라는 지름 92㎝로 크기가 크며, 제작 방법이 우수하다.

국내에서 제일 큰 바라로 외곽의 일부가 약간의 파손이 있을 뿐

손상이 거의 없이 내려왔다.

이 바라에는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의 복(福)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명문이 남아있다.

크기로 보아 직접 들고 치기보다는 어느 곳에 매달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자료출처: 사진은 문화재청,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