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무등산 증심사

2023. 11. 2. 16:16국내 명산과 사찰

 

무등산의 대표적 천년고찰로는

원효사(元曉寺)와 더불어 증심사(證心寺)를 꼽는다.

증심사는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원효사와 같이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 소속이다.

 

증심사의 역사적 변천을 보면

860년(헌안왕 4)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였고,

1094년(선종 11)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하였으며,

1443년(세종 25)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이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하였다.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은 798(원성왕 14)에 태어나

868년(경문왕 8))에 입적한 신라의 승(僧)으로

호는 쌍봉(雙峯), 속성은 박(朴)이며 한산주(漢山州) 장구군(獐口郡) 출신이다.

그의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이며 탑호는 징소(澄昭)다.

그의 탑(국보 제57호)과 탑비(보물 제170호)는 화순 쌍봉사에 조성되어 있다.

18세에 출가하여 귀산사에서 화엄경을 연구하였으며,

825년(원 덕 왕 17) 당에 가서 마조도일 문하의

보원(普願)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하여

전남 능주(綾州, 현재의 화순군)의 쌍봉사로 가서 크게 선법을 펼치고

그의 제자 절중(折中)에게 전하니

절중은 그의 선풍을 이어받아 영월 법흥사에서

사자산파(獅子山派) 창건하여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가 되었다.

@혜조국사(慧照國師)는 고려 전기 문종·예종 때 활동했던 선종 승려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9년(광해군 1)

석경(釋經) · 수장(修裝) · 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중창하였고,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임제종(臨濟宗) 운동의 본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중수를 거듭하다가 1951년 4월

50여 명의 무장 공비들에 의하여 건물 대부분이 불타 버렸으며,

1971년에 크게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89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오백전(五百殿)과 대웅전 ·

지장전(地藏殿) · 비로전(毘盧殿) · 적묵당(寂默堂) · 종각 ·

일주문 ·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오백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오백전은 대웅전 뒤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강진 무위사(無爲寺)의 극락전과 같은

계통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법당 안의 오백 나한상은

1443년의 중창 때 김방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 오는데,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불상이다.

 

오백전 옆에는 높이 205㎝의 석불 1구가 있는데,

고려시대(10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보살입상으로

1989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14호)로 지정되었다.

 

비로전 안에 안치된 높이 90㎝ 정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1963년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이 철불은 본래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에 옮겨온 것이다.

 

이 밖에도 문화재로는 증심사 창건 때 만들었다는

1972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삼층석탑,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1933년의 보수 때

탑내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 입상 등이 나왔던 오층석탑,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칠층석탑 등이 있다.

특히,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이 절 입구의 왼쪽 산록에는 약 3만 평의 차밭이 있다.

이 차밭은 원래 증심사에서 공양을 위하여 가꾸어왔던 것이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경영하였고

광복 후에는 허백련(許百鍊)이 인수하여 고유의 차를 재배하였다.

1984년 절 주변이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증심교를 지나면 두 번째 다리인 의제교(毅齊橋)는

허백련(許百鍊, 1891~1977) 화가의 호를 딴 것이다.

 

 

의제교를 지나 조금 오르면 증심사와 약사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일주문과 부도

증심사의 일주문은 <무등산 증심사>라 편액이 걸려 있다.

무등산(無等山)은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무등(無等)이란 부처님의 칭호를 말한다.

다른 중생에 비유하여 서로 비등(比等)할 수 없기에 무등(無等)이라 한 것이다.

<지도론 2>에 「아바마(阿婆磨)라고 했다.

진(秦)나라 말로 무등이라 한다.」라고 했고

<대일경소 3>에는 「여래의 지혜는 일체중생에는 비유할 바가 아니고

위가 없으므로 무등이라 한다」라고 했다.

무등산은 통일신라 때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으로 표기하다가

고려 때 서석산(瑞石山)이란 별칭과 함께 무등산이라 불렸다.

이 밖에도 무당산·무덤산·무정산 등 여러 산 이름을 갖고 있다.

 

 

 

천왕문

창건이 신라시대이기 때문에 천왕문의 사천왕의 지물도 그에 맞춘 것이다.

사천왕의 지물은 조성 시기가 신라시대와 조선시대에 따라 달리하는데

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시대 신라 조선
북방 다문천왕 탑/창 비파
동방 지국천왕 비파
서방 광목천왕 용/여의주 탑/창
남방 증장천왕 용/여의주

 

증심사의 본사인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조선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증심사의 사천왕은 신라시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서방 광목천왕은 용과 여의주가 아닌 검을 들고 있고,

남방 증장천왕은 검(劍)과 창을 들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이 검을 들고 있는 경우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보림사 사천왕상에서 볼 수 있다.

 

 

 

 

 

 

증심사 경내도

 

취백루(翠栢樓)

취백루(翠栢樓)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2층 팔작지붕 누각으로

하층에는 종무소와 큰방을 시설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상층은 하나의 공간으로 터서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건립되었으나 6·25 때 소실된 것을

1970년대 이후에 신축한 것이다.

원래 취백루는 정유재란으로 증심사가 불타버린 뒤

1609년(광해군 1년)에 석경(釋經)ㆍ수장(修裝)ㆍ도광(道光) 등

세 스님이 증심사를 4창 하면서 세운 정문 누각이라 한다.

당시에는 아래층에 사천왕을 봉안하고 대웅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경내로 들어갈 수 있게 된 2층 건물로, 마루가 깔린 2층에는

법고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취백루라는 누각의 명칭은

‘취백홍도(翠栢紅桃)’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시구에서 취해진 것이라 전하고 있다.

취백루가 처음 건립된 시기는 1574년(선조 7)에 쓴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취백루에 올라 휴식을 취했다”라는

기록이 보여, 증심사가 4창 되던 1609년 이전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행원당

 

적묵당

 

범종각

 

늦각이 상사화가 곱게 반겨준다.

 

 

 

대웅전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6·25 때 불탄 것을 1971년에 중건하였다.

2단의 높은 축대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배흘림의 원형 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중앙 칸이 좌우 협칸이나 퇴칸보다 2배 정도 크며,

어칸은 솟을빗살창이 달린 4 분합문이다.

협칸과 퇴칸은 2 분합문에 나뭇잎 모양의 빗살문이고,

아래의 부분은 청판을 대고 당초문을 그렸다.

수미단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봉안되어 있다.

협시로만 보면 본존불은 아미타불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초기 신라의 불상은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을 동일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은 양평 용문사의 대웅전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창건이 신라시대에 조성된 고찰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신중탱

지장탱

 

지장전

지장전은 대웅전 왼쪽에 위치하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있다.

정면 왼쪽에는 회심당, 중앙에는 지장전의 편액이 걸려 있다.

지장전 건물은 원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5칸에는 칸마다 2 분합문인 2짝의 여닫이 덧문이 각각 달려있다.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판관, 녹사, 동자 등 명부중의 상과,

지장탱 및 4폭의 시왕탱화를 봉안하였고

측면에는 여러 가지 형벌도가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5층석탑과 칠층석탑

5층 석탑은 이중기단에 5층으로 된 석탑으로

옥신에 퇴화된 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전체적으로 3층 석탑을 따르고 있지만

기법 등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 석탑은 대웅전의 북쪽 공터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1933년 이 탑을 해체, 복원할 때

탑 내에서 금동불상 2구와 오층철탑(높이 19cm),

소형 철불 2구, 수정 1점, 청옥(靑玉) 23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금동석가여래입상(높이 15.9cm)은

국보 제211호로, 금동보살입상(높이 18.2cm)은

국보 제212호로 각각 지정되었으나 6.25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오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는 칠층석탑은 탑신에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범자가 새겨져 있어

범 자 7층 석탑(梵字七層石塔)이라고도 한다.

 

 

오백전(五百殿)

광주 증심사 오백전(光州 證心寺 五百殿)은

조선시대의 불교 건축물로 1989년 3월 20일

광주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오백전은 대웅전의 뒤편에 세워진 법당으로,

현재 무등산에 남아 있는 절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오백나한과 10대 제자상을 모시고 있으며

이 고장 사람들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런 형식의 건물은 국보 제13호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오백전이 지어진 절은 전남지방에서는

증심사가 유일한 것이어서 더욱 귀중하다.

 

 

 

현지 안내문

「증심사오백전(證心寺五百殿)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

오백전은 오백나한과 십대제자를 모신 법당이다. 오백나한은 가장 높은 깨달음을 얻은 오백 명의 성자이며, 십대제자는 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열 명의 제자를 말한다. 증심사는 9세기 중엽에 철감선사가 세운 후 고려시대에 수리하였으며, 조선 세종 25년인 1443년에 세 번째로 다시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에 탔다. 조선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석경, 수장, 도광선사가 증심사를 다시 지으면서 오백전을 함께 세웠다. 오백전은 앞면이 3칸, 옆면이 3칸이며, 옆에서 볼 때 ‘ㅅ’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전통 건축에서는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포라고 하는 짜임새를 얹는데, 오백전은 지붕과 처마를 받친 기둥 위에만 간결하게 장식을 얹은 주심포 양식으로 지었다. 조선시대에 광주, 전남 지역에 세워진 절 가운데 오백전을 지은 곳은 증심사뿐이다.」

 

산신각

 

비로전

삼층석탑 뒤 좌측건물이 비로전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주포식 맞배지붕의 건물로

법당 안에는 보물 제131호로 지정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철조비로자나불

명칭: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光州 證心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문화재 지정: 보물 제131호

조성: 통일신라 후기 9세기

 

화엄의 본존불이면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증심사로 옮겨 온 것이다.

현재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 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높고 뚜렷하다.

눈·코·입 등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어서 온화하고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전체적으로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어서

굴곡이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무릎 너비와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어서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있으며

양팔에 걸쳐진 두꺼운 옷자락은

규칙적인 평행의 옷 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형태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형식과는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光州 證心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은

조각 수법에서 볼 때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통일된 균형미를 보이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며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설명)

 

 

 

 3층 석탑

3층 석탑(三層石塔)은 통일신라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증심사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71년에 해체, 복원하였으며, 전체 높이는 340cm로 비교적 작은 편으로,

현재 광주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백전 앞 축대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초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

각 부재가 완전한 형태의 3층 석탑이다.

높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탑신의 체감비율이 뚜렷하여 매우 안정감 있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하층 기단 중석의 네 모서리에 귀기둥을 표시하고,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인 중앙에 탱주를 조성했다.

 

 

 

 

원통전

원통전(圓通殿)은 정면과 측면 각 3칸 규모의 주심포 정자형 건물로

 2003년 9월에 착공하여 11월에 상량하였다. 

오백전 옆에 범자칠층석탑과 함께 서 있던

석조보살입상(광주 유형문화재 제14호)이

세월의 풍화에 훼손되어 이를 보존하기 위한 전각으로 신축한 것이다

 

 

@석조보살입상

명칭: 증심사석조보살입상

문화재 지정: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크기: 보살상 높이 2.05㎝, 대좌 높이 55㎝

재질: 화강암

제작시기 : 고려시대 전기(10세기)

 

석조보살입상은 원래 오백전 우측 범자7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었으나,

원통전을 보호각으로 건립하면서 옮겨 봉안하고 있다.

이 석조보살입상의 원래 위치에 대해 여러 의견이 많으나

서봉사지(瑞峰寺址)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1966년 간행한 『광주시사』에도

담양군 남면 정곡리 서봉사 터에 있던 것을 현

준호가 사재를 들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기록하였다.

전체 높이는 205cm로 연화대좌는 원형이며

상, 중, 하대석과 지대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상대석의 앙련좌는 11엽의 단판 연화문과

2엽의 큼직한 연화당초문이 혼합 조각되어 있으며,

하대석의 앙련좌는 두툼한 16엽의 복판연화문을 돌렸다.

지대석 역시 원형으로 측면을 분할하여 연화문을 만들었으나

분할을 잘못하여 9엽이 되어 있다

 

#원형의 앙련대좌(仰蓮臺座)는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 및 지대석을 모두 갖추었다.

상대석의 연화좌는 11엽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과

2엽의 큼직한 연화당초문이 혼합되어 조각되어 있다.

하대석의 복련좌(伏蓮座)는 두툼한 16엽의 복판연화문(復瓣蓮花文)을 돌렸다.

 

 대좌 위의 보살입상을 보면 머리에는 높은 원통형보관을 썼고,

타원형의 갸름한 얼굴에는 우아한 기품이 보이며

선각된 삼도아래 목걸이가 조식(彫飾)되어 있다.

 

납의(衲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며,

몸 전체에 조식된 의문(衣文)은 깊지는 않으나 매우 유려하다.

수인은 왼손을 펴서 왼쪽 가슴 위에 올려놓았고,

바른손은 편채로 내려뜨려 바른쪽 대퇴부 바깥쪽에 붙이고 있다.

이 보살상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높은 보관을 쓴 석조보살상으로는

고려초기 조성된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과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 등에서 볼 수 있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보물 제139호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국보 제124호

 

적묵당

행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