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산문파의 중심사찰 곡성 태안사 (제1부)

2023. 11. 8. 21:22국내 명산과 사찰

곡성 태안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동리산문의 중심 사찰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안사 입구에 들어서면 태안사의 일주문이 아닌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산문이 먼저 보인다.

9산선문은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형성된 선종의 아홉 파(派)를 말한다.

한반도에 선(禪)이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헌덕왕(809~826) 이후이다.

받고, 각각 821년과 826년에 귀국한 이후부터

신라에서 선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후 당에서

조사선을 전해 받은 유학승들이 계속 귀국하면서

9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했다. 그 9산선문(九山禪門) 중

곡성 태안사는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중심 사찰이기 때문에

동리 산기슭의 태안사 일주문보다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구산산문,, 개창자와 중심 사찰

 

1. 가지산문(迦智山門) ― 도의(道義) ― 장흥 보림사

2. 실상산문(實相山門) ― 홍척(洪陟) ― 남원 실상사

3. 동리산문(桐裏山門) ― 혜철(慧徹) ― 곡성 태안사

4. 봉림산문(鳳林山門) ― 현욱(玄昱) ― 창원 봉림사

5. 사자산문(獅子山門) ― 도윤(道允) ― 영월 법흥사

6. 성주산문(聖住山門) ― 낭혜(朗慧) ― 보령 성주사

7. 사굴산문(闍崛山門) ― 범일(梵日) ― 강릉 굴산사

8. 희양산문(曦陽山門) ― 도헌(道憲) ― 문경 봉암사

9. 수미산문(須彌山門) ― 이엄(利嚴) ― 해주 광조사

 

<동리산문의 역사와 태안사>

동리산문(桐裡山門)은 827년(흥덕왕 2)에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徹, 785~861)이 동리산의 태안사(泰安寺)에서

선법을 널리 전하면서 산문으로 형성되었다.

혜철은 출가한 후에 부석사에서 처음 화엄을 공부하였으나,

814년(헌덕왕 6)에 선을 배우기 위해 당에 건너갔다. 그는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잇고, 839년(신무왕 원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무주 쌍봉사에서 활동하다가 태안사로 옮겨 머물렀다.

이러한 혜철의 행적은 당시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세력으로 존재하였던 장보고가 841년(문성왕 3)에

자객인 염장에게 죽으면서 장보고 추종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당시 어지러운 사회적 상황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혜철은 문성왕의 귀의를 받았으며,

왕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에 대한 물음을 받고

봉사(封事) 몇 조항을 올렸다.

혜철은 861년(경문왕 원년)에 입적하기 전까지

왕실의 자문에 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00여 명이 넘는 문하의 제자 가운데 여선사(如禪師)가

혜철의 선풍을 계승하였고,

이어 광자 윤다(廣慈允多, 864~945)가 출현하여

신라 효공왕과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산문이 더욱 확산되었다.

 

『태안사지(泰安寺誌)』에는 광자대사

당시 태안사의 경제 상황을 기록한 자료가 남아있다.

이 자료에 제시된 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당시 태안사는 3천 석에 가까운 곡식과 500결에 달하는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사원전이 전남의 보성, 승주, 나주,

영광과 경남의 진주, 합천에 이르기까지 8곳에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태안사의 경제 규모와 함께

동리산문이 독자적인 산문으로 자리 잡았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혜철의 문하에는 도선(道詵)을 중심으로 한

계열이 전라남도 광양의 옥룡사를 중심으로 존재하였다.

도선의 문하에는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 868~948)가

대표적인 선승으로 활약하였다. 경보는 892년(진성여왕 6)에

당에 들어가 소산 광인(疎山匡仁)의 법을 잇고,

921년(경명왕 5)에 견훤의 도움을 받아 귀국하여

전주 남복선원에 머물렀다. 이후 경보는 옥룡사로 옮겼으며,

고려 태조, 혜종, 정종의 귀의를 받았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안사 능파각(凌波閣)

 능파각(谷城 泰安寺 凌波閣)은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 건물이다.

1981년 10월 20일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었다.

 

 

능파(凌波)란 이름은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한다.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 광자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년(1767)에 다시 지었다.

 

 

다리를 건너는 쪽에서 보았을 때 앞면 1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이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배치하는 주심포 양식이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기둥을 사용하였다.

여러 가지 동물상을 조각한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다리와 문·누각의 역할을 함께 하도록 지은 특이한 건물이다.

 

능파각을 지나 조금 오르면 충의문과 경찰충혼탑이 나온다

 

 

 

충의문을 지나 오르면 태안사 경내로 진입한다.

곡성 동리산 태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며,

창건 당시는 대안사(大安寺)라 불리던 것을

조선 후기에 태안사(泰安寺)라 개명되었다.

<동리산 태안사사적(桐裏山 泰安寺史蹟)>에 의하면

742년(경덕왕 1)에 3명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문성왕 9년(847)에 제1대 조사인 혜철국사에 의해

선종 사찰로 개산되어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형성하였고,

제2대 도선국사를 거쳐 고려 태조 때 제3대 조사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가 중창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

당시 광자대사가 머물 때 가람은 40여 동에 110칸에 이르며

법당에는 높이 1.4m의 철조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있었다고 하며,

고려 초에는 송광사·화엄사 등 전라남도 대부분의 사찰이

이 절의 말사였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수선(修禪)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사세가 축소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당(願堂)이 되어 조정의 지원을 받았다.

1683년(숙종 9) 정심(定心)이 중창하였다.

1737년(영조 13)에 능파각(凌波閣)을 지었는데

능파각은 그 뒤에도 1776년·1809년·1861년·1923년에 각각 중수한 바 있다.

6·25전쟁 때 일주문, 능파각, 보제루, 해회당, 미타전(현 선원)을 제외한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 건물이 불타버렸으며,

근래에 들어와 중창 불사가 있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만세루(萬歲樓),

해회당(海會堂), 선원(禪院), 능파각(凌波閣), 일주문 등이 있다.

이 중 해회당은 네모꼴로 이어진 큰 건물이고,

선원 역시 전국 굴지의 규모이며, 대웅전은 6·25전쟁 때 불탄 것을

곡성군의 보조로 1969년에 재건하였다.

 

또, 능파각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있고,

일주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혜철의 부도인 보물 제273호의

적인선사 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

윤다의 부도인 보물 제274호의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보물 제275호인 광자대사비, 보물 제956호인 대바라,

보물 제1349호 동종 등이 있다.

 

이 중 바라는 승무를 출 때 사용한 것으로,

조선 태종 때 효령대군이 발원하여 만들었으며,

둘레 3m로서 우리나라 최대의 것이다.

동종은 1465년(세조 11)에서 1475년(성종 6)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공예 수법이 뛰어나다.

 

이 절은 1925년 최남선(崔南善)이 찾아와

“신라 이래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서

선종(禪宗)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라고 극찬한 곳이다.

 

 

태안사 일주문:

태안사 일주문은 특이하게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태안사의 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정면 1칸의 다포식(多包式) 맞배지붕 건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능파각에서 약 200m쯤 지나 높직한 돌계단에 올라서 있다.

초석은 덤벙 주초(초석을 덤벙덤벙 놓았다는 뜻)이며,

굵은 민흘림의 기둥에 양편 모두 전후에 보조 기둥을 세웠다.

 

전면에는 두 줄의 횡서로 ‘桐裏山泰安寺(동리산태안사)’라는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일주문은 숙종 9년(1683) 학현대사(學玄大師)가 중건하고,

1917년 영월대사가 보수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태안사지≫에 이에 대한 기록이 없어 더 이상 알 길이 없었는데

2017년 일주문 보수공사에서 확인된 상량문을 통해

1521년(중종 16년)에 ‘조계문(曹溪門)’으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량문에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수결(手決, 서명) 흔적이 남아있다. 태안사는 6‧25전쟁 당시

거의 소실되었으나 일주문은 능파각(凌波閣)과

더불어 남아있는 건물 중 하나이다.

일주문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桐裏山泰安寺)’,

뒷면에는 ‘봉황문(鳳凰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곡성 태안사 일주문」은 정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의 평방에 5개 공포, 전체 12개 공포를 올린

다포식 공포 구조로 겹처마 지붕이다.

주 기둥의 양쪽과 앞뒤로 창방(기둥머리에 가로로 맞추는 목재)

모서리 네 곳에 보조 기둥을 세웠다. 주 기둥 상부에는 내부에

용두(龍頭)를 설치하였고 용두는 두 뿔, 큰 눈, 눈썹, 크게 벌린 입과

이빨, 머리 뒷부분의 갈기 등이 화려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태안사 일주문은 상량문을 통해 조선 전기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기법을 잘 보여주는 공포의 형식과 짜임으로 보아

창건 이후 보수되면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

 

 

 

 

 

 

승탑군(부도군).

태안사에 머물렀던 많은 이름 모를 고승들의 승탑(부도)이 모여있다.

그중에 보불로 지정된 광자대사탑과 탑비가 있다.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 (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

문화재 지정: 보물 제274호

조성: 고려시대

 

태안사 입구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광자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광자대사는 대안사의 2대 조사(祖師)로,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혜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다.

자는 법신(法身)이고 법명은 윤다(允多)이다.

 

 

 

 

 

 

 

탑의 형태는 기단부(바닥돌)부터 상륜부(꼭대기)까지

8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모습이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 받침돌 위에 유난히 낮은 가운데

받침이 올려져 있다. 뒷받침에는 16잎씩의 연꽃을 두 줄로 조각하여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탐몸(탑신)돌은 앞뒷면

모두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모양을 새겨두었고,

그 옆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높은 편이나 추녀에 이르러 얇아지고 있어

중후한 감을 덜어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흔하지 않게

머리 장식 부분이 완전하게 남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완벽한 형태미를 보여주며, 각 부의 구성과 조각 수법이 정교하고 조화롭다.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碑)

문화재 지정: 보물 제275호

조성: 고려시대

 

대안사에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대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다.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가 되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비(碑)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있으며,

거북받침 위에 머릿돌만 얹혀 있는 상태이다.

제액은  비신과 마모되어 있고 거북은 목이 짧아 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등 위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는데,

옆면에 보이는 무늬가 어떤 것을 표현한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머릿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 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 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승탑(東僧塔:보물 제153호)과

북승탑(北僧塔: 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비몸돌(비신)의 파손으로 비문은 거의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그 전문이 실려있어,

광자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공양왕의 옆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곳곳의 여러 조각들을 통해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려 했던

참신한 의도가 엿보이는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5년 후인 광종 1년(950)에 세운 작품이다.

 

@광자대사(廣慈大師)윤다(允多)

시대: 고려

출생: 864년(경문왕 4)

사망: 945년(혜종 2)

 

 

선승(禪僧). 자는 법신(法信). 광자(廣慈)는 시호다.

경상북도 경주 출신.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제3조이다. 8세에 집을 떠나

사방으로 다니다가 총림(叢林)인 동리산에서 선(禪)을 수행하였다.

이때 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惠哲)은 그에게

“도는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 부처는 곧 마음에 있는 것이니,

오랫동안 익히면 찰나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라고 가르쳤다.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 일심으로 참구하여 묘지(妙旨)를 깨닫고

현기(玄機)를 통달하였다.

이때부터 현풍(玄風)을 크게 떨쳤는데,

신라의 효공왕은 조서를 보냈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대궐로 청하였다.

그가 도착하자 왕은 기뻐하면서 의빈사(義賓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때 임금에게 국가의 행복이 무엇이고

백성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 뒤 왕은 흥왕사(興王寺)황주원(黃州院)에 머무르게 하고

극진히 보살폈으나,

곧 왕의 허락을 얻어 동리산으로 되돌아갔다.

 

945년에 제자들을 불러,

“생은 유한하고 멸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지금 가고자 하니

너희들은 정중히 받아들여라. 부처님이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가

너의 큰 스승이라 하셨는데, 나 또한 이 말을 너희에게 부축하노니

너희들이 잘 받들어 행한다면 나는 죽지 않은 것이 되리라.”

한 다음, 입적하였다.

 

그는 당나라 지장(智藏)의 법을 이어받은 동리산파 개산조 혜철로부터

여선사(如禪師)에게 전해진 법맥을 이어받았다.

선승이면서도 임종 때까지 계율로써 스승을 삼으라고 당부할 만큼

율법을 중시하였고, 왕의 빈례를 받으면서도

선승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시호는 광자대사(廣慈大師)이다.

 

#계본patimokkha , 戒本 , <산>prātimoksa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는 불교사원의 규범으로서

비구와 비구니의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227개의 규율서다.

중국에서 번역된 〈사분율 四分律〉·〈오분율 五分律〉·

〈십송률 十誦律〉 등은 이 전통을 따른 문헌이다.

 

정면 편액은 보제루이고 안에는 만세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대웅전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전각이지만

태안사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봉안했다.

 

 

 

신중탱

지장탱

삼성각

칠성과 산신 그리고 독성을 봉안하고 있다.

 

~동리산 문파의 중심사찰 곡성 태안사 제2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