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무등산 약사사(藥師寺)

2023. 10. 26. 20:06국내 명산과 사찰

 

 

무등산의 유명 사찰로는 원효사, 규봉암, 증심사 그리고 약사사를 꼽는다.

무등산 약사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本寺)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末寺)이며,

절 일원이 1984년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사사 가는 길은 무등산 증심사 일주문에서 200m 정도 내려오면

갈림길에 새인봉과 약사사(藥師寺)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증심사는 무등산 중머리재로,

약사사는 무등산 새인봉으로 가는 산행 들머리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정표에 의하면 약사사까지 800m 이지만

오르는 길이 언덕길이라 다소 경사가 있다.

길 아래쪽은 계곡이다.

이 절은 850년경 신라 문성왕(文聖王: 839~857) 때의 고승인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여 인왕사(仁王寺)라고 하였고,

고려 예종 때 혜조국사(慧照國師)가 다시 지었고,

1360년(고려 공민왕9)에 세 번째 지었을 때

약사암(藥師庵)으로 개칭하였다고 하였다.

그후 조선 철종 때에는

관찰사 주석면(朱錫勉)의 도움을 얻어서 중창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燒失)되고

지금의 일주문과 전각 및 요사채는

1974년 불사를 시작하여 1984년에 완공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정표와 일주문은 <무등산 약사사>로 되어 있지만

현지 사찰 안내서와 범종에는 약사암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나의 절이 2개의 이름으로 회자 되고 있어

일반인들은 마치 약사암은 약사사의 암자로 착오를 일어킬수 있다.

아마도 약사암이라고 하면 증심사의 산내 암자로 간주 되기 때문에

1980년 개축할 때 일주문의 편액을 증심사와 같은 격으로

사찰명을 약사사(藥師寺)로 개명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사찰안내서>에 의하면

「약사암은 850년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이 처음 지어

인왕사(人王寺)라 불렀다고 한다.

1094년(고려 선종11) 혜조국사(慧照國師)가 다시 지었고,

1360년(고려 공민왕9) 세 번째 지었을 때 약사암(藥師庵)이라 고처 불렀다.

1856년(철종 7) 관찰사(觀察使) 주석면(朱錫冕)의 협조로

성암, 학산 두 스님에 의하여 다시 지었는데

이는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

대웅전과 요사(寮舍) 5동 그리고 일주문 등은

1974년 착수 1984네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 798년 ~ 868년)은 신라의 승려로

성은 박(朴)이며 호는 쌍봉(雙峰)이며,

한산주(漢山州) 장구군(獐口郡) 출신이다.

철감선사(澈鑒禪師)는 도윤의 시호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이다.

철감선사 도윤은 825년 당나라에 가서

도일(道一)의 제자 보원(普願) 대사의 가르침을 받은 후,

847년(문성왕 9) 범일(梵日)과 함께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무르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그후 영월 법흥사에 구산선문의 사자산문(獅子山門)을 연 개조(開祖)가 되었으며,

그의 탑(국보 제57호)과 탑비(보물 제170호)는 화순 쌍봉사에 조성되어 있다.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는 강릉 굴산사에서

사굴산문(闍崛山門)을 연 개조(開祖)로 알려져 있다.

혜조국사(慧照國師)는 고려전기 문종·예종 때 활동했던 선종 승려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무등산 약사사의 전각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나한전, 미타전, 운림선원, 운림당이 있다.

운림당은 미타전과 같은 건물로 종무소를 겸하고 있고,

운림선원과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00호)과

대웅전 앞에는 복원된 9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3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 뒤 대웅전이 있고 좌측에 운림선원

 

 

운림선원

우측에 운림당과 미타전이 조성되어 있다.

운림당은 종무소를 겸하고 있다.

 

 

삼층석탑

9세기 경 작품으로 추정되나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기단부의 상대석, 1층 탑신석과

1~3 층의 옥개석만 남은 것을 모아 복원한 것이다.

상륜부는 파손 마모된 보주를 노반을 새로 조성하여 그대로 올려 놓았다.

 

 

 

 

대웅전

대웅전은 석가여래를 모신 약사사의 중심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 양식이다.

법당은 닫집 내원궁의 편액이 조성되어 있고 석조여래좌상이 조성되어 있다.

(지장탱)

(신중탱)

좌우의 조성된 지장탱과 신중탱은 2011년에 조성된 것이다.

@명 칭: 광주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光州 藥師庵 石造如來坐像)

문화재 지정: 보물 제600호

크기:  불상 높이 2.5m

조성:  통일신라시대

 

이 불상은 대웅전에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으며 광배는 없어졌지만,

대좌는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보존 상태까지 양호하다.

거친 화강암 석재를 다듬어서 만들었으며,

질병에 빠진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광배는 불상 뒤 2001년 조성된 탱화로 대신하고 있다.

 

나발의 머리 위에는 나지막한 육계가 있고 정제된 상호는 원만하다.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였으며 비교적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가늘고 긴 눈의 눈두덩이는 불룩하고, 코는 낮고 넓적하며,

미소 띤 입매 등 전체적으로 자비로운 모습이다.

체구는 당당한 편인데 발달된 가슴,

남성적인 어깨와 팔다리에 비해 허리는 너무 가늘어 어색하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의 옷 주름은 계단식이며

가슴 옷깃의 반전 표현은 9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왼손은 결가부좌한 발 위에 놓고

오른손은 무릎에서 아래로 내리고 있는데

어깨에 비해 왼손과 팔목은 빈약한 데 오른손은 크게 부각 되었다.

 

대좌는 하나의 돌에 상대, 중대, 하대가 조성되어 있다.

당시에 가장 유행했던 8각 연화대좌로

상대석에는 장식적인 8잎의 단판앙련을 조각했고,

8각의 중대석 각 모서리에는 귀기둥을 표시했으며,

하대석에는 복련(覆蓮)과 안상(眼象)을 새겼다.

불신(佛身)이 앉은 좌대의 뒤쪽이 공간이 여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성 당시에는 아마도 광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남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통일신라시대 석불로

건장한 가슴과 가는 허리 등은 경주 석굴암의 이상적인 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나

유난히 긴 눈이나 짧은 코, 융기된 짧은 인중 등에서는

후대의 수법을 볼 수 있다. 불안정한 자세의 비례감각,

각 부분의 세부 기법과 하대가 높아지는 8각 대좌로 보아

제작연대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위쪽에 나한전이 있다.

나한전

나한전은 1974년 중창하여 운림당으로 이용하다가

2010년 나한전으로 개칭하였다.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좌협시로 미륵보살을,

우협시로 제화갈라보살을 두고 있고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상을 배치하고

그 뒤로 오백나한상을 조성해 놓았다.

가섭존자와 나한상

 

아난과 나한상

 

좌측 건물은 운림당으로 건물 우측에 미타전의 편액을 달아 놓았다.

 

미타전

중앙에 아미타불 좌측에 관음보살을 우측에 애기부처가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