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문수산 문수사

2023. 10. 9. 14:51국내 명산과 사찰

 

 

고창 두암초당으로 가는

땅속에서 발굴된 문수보살 석상(石象)이 있다는

고창 문수사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으로 주소만 찍고

사찰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갔더니 일주문까지 가는데

주차장이 네다섯 군데나 있어서

이렇게 유명한 사찰인가 의아했는데

길옆에 세워 놓은 안내판을 보고 궁금증이 풀렸다.

이곳 고창은 문수사 일주문에서부터 문수산 중턱까지

단풍나무 천연기념물로 제463호로 지정된

단풍군락지로 단풍철에는 관광객이 몰려들기 때문에

많은 주차장을 조성한 모양이다.

 

단풍 하면 내장산 단풍이 최고인 줄만 알았는데

고창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아직은 단풍철이 아니라서 그런지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단풍나무는 아름드리 고목을 비롯하여

수백 년 된 단풍나무가 즐비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일주문에 다다르니 <청량산 문수사>란 편액과 함께

<호남제일문수도량>이란 석비가 세워져 있다.

중국 오대산의 청량산은 문수보살의 성지다.

그래서 중국 청량산에 유래하여

고창에서는 문수보살을 상징으로

산이름도 문수산이라 칭하는 모양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아름드리 노거수와

단풍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묵암대선사(默庵大禪師) 공덕비

일주문을 조금 지나니 길옆 낮은 언덕에

공덕비 하나가 세워져 있다.

비를 보니 <묵암대선사공덕비>로 되어 있다.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1823년(순조 23)의 1차 중수 이후

1876년 고창현감 김성로(金星老)의 시주로

중수한 분이 묵암(默庵) 대사라고 한다.

 

@묵암(默庵) 선사 최눌(最訥) (1717~1790)은

조선 후기 승려로 호(號) 묵암(默庵), 자(字)는 이식(耳食),

속성은 朴 氏, 본관(本貫) 밀양 함흥(密陽 興陽)이다.

지금의 고흥인 홍양현 장사촌에서 태어난 묵암 최눌 선사는

정조 14년(1790) 조계산 보조암에서 좌탈입망하였는데

세수 73세 법랍 54세였다고 전한다.

 

@선사는 지금의 고향인 고흥 홍양현 장사촌에서 태어나

14세에 증광사로 출가한 후 여러 선지식을 거처

영해(領海) 선사로부터 격외(格外)의 선지를 깨우치고

그 후 2년째인 정월에 일찍 핀 매화를 보고

확연대오 하고 이런 시를 남겼다.

 

오도화(悟道花)

 

盡道明星夜夜廻(진도명성야야회)

當寒須信雪中梅(당한수신설중매)

塵沙久却云成佛(진사구겁운성불)

何用如今正覺來(하용여금정각래)

 

밝은 별이 밤마다 돌아온다고 모두를 말하는데,

추위를 당해 비로소 눈 속의 매화를 볼 수 있네.

진사(塵沙)의 오랜 겁(劫) 전에 부처됐다 하거니,

무엇 하러 지금까지 깨치려 하는가.

 

*진사(塵沙) : 재물이 티끌과 모래처럼 많다는 뜻

 

묵암선사의 시(2)

 

불조욕(佛 浴 : 불법에 때를 씻은 마음)

洗沐春山古澗濱(세욕춘산고간빈)

虛明無復可湔塵(허명무복가전진)

本來淸淨何須浴(본래청정하수욕)

但滌多生罪業身(단척다생죄업신)

 

봄 산골짝 오랜 시냇물에 목욕하나니,

텅 비고 환히 밝아 다시 씻을 티끌 없다.

본래 맑고 깨끗한데 무엇 때문에 목욕하는가,

다만 여러 생 죄업의 몸을 씻을 뿐이네.

 

 

 

 

경내로 들어가는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면 만세루가 보인다.

편액은 만세루(萬歲樓)로 이지만 루(樓)가 아닌 건물이다.

현재 종무소로 이용되고 있다. 정면에 대웅전이 있다.

 

@고창 문수사는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문수산은 청량산(淸凉山) 또는 축령산(鷲嶺山)이라고도 부른다.

644년(의자왕 4)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사찰 연기 설화에 의하면, 자장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는 길에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이 산이 당나라에서 수행하였던

청량산과 같은 느낌을 주므로,

이곳의 석굴에서 7일 동안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땅속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나오는 꿈을 꾸자

그곳을 파보니 문수 석상이 나왔다.

이에 그곳에 문수전을 건립하고

절 이름을 문수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607년(선조 40)에 중건하였으며,

1653년(효종 4) 성오(悟性)와 상유(尙裕)가

대웅전을 중건하고  삼존불상을 봉안하였다.

 

1764년(영조 40)에는 신화(信和)와 쾌영(快英)이

선운사에서 이곳으로 와 대웅전을 중수하고

양진암(養眞庵)을 창건하였다. 1835년(헌종 1)에는

우홍(牛弘)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문수전, 한산전,

금륜전, 만세루, 범종각, 명부전, 요사 등이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된 문수사대웅전은

건립연대가 미상이지만 1823년(순조 23)의 1차 중수 이후

1876년 고창 현감 김성로(金星老)의 시주로

묵암(默庵)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고 건평은 66㎡이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수사 문수전에는 이 절의 연기 설화와 관련된

문수 석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석상은 상체가 큰 불상으로 좌대와

하반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이 특색이며,

높이 2.25m이다. 부속 암자로는

1618년(광해군 10) 인해(仁海)가 창건하고

1690년(숙종 16) 종희(宗僖)가 중건한

내원암(內院庵)·양진암(養眞庵)이 있다. (출처: 다음 백과)

범종각

 

 

 대웅전

취령산 중턱에 있는 문수사는

백제 의자왕 4년(644)에 자장이 지은 사찰이다.

<다음백과>에 의하면 그 뒤 1607년(선조 40)에 중건하였으며,

1653년(효종 4) 성오(悟性)와 상유(尙裕)가 대웅전을 중건하고

삼존불상을 봉안하였다.

1764년(영조 40)에는 신화(信和)와 쾌영(快英)이

선운사에서 이곳으로 와 대웅전을 중수하고

양진암(養眞庵)을 창건하였다. 1835년(헌종 1)에는

우홍(牛弘)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 안내서>의 의하면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은

지은 연대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종 13년(1876)에 고창현감 김성로의 시주로

묵암(默庵) 대사가 다시 지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전면 3칸, 옆면 2칸, 다포식 맞배지붕 형태의 건물로

특이한 것은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린 것이 특이하다.

고창 문수사 대웅전(高敞 文殊寺 大雄殿)은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목소석가여래삼불좌상 보물 제1918호

명칭: 고창 문수사 목조여래삼불좌상

문화재 지정: 보물 제1918호

조성: 조선시대 17세기

 

법당은 닫집 없이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중앙에 봉안되어 있고,

탱화로는 신중탱과 지장보살 영정과

법고 범종이 법당에 마련되어 있다.

고창 문수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

중앙에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배치된 삼불형식이다.

'삼존불은 모두 육계와 나발을 하고 있으며

가사는 통견으로 승각는 모두 일자로 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의 불상은 삼도가 보이지 않는다.

 

석가모니불

석가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1756년의 「文殊寺創建記」현판, 1843년의

「高敞懸鷲領山文殊寺寒山殿重刱記」현판을 통하여

1654년에 彫刻僧 海心, 性守, 勝秋, 敏機, 道均, 妙寬, 勝照,

勝悅, 智文, 信日, 明照, 景性, 一安, 處仁, 元辨 등

15인의 조각승에 의해 조성된 불상으로서,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의 중요한 기준자료이다.

석가여래와 약사여래,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이와 같은 삼불형식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황폐해진 불교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신앙적으로 크게 주목받았던 형식이다.

 

약사여래불

이 삼불상은 17세기 전반기 불상에 비해

양감이 강조되어 중량감이 있으며,

선묘는 비교적 깊이가 얕고

힘 있는 간결한 선묘를 구사하였다.

이는 17세기 전․중엽 경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크게 활동한

조각승 無染派 조각의 특징이다.

 

아미타불

불상 조각을 주도한 수조각승 해심은

무염의 조각을 계승한 조각승으로, 이곳에는

그의 스승의 조각품에 존중하면서 그가 추구했던

조각적 의지도 함께 담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조각승 해심은 1930년대 초반부터

스승 무염의 조각 작업에

보조 조각승으로 참여하여 조각적 역량을 키웠으며,

1640년대 후반부터는

일군의 조각승을 이끌 수조각승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수사 석가여래삼불좌상은 현재까지 알려진

수조각승 해심의 조각 작품 중, 완성도와

완결성 등을 두루 갖춘 작품이라는데

중요한 조각사적 의의가 있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1654년이라는

제작 시기, 碧巖 覺性, 晦跡 性悟, 尙裕와 海心 등

제작주체와 조각승 등을 알 수 있어

17세기 불교 조각사 연구에 기준자료이다.

이와 더불어 팔각대좌의 윗면에 1844년에

白坡 亘璇의 증명으로

圓潭 乃圓이 중수화원으로 참여하여

불상을 중수하였다는

묵서명을 남기고 있어 불상의 중수 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유익한 자료를 제공한다. (자료출처: 다음백과)

 

@자장(慈藏, 590년~658년)은 신라의 스님이었고,

율사(律師)로 알려져 있다. 출가하기 전에는

진골 출신의 귀족이었으며, 성은 김(金), 속명은 선종(善宗)이다.

자장율사 이 영정은 정암사를 비롯하여

양산 통도사의 진영과 같은 정형적인 모습이다.

 

법명 자장(慈藏)

출생 및 입몰: 590~658년

입적: 태백산 정암사(옛 명 석남사) 658년 (68세)

속명 : 김선종(金善宗)

종파: 계율종

저작: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출관행법(出觀行法)》 《제경계소(諸經戒疏)》외

 

위태천을 중앙에 두고 제 권속을 배치한 신중탱

 

법고와 범종

 

 

 

문수전

전면 3칸 측면 1칸으로 주포식 맞배지붕으로

대웅전과 같이 지붕 옆면이 인(人) 모양을 하고 있다.

문수전에 이 절 연기 설화에서 나오는

문수보살 석상이 봉안되어 있다.

문수전은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

 

 

 

@문수사 문수전 석조승상

명칭: 고창 문수사 석조석상

문화재 지정: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81호

크기: 전체높이 167cm, 폭 55cm, 머리 높이 53cm, 폭 27cm

조성시대: 조선시대

 

 

 

 

산신각(山神閣) 금륜각(金輪閣), 응향각(凝香閣)

일반사찰의 삼성각으로 법당에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

명부전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

명칭:고창 문수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일괄

수량: 지장보살 1구와 시왕 10기

문화재 지정: 보물 1920호

조성:조선시대

 

 

고창 문수사 지장보살상 및 시왕상 일괄은 比丘形의 지장보살상과

帝王形의 十大王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 앞을 지키고 섰던 장군상 2구는 도난당하였고,

이외 판관, 귀왕, 동자 등의 권속들은 전하지 않는다.

이 상들은 제8 평등대왕상에서 발견된

‘造成發願文’을 통해 1654년에 당시 불교계를 대표했던

碧巖覺性과 晦跡性悟, 그리고 회적성오의 제자 尙裕 등

벽암각성의 문도들이 주도한 불사임을 알 수 있고,

彫刻僧은 대웅전 석가여래삼불좌상을 만들었던

해심 등 15인의 동일한 조각승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지장보살상은 팔각 삼단대좌 위에 결가부좌 하였고,

왼손으로 보주를 들었다.

얼굴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중후한 인상이며,

사용된 주름은 힘 있고 간결한 선을 사용하였다.

 

시왕상은 제왕의 관복을 갖추어 입고 폭이 좁은 의자에 앉아

지옥 중생을 심판하는 모습인데,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익살스럽게 연출하였다.

이 지장시왕상을 조각한 수조각승 해심은 1630년대부터

무염의 문하에서 조각수업을 배운 조각승으로,

1640년대 후반에는 수조각승으로서의

조각적 역량을 갖추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작품으로는 1648년에 師翁 幸思와 養師 無染을 위로 모시고

首畵員으로 참여한 해남 도장사 석가여래삼불좌상과

1654년에 수조각승으로 제작한

같은 절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있는데,

대체로 중량감 있는 양감을 통해 중후하고

실재감 있는 존상 표현을 구현한 스승 무염의 조각 전통을

최대한 존중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장시왕상 역시

이러한 무염의 조각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해심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은 일부 권속들이

험난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소실과 도난을 당해

완전하지 않은 점은 아쉬우나, 고색 찬연한 채색과

명부존상으로서의 위엄 있는 기품과

감각적인 표현기법이 돋보이는 17세기 중엽 경의

대표적인 명부조각의 기준 작품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