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춘천박물관 제1부 창령사 오백 나한상

2023. 9. 24. 13:51국내 명산과 사찰

 

사찰의 법당에는 다양한 소재로 많은 불상이 모셔져 있고

나한상들도 모셔져 있다.

수미단에 봉안된 불상의 특징을 보면

거대하면서도 위엄을 지닌 모습으로

보통 사람들의 신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나발(螺髮)이나 육계(肉髻) 등

여러 가지 신체적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사실 우주와 인생의 최고 진리를 깨달은 분이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부처님의 고귀한 인품과

원만한 덕성​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높으신 덕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내고자 일반 중생과 다른

수려한 용모와 위엄을 드러내어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한상들은 모두 이러한 정형으로부터 크게 일탈한,

파격적이고 해학적이며 민중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얼굴뿐만 아니라 자세도 위엄이나 근엄성보다는

서민적이고 토속적이면서도 각기 다른

민초들의 개성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나한상들은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조성된 나한상은 아직 발견된 바 없고,

몇 안 되는 작품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인데

그나마 발굴된 나한상은 마모가 심하여

도상적인 특징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후대에 발굴되어 일부 사찰에 봉안된

특히 석조 나한상들은 호분이나 채색 등으로 원형이 가려져 있어

그 의미가 상실되어 있는 데 반하여

국립춘천 박물관 상설전시장에 모셔져 있는

창령사 오백나한 상들은 발굴 당시의 원형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불자들은 물론 학자들의 높은 관심과

예술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창령사(蒼嶺寺) 오백나한상의 조성 시기는

12세기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로 추정되는데

창령사(蒼嶺寺)의 사력(社歷)이 뚜렷이 밝혀져 있는 기록은

지금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2001년과 2002년

두 차례 창령사지 발굴에서 기와류, 도자기 나한상 등

총 300여 기가 출토되었는데 발굴터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창령(蒼嶺)>이라는 이름이 있어

창령사(蒼嶺寺)로 명명된 것이다.

 

다만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창령사는 석련산에 있고,

석련산은 영월군 서쪽 35리에 있다고 했다.

<동국여지도>에서도 영월군 서쪽 25리에 있다고 했다.

또 1682~1720년에 간행된 <동여비고(東輿備攷)>에 의하면

영월군 서쪽에 석산산이 있고 그 우측에 창령사가 있다고 했고,

18세기 정조대왕 때 발간된 <범우고(梵宇攷)>와

19세기 때 간행된 <관동읍지(關東邑誌)>에는

금폐(今廢)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창령사는 고려 때 창건되고

1792년 폐사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창령사지(蒼嶺寺址)에서 발견된 오백나한은

화강암으로 이는 제천 송학산(819m) 인근 산에서

채석된 것이라고 한다.

 

(제천 고산사 석조관음보살좌상)

 

(제천 고산사 석조 나한상)

영월의 창령사지(蒼嶺寺址)에서 발견된 오백나한과 조성 시기와

그 유형이 비슷하고 또 석재가 채석된 곳에 인접하고 있는 곳

제천 와룡산성 언덕에 고산사라는 가람이 있는데

이 절 응진전에 석조관음 보살좌상 좌우에

나한상 3구가 봉안되어 있는데

그 유형은 물론 제작 시기도 비슷하여

옛적, 이 지역은 관음신앙과 나한 신앙이

유행했음을 추측할 수 있지만

창령사와의 연관관계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창령사지에서 발굴된 동전인에

숭년중보(崇寧重寶)와 고려청자 파편이

다소 발견된 것으로 보아

창령사는 12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한산의 고찰>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줄인 말로,

산스크리트어 아르하(Arhat)의 음역이다.

일체의 번뇌(煩惱)를 끊고 깨달음을 이루어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 만한 성자(聖者)로서,

응공(應供), 무학(無學), 응진(應眞), 살적(殺賊),

불생(不生), 이악(離惡) 등으로도 번역된다.

 

 

나한은 소승의 법을 수행하는 성문사과(聲聞四果) 중에서

가장 높은 과위(果位)를 이룬 존재이다.

난제밀다라(難提蜜多羅, 慶友)가 저술하고

현장(玄奘)이 당의 654년에 번역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

(이하 『법주기』)에서는 십육나한(十六羅漢)이

석가모니불의 부탁을 받아 미륵불이 도래할 때까지

정법(正法)을 지키고 중생을 도와주는 보살로 기록하고 있다.

소승(小乘)적인 성격이 강한 나한은

『법주기』가 번역되면서 대승(大乘)적인 개념으로 바뀐다.

 

 

중국에서 나한상의 가장 이른 예는

당말오대(唐末五代)로 편년 되는 소조(塑造) 나한상이다.

이 상은 돈황 막고굴(敦煌 莫高窟) 제54 굴에서 반출되어

현재 프랑스 기메(Guimet)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 북송대에 조성된 항주(杭州) 연하동(煙霞洞) 18 나한상,

남송대의 항주 비래봉(飛來峰) 18나한상 등이 있다.

 

우리나라 나한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事)』 권 3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의

강원도 오대산(五臺山) 북대(北臺) 상왕산(象王山)에 봉안된

오백나한화상(五百羅漢畵像)이 가장 이른 기록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고려 태조(太祖) 6년(923)에

오대 후량(後粱)에 사신으로 갔던 윤질(尹質)이

오백나한화상을 가져와서

신광사(神光寺)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 속의 나한상이 그림의 형태인 조각의 형태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 나한상이

나말여초(羅末麗初)부터 출현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고려시대 나한상에 대한 기록으로는 고려 예종(睿宗) 13년(1118)에

송의 황제가 보내온 십육나한상을

안화사(安和寺)에 봉안하였다는 것과 함께

장안사(長安寺) 나한당의 십육나한상,

복령사(福靈寺) 십육나한소상(十六羅漢塑像),

묘광사(妙光寺) 십육나한상,

금골산(金骨山) 서굴(西窟)의 십육나한상,

단속사(斷俗寺) 석조오백나한상,

석왕사(釋王寺) 석조오백나한상 등이 있다.

 

(월정사 문수보살동자상과 문수보살상)

 

조선시대 나한상에 대한 기록으로는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懿淑)공주와

그의 남편 정현조(鄭顯租)가 발원한

상원사(上院寺) 목조문수동자상(木造文殊童子像)의

복장문(腹藏文)에 십육나한상을 조성하였다는 내용 등이 있다.

현존하는 나한상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등 전란으로 소실된

전각들이 재정비되면서 나한전이 세워지고

그 속에 봉안되었던 17세기 후반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다.

 

나한상은 나한재(羅漢齋)와 오백나한재,

반승(飯僧) 등의 나한신앙의 유행과 더불어 조성되었다.

나한상은 16나한상, 18 나한상, 500 나한상으로 분류된다.

16나한상은 『법주기』에 근거하며,

여기에 2존의 나한상이 더해져서 18나한상이 조성된다.

한편 500나한상은 십육나한 중의 한 분이

권속으로 오백나한을 거느린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들 나한상은 나한전, 응진전(應眞殿),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영산전(靈山殿) 등에 봉안된다.

 

16나한상과 18 나한상은 단독의 석가모니불상이나

삼존불상, 혹은 가섭상(迦葉像)과 아난상(阿難像)이 시립한

오존불상의 좌우에 각각 배열되는데,

이들 상의 왼쪽에 홀수 서열의 나한상이,

오른쪽에 짝수 서열의 나한상이 봉안된다.

이들 나한상 뒤에는 각각 나한도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조성된 나한상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고려시대 나한상으로는 마모가 심하여

도상적인 특징은 알 수 없으나,

16개의 감실(龕室) 속에 각각 1존식 배치한

천안 성불사(成佛寺) 마애십육나한상(磨崖十六羅漢像),

경기도 화성에서 출토되어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통사(靈通寺) 승려 발원의 동제빈도로존자상(銅製賓度盧尊者像),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출토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나한상(金銅羅漢像) 등이 있다.

 

(영통사 동제 빈도로존자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의 나한상으로는

강원도 영월 창령사지(蒼嶺寺址)에서 출토된

석조 오백 나한상, 정덕(正德) 11년(1516)에 조성된

실상사(實相寺) 서진암(瑞眞庵) 석조 나한상,

인조(仁祖) 6년(1628)경에 인목대비(仁穆大妃) 김씨가 발원한

수종사(水鐘寺) 석탑 발견 금동나한상,

전라남도 나주 불회사(佛會寺)에서 발견된 오백나한상 파편,

인조 2년(1624)경으로 추정되는 순천 송광사(松廣寺)

응진당(應眞堂)의 십육나한상, 순치(順治) 13년(1656)경에

조성된 전주 송광사(松廣寺) 오백나한전의 목조 십육나한상,

1684년에 색난(色難)에 의해 조성된

강진 정수사(淨水寺) 목조 십육나한상 등이 있다.

 

 

 

 

나한상은 불상이나 보살상과 달리 불교

경전의 도상에 얽매이지 않아

여러 모습의 자세와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극도로 생략된 모습이 있는가 하면,

움직임이 크고 해학적인 모습도 있다.

나한상의 지물(持物)로는 염주(念珠), 발(鉢),

동물, 경전, 금강저(金剛杵), 과일 등이 있다.

그러나 창령사의 나한상들은 일체 지물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한상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든 간에

상이 갖추어야 할 심오한 정신적인 면은 항상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불교 조각의 다양한 미의식을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높다고 하겠다.

<참고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