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운흥사 석장승과 금동여래입상

2023. 9. 11. 20:20국내 명산과 사찰

 

나주 운흥사(雲興寺)는

백제불교 초전 성지로 알려진 불회사와 같이

덕룡산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창건연대는 1775년 정문(鄭文)이 쓴

『진여문4중창기(眞如門四重創記)』 에 의하면

당 희종 연간(846∼887)에 도선국사가 이곳의 지세가 좋아

흥덕으로부터 와서 이곳 도성암(道成庵)에서 첫 강회를 열고

터전을 닦은 후 신라 효공왕 연간(897∼911)에

이곳 웅점(熊岾)에 웅치사(熊峙寺)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로는 신라 52대 왕인 효공왕(재위 897~912)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도선국사의 생몰연대가

827(흥덕왕 2)에서 898(효공왕 2)임을 고려할 때

창건주는 도선국사임이 분명하지만

그 후에 사명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진여문사중창기>란 말은 진여문이 4번 중창되었다는 것으로

이미 그전에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711년 지은 '덕룡산 운흥사 사적'과

1775년 지은 <운흥사진여문중창기>,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중창하였고, 조선시대 들어

1573년(선조 6), 1684년(숙종 10), 1758년(영조 34)에 중창하였다.

초창기에 불렀던 도성암(道成庵)이라는 이름은

웅점사(熊岾寺)로 개칭되었고 16세기 이후

웅치사(熊峙寺)로 18세기 후반부터 운흥사(雲興寺)로

다시 개칭되었다고 전해진다.

웅점사(熊岾寺), 웅치사(熊峙寺) 등으로 불리었던 것을

개명한 이유는 곰 웅(熊) 자가 불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자주 불이 나 물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운흥사(雲興寺)로 개명하였고 한다.

이는 마치 강화도 적연사(赤蓮寺)가

화재가 빈번하여 赤을 積으로 바꾸어

積石寺로 개명한 것과 비슷하다.

 

운흥사사적기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380여 칸 규모의 대사찰로 고법당, 응진당, 약사전,

미타전 등 15채의 전각과 동상실, 서상실, 선당 등

10채의 요사, 동암, 소포암, 학수암, 원통암 등

20여 개의 암자를 갖추고 있었으나

1694년과 1702년 두 차례의 화재를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모든 전각이 불탄 이후

 복원되었고, 1998년 혜원 스님이 부임하면서

대불사가 진행되었다. 문화재로는 나주 운흥사

석장승(민족자료 제12호)과 나주 운흥사지

금동여래입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0호)이 있다.

조선 후기의 승려이자 차의 대가였던

초의선사(의순 1786~1866)의 출가처라고 알려진 곳이다.

茶聖 초의선사 정의순선사는 11786년

전남 무안군 왕산리 출생으로 15세에 운흥사 출가

19세에 해남 대흥사에 승려가 되어 대흥사 뒷산(두륜산)에

一枝庵을 짓고 40년 차와 생활. 1866년 81세로 입적하신 분이다.

 

운흥사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민속문화제 제12호로 지정된 석장승이다.

운흥사의 일주문인 격인 해탈문을 들어서기 전

2기의 남녀 석장승이 조성되어 있다.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란 이름이 새겨진 장승은

남장승으로 크기는 2.7m이며 머리에 관을 쓰고

두 눈이 왕방울처럼 크고 주먹코를 한 상이지만

위엄을 보이면서도 안면이 온화하고 인자한

노인 특유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

 

또 큰 치아 두 개가

입의 좌우에 노출되어 있고

수염이 턱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마주 보고 있는 석장승은 여자 장승으로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으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원당장군은 얇고 넓은 판석형의 화강석을 이용하였다.

조각 수법 면에서 남장승보다 섬세하며,

높이가 2.1m, 두께 35㎝, 너비 73㎝ 정도이다.

머리에 다른 장식은 없으며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한 듯

머리 한쪽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운흥사의 이 석장승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립시키는 1719년이다.

 

@이는 하원당장군의 뒷면에

‘化主僧卞學康熙五十八年二月日木行別座金老□伊

(화주승변학강희58년2월일목행별좌김노□이)’라는

내용이 음각되어 있어 화주승 변학과 신도들이

1719년(숙종 45)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운흥사의 석장승이 의미가 있는 것은

여타 장승의 연혁이 불분명한 점에 비추어볼 때

이 장승은 명문의 내용으로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어,

장승 연구뿐만 아니라 민속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장승은 그 형태나 크기에 있어서도 다양하거니와,

몸체에 새기거나 쓰인 이름도 다양하다.

주로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 등으로

불리는 것이 주류이지만

도교적 장군류로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과 같은 분류도 있고,

그 외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

서방백제장군(西方白帝將軍),

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

등의 방위신장류(方位神將類),

불교의 영향을 받은 호법선신(護法善神),

방생정계(放生定界), 금귀(禁鬼), 수조대장(受詔大將) 등의

호법신장류, 풍수도참과 결부된 진서장군(鎭西將軍),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등의 비보장승류[裨補長栍類],

기타 두창장승류[痘瘡長栍類]가 있는데,

이 가운데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의 명문이 가장 많다.

금귀(禁鬼)로는 1725년에 조성된

실상사의 3기 석장승 중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 있다.

운흥사의 석장승은 도교적인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해탈문

운흥사의 입구에 세워진 해탈문은

운흥사의 일주문 역할을 한다.

해탈문 안에는 생령좌(生靈座) 없이

사천왕상만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운흥사의 해탈문은

일주문과 천왕문을 겸한 셈이 된다.

사세가 기울어서 그런지 관리가 되지 않아

해탈문 앞은 덤불이 우거져 정면 진입이 불가하여

사진을 제대로 담을 수 없었다.

 

북방 다문천왕

 

남방 증장천왕

 

동방 지국천왕

 

서방 광목천왕

 

 

 

 

대웅전

운흥사의 전각은 1998년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의 이 건물은 대웅전으로

법안에는 금동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앞은 괘불대와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대웅전에 봉안된 현재의 불상은 1968년

동강면 옥정리에서 발굴되어 나주 용운사에 봉안되었다가

2001년 운흥사로 옮겨온 원래 불상의 모사품이다.

원래의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광배와 몸체와 대좌가 함께 주조된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에 봉안하기로는 불상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모사품으로 대신한 것 같다.

 

발굴된 원 금동여래입상

(자료출처: 문화재청)

@나주운흥사지 금동여래입상(羅州雲興寺址金銅如來立像)

문화재 지정: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0호

불상 크기: 높이 11.2㎝

재질: 금동

제작 시기 : 통일신라 후기(8∼9세기)

 

 

2001년 9월 전남문화재연구원에서 시행한

운흥사지 발굴조사 때 출토되었다.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와 대의(大衣)의 처리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인 8∼9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2003년 5월 27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11.2㎝이며, 광배와 불상 및 대좌를 같이 주조하였다.

육계는 비교적 두텁고 높게 솟아 있으며

머리는 언뜻 보면 소발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오랜 세월 동안 마모 상태가 심한 편이긴 하나

나발의 흔적이 역력하다. 더구나 이 나발은

육계 부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상호는 호형의 예리한 눈썹과 일자형의 눈 모습인데

눈두덩이 두툼하게 돋아난 행인형 모습이다.

코와 입술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윤곽이 보이지 않지만,

입 주위의 양 볼에 나타난 알맞은 볼륨은

8∼9세기 금동불에서 느낄 수 있는 모습이다.

양쪽 귀는 길게 수직으로 내려와 어깨 위에서 멎었고

목 밑으로 장식되는 삼도(三道)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이채롭다.

 

법의는 통견으로 무릎까지 U자형의 옷 주름이 늘어져 있다.

다리는 약간 벌려 서 있고, 수인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취하여

삼국시대 불상의 자세를 따르고 있다.

대좌는 상·하대로 이루어져 있고,

하대는 2단으로 단순한 8엽의 복련이 조각되어 있으며,

상대 역시 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광배는 주형 거신광으로 상단의 끝머리가 약간 구부려져 있는데,

보존 처리 때 훼손이 염려되어 그대로 존치했다고 한다.

광배의 바깥쪽은 화염문을 가득 새기고,

안쪽으로 외곽 형태와 같은 두광과 거신광이 겹친 타원형을 그렸으며,

2줄의 음각 선을 돌려 구분하였다.

내부의 두광과 거신광에는 연화문이 장식되었지만,

단순하고 도식적으로 처리되었다. 광배의 뒷면은

상·하로 구멍이 뚫려 있어 봉안할 때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금동여래입상은 광배와 불상, 대좌를 함께 주조한 특이한 예이며,

삼국시대 금동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인과

대좌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전체적인 형태와

대의의 처리 등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몇 안 되는 작품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세부 문양 기법이나

주형의 거신광 등 예술적 측면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자료출처: 한국민속문화대백과)

 

 

 

신중탱

 

 

@반자

반자(飯子)는 금고(金鼓)의 이명으로 금구(禁口)라고도 한다.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 데

두드리는 도구로서 쇠북이라는 뜻이다.

주로 청동으로 만들며 얇은 북 모양인데 한쪽은 막히고,

다른 쪽은 터져서 속이 비어 있으며

측면에 2~3개의 고리가 달려 있는데

운흥사의 이 반자는 2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팔상전

팔상전(八相殿)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8개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와 불상을 봉안한 전각이다.

운흥사의 팔상전은 중앙에 석불좌상을 봉안하고

불화 없이 양편에 나한상이 배치되어 있다.

 

 

 

 

 

운흥사 팔상전의 석불은 비지정문화재.

불상 크기 :현고 170cm, 무릎 폭 104cm

 

이 석불은 원래 1968년 동강면 옥정리에서 발굴되어

나주 용운사에 봉안되었던 것인데

2001년 운흥사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마모가 되어 있지만 영암 도갑사 미륵전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과 비교하면

육계(肉髻)와 나발(螺髮), 목의 삼도, 항마촉지인 등은 비슷하지만

광배에 소불(小佛)이 없고 또 도갑사의 석조여래상은

가사가 편단우견(偏袒右肩)인데 반하여

이 불상은 통견(通肩)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관음전

관음전에는 아미타불 본존으로 관음보살을 좌협시로 모셨다.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우협시는 당연히 대세지보살이나

혹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것이 상례인데

우협시로 모신 보살상이 좀 모호하다.

보관을 쓰고 육환장도 없는 것으로 보아 지장보살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대세지보살이 되어야 하는데

유희좌(遊戲坐)의 우서상(右舒相)을 취하고

보관에는 대세지보살의 상징인 보병의 형상도 없고

수인(手印)도 특이하다.

 

신중탱

 

관음탱과 관음보살

 

 

반야용선

#반야용선도는 미타불과 그 권속이 왕생자를

용선으로 표현한 반야선에 태워 서방정토로

인도해가는 모습을 그린 도상이다.

용선은 선수(船首)나 선미(船尾), 혹은 배 전체를

살아있거나 조각한 용의 머리나

꼬리 혹은 용의 전신 모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반야용선도의 변천을 보면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세지보살, 인로보살, 지장보살이 모두 함께

혹은 다양한 조합을 이루면서 등장하다가

점차 선수에서 번이나 삿대를 들고 인도하는

인로보살과 선미에서 호위하는 지장보살이

쌍을 이루는 도상으로 정착되어 간다.

인로보살과 지장보살이 반야용선도에 편입되는 것은

지옥 중생을 구제하는 영혼 천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다.

운흥사의 이 반야용선도는 선두에 인로보살을

선미에는 관음보살을 배치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정토왕생을 위한 쉬운 방편으로 제시된

염불신앙의 발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운흥사의 산신각은 좀 특이하다. 

산신은 탱화로 처리되고 탱화 앞에는 나한상을 배치하고 있다.

 

 

 

 

 

산신각에서 바라 본 대웅전이다. 대웅전 벽에는 십우도가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