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춘천박물관 기행2 한송사지 문수보살상(국보 제124호)

2023. 9. 17. 10:28국내 명산과 사찰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영월 창령사터에서 발굴된

500 나한상을 전시하다는 소식을 지난 3월에들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따가운 햇살이 쏟아붓는

7월 마지막 날에야 겨우 緣이 닿아 춘천박물관을 찾았다.

오백 나한상은 전시 기간은 끝났지만

2층 상설전시장 <오백나한실>에 봉안되어 있었다.

밖은 불볕더위인데 다행히 박물관 안은

냉방이 잘 되어 있어 땀도 식힘 겸 나한실 좌측에

또 다른 전시실이 있어 먼저 둘러보았다.

전시실에 들어가니 입구 바로 앞에 3기의 철불상과

2기의 석불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철불과 석불을 둘러보는 중

우연히 국보 제124호로 지정된

강릉 한송사지 문수보살상이

전시되어 있어서 함께 포스팅한다.

이번 포스팅은 1, 2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철불과 석불을 위주로 한송사지 문수보살상을,

제2부에서 창령사 오백나한 상을 포스팅한다.

 

우리나라의 철불(鐵佛)은 신라하대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는 이른바 ‘나말여초기’에만 유행했다.

보통 철불은 주조과정이 끝나면,

불상 표면에 호분을 입히고 채색하거나,

옻칠을 입히고 그 위에 개금(改金)을 하므로,

불상 표면의 도드라진 이음매가 감춰져 완성된 후에는

원재료(原材料)가 철(鐵)인지 동(銅)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춘천 박물관에 전시된 2기의 철불은 개금되지 않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불상은 중대 신라까지 금동과 소조,

목조, 석조불상이 주류를 이뤘던 것에 비해,

하대 신라 9세기에 들어서 철불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 사회의 경제적인 측면과도 관련이 있다.

철(鐵)은 예전부터 농기구나

무기를 만들던 재료로 사용되었으므로

호족이나 지방민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금속이었으며,

신라말부터 철광채굴이 증가하여 철의 공급이 늘어났던 것도

철불이 유행했던 이유의 하나로 작용했던 듯하다.

 

철불이 집중적으로 造成되기 시작한 시기는

남북국시대 신라말에서 고려 초기로 이때는

왕권의 약화로 중앙집권 세력이 약해지고

지방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現世求福을 기원하는

현실적인 조형의 철불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철불은

충청남도 서산 전(傳)보원사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전성기에 조성된 철불좌상을 꼽지만,

이 철불의 제작 시기도 8~10세기경으로 추측되며,

국보 제63호로 지정된 파주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도

신라 경문왕 때(875년)에 제작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철불은

9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1호)원주 학성동(읍옥평) 철조석가모니불좌상

(原州 鶴城洞 鐵造釋迦牟尼佛坐像)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보물 제1873호로 지정된

원주 학성동 철조 약사여래좌상을 포함하여

발굴 당시에는 원주시 학성동(읍옥평) 들판에

다섯 구의 철불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현재 전시된 2구의 철조 석가모니불은

그 다섯 구 중 2기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편의상 제1호, 제2호로 칭한다)

전시된 2기의 철불은 석가모니불로 조성 시기도

고려 초 10세기로 같고, 나발, 육계, 이마의 백호, 목의 삼도,

우단편견, 항마촉지인 등 거의 비슷하다.

다만 제1호기의 양손이 파손된 것만 다르다.

 

옷 주름은 융기선으로 나타나 있으며,

무릎 아래로 펼쳐진 부채꼴의 군의(裙衣) 자락의 주름 등은

청양 장곡사 철조 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이나

평택 만기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67호),

충주 3대 철불의 하나인 단호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12호) 등에서

볼 수 있는 형상으로 이는 모두

신라말에서 고려 초기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이다.

 

 

 

 

(2호기)원주 학성동 철조석가모니불좌상

(原州 鶴城洞 鐵造釋迦牟尼佛坐像)은 

1호기에 비하여 2호기 이 철불은

얼굴형이 조금 타원형에 가깝고,

조금 경직된 느낌과 또 어깨가

위로 올라간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다르다.

양손은 1호기와 달리 온전하며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원주 본저전동 철조 아미타불좌상

가부좌에 아미타 9품수인 중 상품상생(上品上生)의 수인을 하고 있다.

나발(螺髮)은 촘촘하게 조성되어 있고

육계(肉髻)는 완만한 둥근형이다. 이마에는 백호가 분명하고,

목에는 삼도가 있다. 앞의 석가모니불과는 다르게

통견(通肩)을 하고 있으며 안에는 승각기를 입고 있다.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12호)과 같이

승각기에 나비매듭이 있다. 무릎을 덮은 가사의 주름이

물결처럼 비현실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앞의 두 철불과 달리 무릎 사이에 부채꼴 주름을 한

가사가 보이지 않는다.

조성 시기는 앞의 2기의 철불보다 조금 늦은

고려시대로 대략 11세기로 추측해 본다.

 

 

 

 

 

 

 

원주 영천사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얼굴의 마모되었지만 대체로 온화한 상을 짓고 있다.

가사는 통견으로 마모되었지만,

승강기와 나비형 매듭이 흐릿하게 보인다.

 

수인은 지권인으로 오른손이 왼손을 감싼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오른손 주먹이 파손되어 있다.

 

 

가사의 주름이 비현실적인 물결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무릎 사이의 가사는 마모되어 있지만 나비형임을 알 수 있다.

조각 솜씨가 매끄럽지 못한 것으로 보아

신라말이 아닌 고려시대로 보인다.

 

 

좌대의 상대는 앙련이 부조되어 있고

중대는 천부(天部)상이, 하대는 복련이 부도 되어 있고

지대석에는 안상이 부조되어 있다.

 

 

 

원주 본저전동 석조비로나불좌상

앞의 영천사 비로자나불좌상과

전체적으로 흡사하며 선명한 작품이다.

가사의 융기된 주름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수인도 학사동철불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만 입을 약간 벌리고 있는 것이 차이가 있다.

 

 

 

 

 

좌대는 3단으로

영천사 석조비로자나불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상대는 앙련(仰蓮)이 복겹이고 중대는 보살상 부조하였고

하대는 복련(覆蓮)을,

하대 지대석은 안상(眼象) 안에 동물들이 부조되어 있다.

 

 

 

 

 

 

전시장 양벽쪽에 전시된 유물을 대충 둘러 보았다.

 

 

 

 

 

 

 

@고려범종의 특색을 살린 용통(甬筒)과

용뉴(龍鈕)가 정밀하게 조성되어 있다.

 

@고려범종의 특색을 살리는 용통(甬筒), 용뉴(龍鈕),

유두(乳頭) 유곽대(乳廓帶) 등이 세밀하게 조성되어 있다.

특히 범종의 천판(天板) 형상이

마치 연꽃을 받치고 있는 듯 특이하다.

 

 

 

 

 

 

 

전시실 입구에 제대로 된 설명서도 없고,

또 전시실 실내가 너무 어두워 건성으로 보고

사진조차 제대로 담지 못했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옛적 어디선가 본듯하여 검색해 보니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이다.

이하 문화재청의 설명과 사진으로 대신한다.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국보 제124호

제작: 고려 초 10세기경

 

원래 강원도 강릉시 한송사 절터에 있던 보살상으로

1912년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조인된 ‘한일 협정’에 따라 되돌려 받았다.

잘려진 머리 부분을 붙일 때의 흔적과

이마 부분의 백호(白毫)가 떨어져 나가면서

입은 손상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머리에는 매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관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볼이 통통한 네모난 얼굴에는 눈이 가느다랗게 새겨져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목에는 굵은 3줄의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3줄의 목걸이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옷 주름이 새겨져 있다.

검지를 편 오른손은 연꽃 가지를 잡고 가슴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손 역시 검지를 편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발은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하고 왼쪽 다리를 밖으로 하고 있다.

 

 

 

한국 석불상의 재료가 거의 화강암인 데 비하여

이 보살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조각 수법과 아울러 재료에서 오는 질감이 좀 더 우아하고

온화한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듯한 얼굴과 몸은 풍요로우며,

조각 수법 또한 원숙하고 정교하다.

원통형의 보관이나 풍만한 얼굴, 입가의 미소 등은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과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국보)에서도

공통으로 보이는 특징인데,

이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만든 시기는 고려 초인 10세기로 추정된다.

<사진 및 자료출처: 문화재청>

 

한송사지 문수보살상(국보 제124호)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제48-2(지정일: 2017.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