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에 지은 누정 고창 두암초당(斗巖草堂)

2023. 10. 5. 20:25명승지

 

 

거대한 바위에 조성했다는

절애의 누정(樓亭) 전북 고창의 두암초당을 찾았다.

 

고창 아산면 반암리

아산초등학교 운동장 한구석에 주차하고

학교 바로 뒤편에 있는 두암초당으로 향했다.

학교는 추석 연휴라서 그런지 텅 비어 있었고,

화단에는 늑각이 상사화가 피어 있었다.

상사화(相思花)는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달려 있을 때는 꽃이 없어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상사화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철이 들어 효도하려니 이미 부모가 계시지 않는다는 말,

한가위 휴가를 지내면서

두암초당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함께

상사화의 꽃말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경구(敬懼)해 본다.

 

 

 

 

 

 

학교 뒤편을 돌아서니 거대한 전좌바위가 나타난다.

앞의 건물은 영묘정이고 산 허리에 있는 건물이 두암초당이다.

 

영모정(永慕亭)

1931년 쓰인 두암초당 중건기에 의하면

「호남의 명승지에 일찍이 양 선생이 사셨는데

형은 호암(虎巖)이요 동생은 인천(仁川)으로

우리 동방에 은덕 군자이자 아울러 유림의 으뜸이었다.

바위 곁에 금반 모양의 땅이 있었는데

호암 인천 양선생의 옛날

여묘살이(廬墓:무덤 근처 초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를

했던 곳이다. 여묘(廬墓)가 헐어서 집이 되었는데

집의 이름은 영모였다.

이는 양 선생의 부모에 대한 효를 생각하는 집이다”」 라고 했다.

재실(齋室) 영모정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필자가 방문할 때 불행히도 영모정은 물론

두암초당까지 싸리문이 자물쇠로 꼭꼭 닫혀 있었다.

특별한 날은 초당의 싸리문을 열어두겠지만

평시에는 싸리문에 자물쇠로 문을 닫아두는 모양이다.

누정의 싸리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싸리문 밖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두암초당. 숲에 가려 전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두암초당(斗巖草堂)>은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아산초등학교 뒤편, 영모정 뒷산에 있는

전좌바위(일명 두락암)에

일제 강점기 때에 지은 누정(樓亭)으로

부모가 돌아가시자 여묘(廬墓)살이했던

호암(虎巖) 변성온(卞成溫,1540~1614)14) 과

그의 동생 인천(仁川) 변성진(卞成振, 1549∼1623) 형제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누정(樓亭)이다.

 

두암(斗巖)이라는 이름은 호암 변성온이

하서 김인후에게 가르침을 받고,

퇴계 이황과 교류한 호암의 인품이 마치 곡식

을 세는 말(斗)이나, 저울추같이 평평하여

모자라지도 치우치지도 않았다고 해서

두암(斗巖)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동생 변성진의 호가 인천(仁川)인 것은

고창의 명물인 풍천장어가 나오는 주진천은

인천강으로도 불리는 하천인데

근처에 ‘호암초당’을 짓고 머물렀는데

강물이 자주 범람하자 ‘물을 잘 다스려야 한다’라는 의미로

변성진이 호를 인천(仁川)으로 하면서

강도 인천강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세월의 풍파에 호암초당이 유실되자,

마을 사람들이 전좌바위 중턱에 있는 바위굴에

초당을 지어 그들을 기렸다고 하며,

1815년에 5대손 변동빈이 그 자리에

‘두암초당(斗巖草堂)’을 중건하였다.

 

두암초당에는 1935년의 상량문이 남아있고

현재의 모습으로 되기까지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이곳은 고창 출신의 김소희(1917-1995) 명창이

15세 때 득음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곳은 또한 주위의 구암(九岩) 등 바위 등과 어우러진

경관이 빼어나 고창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 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에 종사 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측면에 <두암초당(斗巖草堂)>이란 현판은

구한말의 서예가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 1872~1941) 선생의 글씨로

송태회 선생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구한말

일제 강점기 호남화단의

마지막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로 불렸던 분이다.

48세 때인 1920년

오산고등보통학교(1922년 고창고등 보통학교로 개칭)

한문 교사로 초빙, 조선어와 한문, 습자, 미술 등을 가르쳤다.

이때 호암(壺巖)의 실경을 그린 ‘호암실경도’가 전하고 있다.

이 그림은 그가 1928년 6월 상순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두암초당이라는 편액 이외에 정면에는

<산고수장>과 <고산경행>이란 2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두암초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전체규모가 6.62㎡로 작은 건물이지만

바닥에 바위를 뚫어 기둥을 세우고,

처마는 바위를 파고 지은 작은 누각으로

실내에는 5대손

변동만(시제:題) 과 노사 기성진(蘆沙 奇正鎭)의

시(시제: 謹次) 등이 걸려 있다.

 

두암초당의 앞면에 걸린 <산고수장(山高水長)>이란 편액은

변씨 형제의 덕이 뛰어남을 비유하여

산은 높이 솟고 강은 길게 흐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산고수장(山高水長)이란 이 편액은

고창 출신인 변암의 후학인 김정회 글씨다.

본래 의미는 산은 높고 물처럼 장구하다는 뜻으로

고결한 사람의 인품이 오래도록 존경받는다는 의미다.

산고수장이란 이 고사성어는 중국 송(宋) 나라 때

범중엄(范仲淹)의

<동려군엄선생사당기(桐廬郡嚴先生祠堂記)>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당기의 엄(嚴)선생은 후한 때 은사(隱士)인 엄광(嚴光)으로

동한(東漢)을 개국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친구 사이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한 뒤 그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며 평생을 보냈다.

후세의 많은 사람이 그의 청절(淸節)을 지킨 기개를 우러러보았다.

범중엄은 엄주(嚴州)의 태수가 되어 이곳에 부임하자

엄광이 머물렀던 엄주 땅에 그의 인품과 고결한 뜻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었다. 그의 사당기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雲山蒼蒼(운산창창) 강수앙앙(江水泱泱)

先生之風(선생지풍) 山高水長(산고수장」

 

(구름 낀 산이 푸르고 강은 깊고 넓도다.

선생의 유풍을 산처럼 높고 저 물처럼 장구하리다)

 

절친한 친구가 황제가 되어 명예와

재물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높은 지위를 사양하고

일생을 산속에 은거하며 살았던

그의 절개가 후세가 길이 전해지기를 바란 것이다.

두암초당의 이 편액의 의미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퇴색화 되어 가는 현대인에게

효행의 참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라는 의미도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권력자의 친인척들이 행하는 각종 비리와

불법이 자행하는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실로 귀감의 경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고산경행 [高山景行]의 편액은

후학 유영만(劉永万)과 유제철(柳濟哲)이

스승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고산경행이란 사람의 덕행이 고상함을 칭송하는데 쓰는 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존경을 받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두암초당에는 1928년 <호암실경도> 를 그린 교육자이자

서예가인 송태희가 쓴 두암초당의 현판을 비롯해

퇴계 이황 등 유명한 유학자들과 교류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중, 스승 김인후가 제자인 변성온에게 써준 이런 시도 있다.

 

“술이란 항아리 비우면 취하기 마련이지만

시는 얕은 흥으로 읊을 수 없네

등불 아래 처마 밖 빗소리를 들으며

그대와 함께 이 한때의 회포나 풀어보세”

 

제자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시이다.

 

 

 

 

 참고로 절애의 바위에 조성한 두암초당과

비슷하게 지은 법당을 함께 소개한다.

괴산 석천암 대웅전과 구미 사자암 문수사 문수전,

옥천 구절사 산신각 등이 있다.

두암초당과 차이점은 이 전각들은

절벽이 아닌 평지에 기둥을 세우고

처마 쪽만 암벽을 파내고 조성한 것이다.

 

괴산 석천암 대웅전

 

구미 사자암 문수사 문수전

 

옥천 구절사 산신각